Sunday, December 25, 2016

2016-12-25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예수그리스도의 표적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 사랑의 표적인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놀라운 소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다. & 대적하고 배척한다. (요1:10~12) 송아지도 자기를 나은 사람을 아는데, 죄때문에 자신을 창조하고 나은 분을 알지 못하는 미련한 자가 된 것이다. 죄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우리 이성을 빼앗아 간 것이다. 성탄절에 다시 한번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 보시길 바래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냐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죄인이 어리석고 마음이 악하면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해야지, 세상 차원에서 하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땅에 왔는데, 주인이 누군지 우리는 알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선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베들레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시골 촌 동네이다. 다윗의 고향이기 때문에 역사성은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촌 동네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긴급, 중요한, 엄청난 뉴스이다. 가장 중대한 뉴스를 받았을 때는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가장 중대한 뉴스를 전해들었을 때는 누구에게 먼저 전했을까요? 그당시 이런 사건이 있으면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을 것이다. 이게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식이다. 이런 사람의 생각을 내려놔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몇십년동안 쌓아온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할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내 생각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이 신앙이다. 하나님은 엉뚱하게 베들레헴의 양을 치는 목자에게 천사들을 보낸 것이다. 부자도 아니고 이름있는 자도 아니고 아무도 관심가진 자가 없는 목자에게 보낸 것이다. 목자들은 왜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셨냐고, 자격이 없고 초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큰 소식을 받는 사람 자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식은 앞으로도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이런 방법으로 이렇게 정해질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방법으로 전하시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좋은 소식은 대제사장, 왕, 황제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다. 이게 세상 방법과 다른 방법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은 낮아진 자에게 먼저 전해지는 것이다. (눅1:51~53) 이런 사실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동방박사를 통해 대제사장과 서기관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느냐?"고 물어보는 것을 통해 먼저 전하려 했지만, 가진 자는 "베들레헴"이라고 대답을 했지만 무관심함으로 베들레헴으로 가지도 않았다. 로마 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당시 가장 부유했던 고린도 지역에 바울이 교회를 개척했는데 (고전1:26~29)와 같이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로 알길 바래요. 그래야 하나님의 일에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신다.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신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 와서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생명을 아는 것에 촛점을 맞추길 바래요.

2.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


환상이 아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존귀하신 예수님이 말구유(말밥통)에서 나셨다. 천사들의 말이 더 가관이다. 그것이 표적이라고 한다. 이게 어떻게 만왕의 왕이라는 표시냐? 3대째 거지의 표시라는 말이 더 이해가 갈 것이다. 하나님의 차원은 우리의 차원과는 다르다. 이런 하나님의 차원으로 인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수천년동안 기다리고 있고, 로마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오셔서 로마 군대를 이기는 모습으로 와야 메시아로 인정할 것으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환상을 깨야 한다. 교회, 목회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놔야 한다. 이것이 내 신앙을 어렵게하고 교회, 하나님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백마를 탄 왕자같은 표적을 기대하는 자에게, 말구유에 나오는 표적을 천사에게 들으면 천사를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적을 목자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이사야53:1~2) 이 말씀을 아는 사람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구유에 쌓인 아기만에 표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것은 악한 왕을 만날 뿐이고, 외식하면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종교인만 만날 뿐이다.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 자기 명예만 신경쓰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고후4:7) 금그릇, 화려한 교회만 찾아다닌다. 그곳에 보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배를 질그릇에 넣었다고 하지만 질그릇에는 관심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만에 찾을 수 있도록 질그릇에 넣으신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높은곳에 올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낮은곳으로 내려가는 신앙 하길 바래요. 착각하지 마세요. 지금도 우리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능력인 것을 알길 바래요. 자기 십자가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마굿간에 계시는 예수님의 보배를 만나려면 내려가는 능력과 마음을 가지는 성탄절 되길 바래요.

Sunday, December 18, 2016

2016-12-18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살아가는 방식과 살아가는 것들이 다르다. 이건 틀린게 아니고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추구할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태어난 본래의 목적이 창조목적인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 관점과 사람의 생각,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신앙이 어려울 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온전하신 반면에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쁘게 여기는 기준과 사람의 기준이 다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잘하고 빈틈없고 뛰어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반면에 하나님은 빈틈많고 뛰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여전히 관심이 많으신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작은 일이라도 마음을 드려서 충성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길 때가 많다. 사람은 일등하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반면에, 하나님은 물론 그 사람도 존귀히 여기지만 꼴등하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으시다. 이새의 아들 중 능력있는 첫째, 둘째, 셋째가 아닌 막내인 다윗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관심 가지시고 찾으시는 사람이 누군지 찾으시길 바래요. & 같은 마음을 가질 기회가 되길 바래요.

1.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마라 (10)


작은 자는 관심가질 수 없고 우리들이 배척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작은 자의 모습으로 평생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다른 사람들과 밥 한끼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 계단 구석에서 빵먹는 혼밥세대가 늘어나고, 방안에서 인터넷으로만 대화할 수 있는 방콕세대 등이 늘어난다고 세상에서는 말한다. 세상에는 의외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세대가 많아진다. 사이버 공간에서 자기를 찾으려는 사이버세대가 늘어나는 것이다. 정년에 퇴직해서 할일 없어서 방황하는 노숙자도 많고, 사업이 망해서 백수로 살아가는 세대가 늘어난다. 과거에 못살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잘사니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수능을 잘 치루고 좋은 대학을 가더라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연약한 자는 품어주는 세대가 아니고 더 외면하는 악한 세대가 된 것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 편에 서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업신 여겨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10b)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작은 자라도 보호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서 하나님께 날마다 보고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왜 관심을 가지실까 우리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누가 그들에게 빵을 주는지 매일 보고받으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늘 큰 자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천사를 보내면서까지 이런 작은 자에게 있는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나고 하지만 누가 정말 사랑하는지 작은 자를 대하는 것을 통해 보시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작은 자였을 때 죄로 인해 방황할 때,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우리에게도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가 아주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자라도 하나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작은 자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자에게 우리도 귀히 여길 수 있는 예수님 마음 가지길 바래요.

2. 작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양을 치는 목자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계신다. 사람들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는 것이 다른 것을 설명하신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해 찾으러 가신다.

1) 길을 잃은 양


길 잃은 양은 100마리 중 99마리와 같이 있지 않고 홀로 다른 길로 간 한마리 양을 말한다. 목자의 길을 잃은 방황하는 양이다. 왜 길을 잃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잃은 양 한마리를 이해할 수 있다. 양은 눈이 약해서 앞을 잘 보지 못한다. 한 곳에서 풀만 뜯다 보니 본의아니게 길을 잃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목자의 보호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스스로 이탈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음이 악해서 다른 무리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이 약해서 스스로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성격 문제일 수도 있다. 상처 때문에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약점과 실수 때문에 다른 양들에게 피해를 입혔을 수도 있다. 그래서 99마리의 양들도 잃어버린 양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격이 까다롭고 상처가 많아서 늘 가시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 공동체에서 모임에서 배척당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자가 되는 것이다. 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그런 삶을 살수밖에 없는 자가 작은 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도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주변에 작은 자가 누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작은 자에게도 천사를 보내셔서 괌심있게 지켜보신다. 이게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관심을 갖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바래요,

2)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잃은 양은 다른 99마리의 양은 찾지 않는다. 그래서 목자가 찾지 않으면 이리나 늑대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삯꾼목자는 계산을 하고 한마리를 찾기보다는 99마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힘쓴다. 이 말씀의 핵심 비유는 바리새인과 새리를 염두해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귀들을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한마리의 양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찾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찾으시는게 아니고,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한사람을 찾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눅5:32) 바리새인들은 의인들을 위해 일을 했다. 이런 사회통념으로 보면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의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도 의인에게 관심을 가지신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상은 죄인 한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다. 학교도 학생을 뽑을 때 좋은 사람을 뽑으려고 하지, 죄인을 뽑는 회사는 아무데도 없다. 오직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본 것이다. 그 사람을 보고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다. 지금까지 바리새인, 부모님 등도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 아무도 가길 꺼려하는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거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린 죄를 짖고 사회통념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쳐다도 안보고 무시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세리를 하고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삭개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적은 죄와 지은 것처럼 완전하게 살 수는 없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 죄나 상대 죄나 똑같은 죄이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그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려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이 고통이 이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는 것이다 . 한번의 실수로 평생 회복 불가능한 한 사람이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죄인에게는 정죄와 심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은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죄인에게 은혜의 기회를 줘야 한다.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지 모한 사람이 어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죄를 안 지었다고 앞으로 안지을까요? 그것이 가장 무서운 세상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긍휼 받지 못한 한 사람을 찾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길 바래요.

ㅣ3)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 (13)


99마리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지만 한마리를 찾으면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평생 옳게 살겠다고 하기에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옳게 살려는 것으로 인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했고, 회개하지 못한 것이다. 의인의 최대 단점은 자신의 죄를 모르고 회개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바리새인들은 죄가 없어서 잘한 것만 기도하고 한마디의 회개도 없었지만, 세리는 엉망의 인생을 살았지만 자신의 죄와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한마디를 듣길 원하지만 바리새인에게는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세리와 창귀들은 엉망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둘 중에 누구를 더 기뻐하겠습니까? (눅15:7)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믿으시길 바래요. 교회 안에는 평생 착하게 사면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이많다. 그런 사람들을 판단하기도 쉽고 무시하기도 쉽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범하기 쉬운 실수는 그것이 자기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죄를 알지 못하고 회개가 어렵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 죄는 보지 못해도 남의 죄는 잘 보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다. 죄가 없다는 의인보다는 차라리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은혜이다.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더 낫다. 그런 한 사람을 찾아서 삭개오과 같이 인생을 새롭게 살길 원하신다. 내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사람이 되길 원해요.

Sunday, December 11, 2016

2016-12-11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가장 큰 계명 (마22:35~40)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려운 것을 시키고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우리가 모르는 선입견, 가치관이 있다. 하지만 성경책에는 신앙은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피곤하고 지친 삶을 사는 우리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재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떤 큰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더 원하신다. 오늘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말씀대로 할 때 놀라운 성장이 있을 줄 믿습니다. 율법사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두번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앙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도 밖에서 운동을 한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마음에 상처와 원한이 된다. 하지만 내가 하고싶어서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수고와 값지불이 따라도 그 일을 한다. 내가 정말 갖고싶은 물건이 있으면 구경만 하면 안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근데 이걸 그냥 생각만 하면 안된다. 신앙을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을 자라려면 값지불이 따른다. 값지불이 없으면 결과적으로는 변화가 없다. 내가 정말 가치있기 원하면 투자를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 10명이면 10명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월까?

1)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대로,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어케 대하느냐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요1:14)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a. 말씀을 믿음

말씀이 믿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진다.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깨달아지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는구나라고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 말씀 앞에 내 생각, 내 이성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긴 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막6:5~6)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능력을 행할 수 없었다고 말씀 하신다. 그런데 내가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찾아오고 도와주실까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도와주신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영적인 상태가 드러난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아무리 칭찬을 해도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나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 내 인생이 새롭게 되길 원한다면 말씀을 통해 내 모습, 내 가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교만한 것이다. 내가 정말 성실하다고 생각해도 신앙이 자라지 않고 믿음생활이 안되는 것은 내가 교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롬10:17)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고, 세상을 사랑하는 세력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굉장히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 채우다 보면 영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벧전2:2) 갓난아기는 체면을 차리면서 매너있기 우는 아기는 없다. 배가 고프면 최선을 다해서 아주 시끄럽게 운다.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어떻게든 아이가 원하는 것을 빨리 해주고 싶다. 하나님은 갓난아기가 엄마의 젓을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b. 말씀을 지킴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싶다는 소원이 생긴다. 건강한 신앙, 바른 신앙은 말씀대로 하는 신앙이다. 신앙을 잘한다는 기준은 뭘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신다.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예수님도 나타나실 것이라고 하신다. (출20:6) 과연 내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한다면 내가 주님의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남들보다 더 헌신하고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형통케 하신다. 우리가 말씀대로 하면 내 영혼에 기쁨이 있다.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내 삶에 열매와 은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는데 왜 열매가 없지? 라고 생각하면 그 말씀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불순종의 세력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어려운 방법으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지혜로운 방법, 더 뛰어난 방법으로 하니까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내가 주님께 받은 사랑에 비하면 주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 미미한 것이다. (눅7:37~38) 이 여인은 자신이 귀하게 모은 향유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향유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예수님 뒤에 왔는데 아무도 예수님 발을 씻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눈물로 자기의 머리와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다 쏟아붓고 씻겨드린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향유가 값비싸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 생각, 고집을 꺽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2) 나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나의 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말씀 앞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신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의 반대는 두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의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세상의 죄를 사랑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이러한 은혜를 다시 기억하길 바래요.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에 대한 뜨거운 첫사랑, 감격이 있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열정이 생긴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하길 원하신다. (계3:15) 신앙을 할 때 차든지 뜨겁든지 하길 원하신다. 내가 어떤 일을 할때 그 분야에 뜨거운 열정이 있다. 이렇듯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길 바래요. 멀리 집이 있어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있기 때문에 일찍 예배에 오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열정을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고난, 어려움이 있을 때이다. 내 마음이 가난할 때이다. 진로, 결혼, 취업, 가정, 사업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주님을 더 사랑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해결해주시면 마음이 식는다. 처음 그 마음, 첫사랑을 회복하길 바래요.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신다. 뜻을 다하라는 것은 내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뜻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런 하나님이 내 중심이 되면 유익이 되는냐 아니냐가 판단 기준이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이 좋아할지 아닐지가 내 가치관이 될 것이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그것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모님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꺽을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가 사랑하면 나 중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서로 닮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될 때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뜻을 다해 사랑한다면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유익을 기뻐할 수 있다. 똑같은 신앙, 일을 해도 다를 수 있다. 과연 나를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말 하는 것인지 하나님은 그 중심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가 신앙을 한다면 내 뜻이 순수해야 한다. 내가 속이고 감추는 또다른 것이 없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이 같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동기를 보신다. 나의 신앙, 인격이 나 중심적이면 신앙, 말씀을 나 중심적으로 한다. 내 인격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니 하나님이 유치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길 바래요.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사건들이 무제가 되지 않는다. 신앙을 잘하는 방법은 내 생각, 내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면 된다. 하나님은 내 마음과 뜻을 다해 나의 주 하나님을 높이길 원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빌3:8)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축복합니다.

2.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것이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내 옆에 있는 한사람 한사람이 귀하게 여겨진다. 나와 같은 죄인을 어떻게 용서해주시는지 깨닫게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문제를 감히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이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 내 안에 좋은 것이 있다면 남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을 것이다.

1)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내 이웃인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예수님은 실수하고 실패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나와 생각, 말, 문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일 수 있지만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느냐가 내 안에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없다면 이것을 구하시길 바래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라고 하신다. (눅10:30, 33~37) 제사장이나 레위인(율법에 죽은 자는 부정한 것이라고 했다)은 도둑에게 맞고 죽어가는 사람을 거들어 보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여인만이 도와줬다. 영혼에 상처가 있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자에게 예수님을 가까이 가서 치유하고 돌봐준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 주변에 죄와 상처에 고통받는 사람을 품을 수 있길 바래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길 원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상처많은 나를 많은 사람이 감당해 줬구나 하고 생각이 들 것이다. 내가 그런 은혜를 받았구나, 나의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날마나 만나는 사람, 자주 부딧치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그 사람으로 인해 큰 실망,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만이 그 사람을 감당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그 사람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다른 지체들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가끔 믿는 사람이 초라하게 보인다. 한 사람이 믿고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까요? 내 옆에 작을지 모르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하고 아름답게 보이길 바래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도 귀하게 여기신다. (마10:41~42) 하나님은 나와 전혀 인간적으로 상관없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살아하기 때문에 나도 귀하게 여기면 그 상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줄 것이라고 하신다. 나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길 바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은 어려운게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행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길 바래요. 내가 과거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길 바래요

Sunday, December 4, 2016

2016-12-04 (주일예배, 강국정목사님) 믿음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13:14~18)

(시81:10) 목사님께서 CTS에 덕담 한마디 해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축복의 말씀이길 바랍니다. 개구리처럼 입을 작게 벌리지 말고,하마와 같이 크게 벌릴때 고기를 따라갈 필요가 없고, 입만 열고 숨만 쉬면 우리가 먹고싶은게 다 들어올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에굽에서 종살이를 구원해내신 분이 나의 하나님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 대한민국 열방 가운데 믿음의 행보를 겅을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한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한게 없구나, 아쉽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고개가 절로 떨어진다. 남은 몇주간 잘못산 것을 회개하고 눈을 들길 바래요. 그러면 남은 몇주간에 십자가로 승리할 줄 믿습니다.

1. 믿음으로 바라보라 (14)


(히11:1) 믿음은 바라보는 것에 실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성령님이 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것은 믿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는 것은 일점일획도 틀린게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허상이라고 하면 우리가 믿음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 일년동안 돈을 모아서 사고싶은걸 사러 간 아이가 갔는데, "꽝"이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신앙은 그런게 아니다.

1) 눈을 들어 바라봄 (14)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한 말씀을 나에게 하신 말씀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 왔는데, 먼저 양보할 수 있는 미덕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길 바래요. 롯은 이런 양보도 없이 삼촌인 아브람 먼저 하라고 양보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그 큰 땅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먼저 택하기도 했지만 그 큰  땅에서 나온 것으로 아브람을 섬기겠다고 하지 않고 바로 떠난 것이다. 아브람은 큰 땅도 없고 롯도 없고 마음이 낮아졌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볼 때 탐심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본 것이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은 내가 그 땅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욕심의 눈으로 보이는 학위, 물질 등을 바라보지 마세요.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이 주실 땅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바래요. 그리고 하나님이 한 곳만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동서남북을 모두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동쪽만 바라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동서남북을 모두 바라보시길 바래요. 2016년도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해를 바라보며 되어지지 않았던 것만 보게 된다. 잘된것, 기쁜것, 소망있는 것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안잡힌 것만 생각하게 되는데,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질 때 수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눈을 들길 바래요. 바라보는대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반면 욕심의 눈으로 바라본 롯은 얼마 안가서 바로의 다섯왕으로부터 다 뺏기게 되고, 롯도 잡혀가게 된다. 아름다운 것만 추구하지 마시길 바래요. 눈에 보이는 그 학위, 물질을 보지 말길 바래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축복이 있는 것이다. 욕심으로 바라보면 안된다. 욕심으로 땅을 취하게 되면 결국은 사망이다. 눈을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본다면 땅을 빼앗길것 같고 조카 롯도 떠나간 것 같지만, 결국은 좋은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세계열방을 바라본다면 보이는 그 땅을 취하게 할 것을 믿습니다.

2) 너 있는 곳에서 (14)


롯과는 대조적으로 아브람은 산지에 거주하게 되었다. 하나님 편에서 조카 롯이 떠난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된 것이다. 아브람의 눈 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낙심하지 말길 바래요. 낙심은 교만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물질은 잃어버려도 낙심은 덜하지만,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잃을 때는 낙심하게 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길 바래요. 지난 CS데이 때 교회를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영접하고 돌아온 것을 보게 된다. 선을 행하십니까? 낙심하지 말길 바래요. 지금 아브라함의 심령이 앞에 보이는 것 없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한 것을 우리 말씀으로 바라본다면 그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것을 믿고 선포합니다. 우리 삶, 주변을 볼 때 소망이 없어보입니까? 바라보면 그 곳 가운데 빛이 임할 줄 선포합니다.

2. 바라본대로 땅을 주심 (1~17)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한다면 보이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씀의 씨가 심어지면 그것이 자라서 줄기가 나가 잎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 열방은 다 변하지만 말씀만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1) 보이는 땅을 영원히 주심 (15)


아브람에게 보이는 땅을 영원히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람은 땅의 좋은 부분은 롯에게 양보했지만, 일부를 양보함으로 전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일부를 양보 했습니까? 전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이왕이면 먼 곳, 깊은 곳, 큰 곳의 산지를 바라보세요. (막11:24) 입시, 취업, 열방, 학업 가운데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하나님은 비전을 바라보며 가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아멘 하는 순간 그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가 되니 강목사님 가운데도 14년 전에 보여주신 환상 가운데 그대로 걷고 살게 하시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평지에서 달려가면 된다.

2) 밟는 땅을 주심 (17)


바라보는대로 이왕이면 믿음으로 걷길 바래요. 지금 시간이 없다.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다. 발로 밟는 땅을 다 주신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은 목사님이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복음을 전파하면 그 씨가 자라난다. (약 2:26)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얼굴을 다르다. 그런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말씀은 아멘 했는데 나가서 다 잊어버리면 안된다. 그냥 재미있었다고 하면 아무런 능력이 없다. 가면 반드시 예수님의 복음일 선포하고 오길 바래요. (17) 약속의 당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차게 일어나길 바래요, 이제 앉아서 구걸하는 신앙이 아니고, 일어나서 돌아다니길 바래요.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며 걸어보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가나안 산지를 종과 행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수1:3) 하나님께서는 발로 밟는 땅을 여호수아에게 준다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도 말씀을 의지하면서 걸어다니길 바래요. 반드시 우리에게 그 땅을 다 주신다는 것을 선포하길 바래요.

2) 땅의 티끌 같은 자손을 주심 (16)


이 약속은 우리에게 주신 언약으로 받아들이면 반드시 주실 것이다. 셀을 해도 셀원이 늘지 않고 컴을 해도 커머가 늘지 않아서 속이 상한 리더가 있는데, 주실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언적으로 약속하신 것을 아직 행하지 않으셨는데, (창15:5) 아브라함을 보면 나중에는 결국 이루신다.  아브람은 결국 열국의 아비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다녔는데, 더 중요한 것은 (18) 약속의 말씀을 받았을 때 내가 앞서가면 안된다. 여호와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시길 바래요. 이를 통해 아브람에게 수 많은 후손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약속을 받았을 때 예배를 드려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약속을 믿음으로 듣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며 다니면서 여호와의 제단을 쌓으면 반드시 쓰임받을 줄 믿습니다.

Sunday, November 27, 2016

2016-11-27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실족케 하지 말라 (마18:5~9)

사람이 태어나서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어떤 사람은 악한 일을 한다. 예수님을 믿고 안믿고는 자유이다. 하지만 자신이 산 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죄짖게 하는 사람도 있다. 암론의 바늘과 같이 작은 일을 통해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게 하는 일이 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죄이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그 죄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착하게 살고 적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그 죄가 심판이 있는 것이다. 천국에서 받을 상도 다르고, 심판도 다른다. 자기 스스로 지은 죄도 큰 죄이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더 큰 죄이다. 특히 믿는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이 가장 악하고 큰 죄이다. 우린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길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 인생을 살면 우리의 삶이 형통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존귀하게 여긴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죄의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볼 때 우리 인생이 형통하게 할지언정,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삶을 살면 안된다. 지난주와 연결되서 작은 자에 대해서 말씀 하신다. (5) "내 이름으로"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부인하기도 하고 나를 낮추기도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게 된다.

1.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


이렇게 작고 겸손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높으신 분으로 스스로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자기를 낮추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낮추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들어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까운 나의 주님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 부하고 높아진 마음이 예수님을 물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상하고 깨어져서 깊은 상처 가운데서 만나는 예수님은 나의 위로자가 되고 나의 상처를 싸매시는 것은 예수님은 겸손한 자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강한 자, 왕 같은 자를 영접하는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신다. 자신이 무시할 수 있는 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겸손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가 신앙의 성숙도는 아니다. 내가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지가 신앙의 정도이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보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하신다.

2.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자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를 실족케 한다는 것은 그 작은 자를 죄를 지어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1) 실족케 하는 죄의 심각성 (6)


과장법 같긴 하지만 과장법이 아니고 실제이다. 연자맷돌은 나귀가 매는 큰 돌이다. 그것도 얕은 바다가 아니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게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연자맷돌은 죄의 무게이고, 깊은 바다는 깊은 지옥불을 말한다. 작은 자에게 하는 그 죄게 엄청나게 큰 죄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핏값으로 사신 영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한 영혼인데, 내가 그 영혼을 죄 짓게 하면 예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에 큰 죄이다. (마25:40) 우리의 관점을 바꿔야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중심은 큰 일, 좋은 일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좋은 일은 예수님 안 믿는 사람도 하길 원하기 때문에 믿음을 분간하기 힘들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하는 일에서 믿음을 분간하신다. 열처녀들이 기름이 남아 있을 때 오지 않으신다. 그 때 와봤자 분별이 안된다. 기다리다 지쳐서 포기할 때 그 때 오신다. 마찬가지로 우리 중심으로 큰 일을 통해 보시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눈길 주지 않고 하기 싫어하는 그 때 예수님이 그걸 보신다. 예수님 믿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일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중요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혼자 죄를 짓는 것도 심판이 심각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죄를 떠나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죄짓게 해서 넘어지게 하는 그런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신앙 잘 하는 사람을 깨어서 교회 안나오게 하고 교회 떠나게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것을 핍박하는 것, 제사 때 우상에게 절하게 하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니다. (벧후2:14) 신앙이 약한 자를 유혹하고 무시하고 판단하고 정죄해서 낙심해서 교회 안나오게 하는 것은 아무 나쁜 죄이다. 더 심각한 죄는 교회 잘 다니는데 이단에 빠지게 하는 죄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심각한 죄가 더 많다. 실족하게 하는 일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이 되서는 안된다. 술집, 오락, 도박, 폭력, 사기, 매춘 등 다 자기 돈 벌게 하기 위해서 남들이 신나게 죄 짓게 하는 것이 아주 나쁜 죄이다. 직업을 갖더라도 남에게 죄 짓게 하는 직업을 가지면 안된다.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을 꾀어서 세상 유혹하고, 어떤 사람은 성령을 거슬르게 해서 종교인으로 빠지게 하는 것들이 나쁜 죄이다. 사단의 목적은 믿는자,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하는 자이다.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에게 신앙을 더 잘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의 사람도 있다. 영적인 문제이다. 믿는 자의 믿음을 소멸케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사단의 계략이다. 그래서 믿는 자를 대할 때는 함부로 판단하고 모함하고 고소하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핍박하는 것을 위험한 것이다. 한 영혼의 생명을 죽이는 엄청난 죄이다. 오늘 말씀처럼 작은 자이다. 한때 신앙 잘 하다가 안나오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집사, 장로, 셀장 등 리더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이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 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저 모양으로 안살기 위해 교회 안다닌다."며 실족케 한다.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되면 안된다.

2) 실족케 하는 죄의 경고 (8)


손가지고 지옥에 갈바에는 손발없이 지옥 안가는게 나은 것이다. 발 때문에 지옥가는 것은 발을 찍을 정도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손도 사사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다. 그래서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 하지만 눈 때문에 정욕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눈을 뽑고 난 후에 그 전보다 블레셋 군사를 더 많이 죽였다고 했다. 자기 손으로 남을 섬기고 돕고 말씀을 읽고 선한데 쓰면 좋지만, 죄를 짓게 하는데 쓰이면 안된다. 우린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선한 영향 뿐만 아니라 나쁜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상급이 되기도 하지만 심판꺼리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손과 발, 지체가 선한 일에 쓰임받기 위해서는 남이 잘되는데 쓰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남이 잘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죄 지을 때 혼자 짓지 않는다. 이게 남들과 같이 죄 짓도록 하는 사단의 계책이다. (마25:40) 다시 읽어 보세요. 지극히 작고 연약한 자에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것이다. 우린 강하고 큰 자를 대할 때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보다 약한 자를 대할 때 죄를 많이 짓는다. 바리새인들 세리와 창기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다. 그들은 안식일 못 지키게 했고,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약한 자를 무시하는 그 사람은 예수님도 무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까이 하지 않는다. 약한자, 낮은자, 천한자, 남이 돌보지 않는 자에게 가까이 가보세요.

Sunday, November 20, 2016

2016-11-20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천국에서 큰자 (마 18:1~4)

사람은 다 남보다 잘 되길 원하고, 경쟁심리가 다 있습니다. 누가 더 지위가 있고, 나보다 더 잘하는지 비교하는 마음이 있다. 외모, 직업, 학벌, 재산 등을 비교하는 것은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보기위한 경쟁의식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괜찮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열등감은 굉장히 주관적이다. 자기 실력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을 가진 경우가 많다. 동네축구에서 열등감을 가지면 큰사람이 될 수 없다. 큰 사람, 세계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수능을 아무리 잘 봐서 명문대를 갔다고 해도 하바드생을 만나면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하바드를 가면 세계적인 학생들이 오기 때문에 열등감,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 so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경쟁을 하면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이곳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서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래요.

1. 천국에 들어갈 자


먼저 천국에 들어가야 큰자, 작은자가 되는 것이다. (1) 그때는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누가 크냐면서 다투는 그때 제자들이 이것을 질문한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크냐가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다. 누가 더 인정받고 높아지느냐의 문제로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누가 천국에 먼저 들어가는지를 다루신다. 천국의 원리를 같기 때문이다. 천국에 누가 들어가냐와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의 기준이 같은 것 같다. (3)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간단하게 한줄로 말씀해주신다.

1) 돌이켜라

돌이키라는 말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의 그 모습에서 변화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옷을 그대로 입고 가면 안되고, 천국의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한다. 세상에서의 가치관, 옛사람의 생각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돌이키라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아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만 다니면 다 천국에 갈 것 같지만, 예수님 말씀은 그것과는 다르다. 믿음 없이 다니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심지어 10년을 다녀도 변화가 되지 않는다. 옛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지와 능력, 팔, 손을 주셨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물으신다. 하라고 하신 것, 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 대한 책임을 주신 것이다. 돌이키라는 말씀을 주셨지만 할지 말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다만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오랫동안 생각이 굳어진 사람일수록 변화는 더 어려운 것이다. 묵은 포도주를 오랫동안 먹은 사람은 끊기 쉽지 않은 것이다. 자기 생각이 오랫동안 굳은 사람은 변화되기 힘들다. (눅5:37~39) 내 생각을 바꾸지 않을 생각으로 말씀을 들으면 생각이 복잡해서 분노가 나고 터져버린다. 내가 새롭게 변화되길 원한다면 예수님의 새 말씀을 받아야 하는데, 내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옛사람으로 살기 너무 편하지만, 이 삶을 바꾸려면 값지불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너무 불편하다. 신앙생활도 똑같은 것이다. 수십년동안 잘 살아왔는데 바뀌기는 쉽지 않다.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는 제자들에게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종교생활을 오래 할수록,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변화가 더디다. 과거에 교회생활 하면서 리더로도 섬겼던 사람, 세상의 많은 부자들일수록 변화가 어렵습니다. 오래 교회다닌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변화가 없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정말 돌이켜야 할 사람이다. 옛사람에 속한 자기에게 회개를 해야 한다. 회기 없이는 변화되지 않는다. 죄가 우리 묵은 포도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직분은 받을수 있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는 어렵다. (엡4:22~23)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가지고 사는데, 이런 사람들의 마지막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야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인격이 새롭게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교회는 죄인이 변화받기 위한 곳이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데 변화가 없는 것은 넌센스이다. 교회 다니는데 의미를 두는게 아니고, 천국에 가는 것에 먼저 관심을 가지기 바래요. 신앙을 점검해보시고 천국에 갈만큰 돌이킨 사람인지 점검해보시길 바래요.

2) 어린아이 같이 되라

어린아이는 작은자, 약한자이다. 천국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삶을 사는 것이다. 교만한자, 완고한자는 옛님 말씀을 판단하지,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회개하지 못한다. 사람의 지식으로는 사람의 죄를 찾아낼 수 없지만, 성령을 받으면 생각치도 못한 것들이 깨달아직 천국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한해가 한달 남짓 남았습니다.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한해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적자를 본거면 헛살아온 것이다. 열매가 있어야 그 마음밭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은 것(전도, 양육.. 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나온 열매(인격, 9가지 열매 등)를 봐야 한다. 인격의 열매가 없다면 내가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돌, 뿌리 등을 뽑아내야 하는 것이다. 내 속사람의 변화가 나타났는지가 매우 중요한다.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바뀔 때 인정받을 것이다.

2. 천국에서 큰 자


하나님은 자신을 존귀히 여긴 사람메게는 존귀히 여긴다. 천국의 확신을 가지길 바래요. 천국에 들어간다고 다 끝난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대하는 만큼 하나님도 우리를 대한다. 이 세상의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천국에는 폭이 더 크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도 교회 다니고 상급 쌓는 것은 천국에서의 지위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여기에서의 삶이 끝난다. 셀예배, 부르짖는 기도 등은 천국에서는 없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매우 중요하다. 영원한 삶을 결정짓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4) 이 말을 사람들은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한다. 이 세상의 묵은 포로주를 오랫동안 먹은 사람은 이와 반대의 지식으로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원리로는 내가 큰자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so 세상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기 주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간다면 가장 밑바닥으로 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은 말을 하기 너무 어려운 사람이다. 우리 믿음의 주는 예수님이다. 오실 때부터 예수님은 가장 낮게 사신 것이다. 가장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로 옮기신 것이다. (빌2:8~11) 어느정도로 낮아져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가장 낮은 자이다. 자기 의,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은 천국에서 낮은 사람이다. 계산을 하시길 바래요. (막10:43~44) 천국에서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잠깐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지위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약4:6) 누구에게 은혜 안주는지 알아야 한다. 천국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사아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을 수 있다. 천국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다툼은 거룩한 다툼이다.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구분된 삶을 산느 것이다. 옆 사람, 주변 사람과 비교하며 신앙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내 상급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결정되지, 주관적인 관점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마5:11~12) 천국을 상대로 사는 사람은 욕이나 박해를 받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이 상이 더 크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상대로 사는 사람의 특권인 것이다.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마25:12)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낮추시는 분이다. 그러면 초라한 삶이 되는 것이다. 내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연습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해가 가기 전에 새로운 삶을 살길 원한다면 삶의 방신, 패러다임을 한번만이라도 바꿔보길 바래요. 자기 의지로 결단해보시길 바래요. 하나님께 메이는 사람은 사람에게 자유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집중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Sunday, November 13, 2016

2016-11-13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 (딤후1:7)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집은 이게 걱정이고, 저 집은 저게 걱정이다. 우리가 특별히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할 때 두려움이 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할때, 새로운 일을 해야 할 때, 새로운 장소에 있을 때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새로운 곳에 갈 수가 없다. 새롭게 되려면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사람, 알지도 못하는 그곳으로 믿음의 길로 떠나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기억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아니지만,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겼기 때문에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려면 세상을 이길 능력이 필요하다. 이세상에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면 얼마나 두려울지 잘 알고 있다. (이사야51:12) 생명과 능력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변함 없고, 가치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치있는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사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가를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나누길 원한다.

1. 두려움을 대적하라 (7a)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지 못했던 놀라운 인생을 계획하고 계신다. 우리의 삶에 영적인 변화가 있을 때, 우리가 도약하려고 할 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여러가지 거짓말로 위협한다. 우리가 세상의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손해볼 것이라고 위협한다. 믿음으로 살길 결단 하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생의 즐거움도 없을 것이라고 사단은 두려움을 준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제일 마지막에 쓴 편지이다. 그래서 유언과 같은 말씀이다. 이 시대 교회는 로마의 네로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을 때이다. 사도바울은 평생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 지금까지 바울과 함께 했던 동역자들이 디모데를 떠났다. 바울이 능력을 행할 때는 곁에 있던 동역자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히니 모두 떠났다. (빌4:4) 하지만 오히려 세상을 향해 기뻐하라고 말씀 하신다. 말씀처럼 주 안에서 기뻐하길 바래요. 평생 주님을 위해 살아온 바울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바울의 형편을 알고 계신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 있을 때는 문제가 안됐는데, 믿음이 없어지니 그것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두려움은 단순한 생각에 그치지 않는다. 두려움은 이 세상에 속한 어둠의 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을 통해 작은 소수민족이 에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사사기7:3) 세상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적인 싸움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의 세력에 갇히게 되면 좋은 재능과 은사 부르심과 능력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두려움에 의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소멸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것이 영적으로 패배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세력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슬픔, 좌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몸을 공격하기도 한다. 너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이 있는데, 두려움을 주는 세력을 먼저 이겨야 한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의 생각과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능력 때문에 거룩한 목표, 사명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바울 한사람을 가뒀더니 수많은 사람이 떠나고 바울이 세운 교회가 흔들린다. 우리가 할일은 두려움의 세력을 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영적전투를 하신 것이고, 승리했기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영적으로 싸우시길 바래요.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시길 바래요.

2.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라


1) 믿음의 능력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명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신다. 이 세상에 어둠을 이기는 부활의 권세가 있다. 예수님을 살리신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그것을 믿고 구하고 선포해야 한다. 사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미리 걱정하게 한다. 그러가 믿음의 능력이 그것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능력이 있듯이 믿음도 추상적인 것이 아닌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히11:1)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해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살길 원한다. 믿음은 도전적이고 모험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미련해보이고 흉내낼 수 없는 도전적인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으로 들어오면 우리 안에 과격한 변화와 결단이 일어난다. 이런게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를 결단하지 못하게 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게 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온 백성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가나안을 정복할만한 믿음의 크기와 능력이 있으니 가나안을 정복한 것이다. 믿음의 능력만큼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을 이길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일5:4) 우리 가운데 어떤 환경이 있든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길 바래요. (요6:66~68) 우리 안에 세상을 이길 말씀이 있을 때 다른 교회, 다른 사람이 어떤 삶을 살든지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칭찬받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좋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 나의 결단, 나의 의지만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세상을 이길 부활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구하고 의지하는 만큼 하나님을 주시는 것이다. (고후4;7) 능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세력을 깨뜨리는만큼 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2) 사랑의 능력


(요일4:18)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이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수록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가장 강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 도저히 용사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한 조건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이다. 아가페사랑은 세상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가페사랑은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요일2:!5)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니까 세상의 사랑을 뺏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채워진다. (마24:12) 세상이 이렇게 점점 악해지는데 사람을 어떻게 믿고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 나도 그 사람이 점점 미워지고 서로 원수가 되고 관계가 깨어진다. 다른 사람, 가족, 친구를 받아주고 용서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삼하9:3,7)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은 가진 사람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롬12:21)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허다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부부, 자녀와 원수가 되고 세계가 싸우고 교회가 나눠지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는 것이다.

3) 절제의 능력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절제는 내 자신을 다스려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단지 절제하는 것, 금욕적인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육신을 다스려서 하나님의 뜻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누리고 즐길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다 사용하지 않고 절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련한게 아니고 지혜로운 것이다. 누릴 권리가 있지만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한 지혜로운 삶은 사는 것이다. 절제는 약해보이지만 절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소원이 있다. 내 안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거룩한 능력이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안주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더이상 절제하지 않는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즐기길 원하니까 절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날마다 믿음의 경주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있다. 세상은 거룩의 능력, 절제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말 우리를 힘들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잠16:32) 세상에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보다 마음을 절제할 수 있는 자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비전을 위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을 다스릴 능력을 가지길 바래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을 이길 능력과 사랑, 절제의 능력을 받았다. 이 세상을 이길 믿음과 능력을 이미 받았다. 내게 주신 믿음, 사랑, 절제의 능력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사람이 되길 바래요.

Monday, November 7, 2016

2016-11-06 (주일예배, 강국정목사님)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라! (요한복음 1:12 마가복음 16:17,18)

어렵게 오신 발걸음,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고 돌아가길 바래요. 지금은 너무 혼란한 때이다. 이때 성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한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각 신문, 방송매체마다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게 잘된건지 확인할 ㅅ 없다. 계속해서 뒤에서 조정하는 세력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를 보는게 아니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가정에도 어둠의 공격이 있다. 부부는 사랑하지만, 네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직장 안에서 전투가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분을 초청하고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부자? 법조인? 무기지휘자들이 어둠의 세력을 해결할 수 없다. 어둠을 단번에 물리친 빛되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초대해야 할 것이다. (요1:9) 예수님은 참빛이 되십니다. 참빛이 들어올 때 우리 안에 어둠의 세력이 떠나갈 것이다. 우리가 어둠가운데 있으면 우리가 위험가운데 있는지 모른다. 참빛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모든 어둠을 물리치길 바래요.
둘째로 거짓은 우리를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요14:6) 예수님은 참 진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세상의 거짓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된 권세를 얻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길 바래요.

1.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


죄로 말미암아 어둠에 있는데, 그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결해 놓았다. 공짜 중에 공짜인 예수님의 영생을 얻으시길 바래요. 그래서 값없이 받은 선물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그날 아침에 쓰러져서 소천했으면 너무 가슴이 메이고 안타깝다. 마음가운데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의 가족이라면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금, 학위가 중요하겠습니까? 영생을 얻게 되면 사망, 권세가 두렵지 않다. 교회에 처음 나왔다면 영생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건 왠지 못가진 자, 불쌍한 자만 받는 것 같아요. 이왕이면 세상의 지위, 돈 많이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표현하길 바래요. 오늘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마음문을 열길 바래요. (계 3:200 천국, 지옥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고백하길 바래요. 마음문을 열면 예수님이 넘어오신다. (요3:16)  영생을 주기 위해서 구한 자녀를 보내신 것이다. 공기, 햇빛은 돈이 안들고, 값없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환이 없다. (행4:12)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


1) 귀신을 쫒아내며


모르는 사람에게 귀신을 전하면 안좋을 것 같습니다. 귀신은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전해야 할 때는 전해야 하는 것이다. 보이는 귀신은 그나만 괜찮은데, 본문의 귀신은 무덤에 산다. 이것은 귀신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귀신이 하는 짓이다. &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서 "나오라"고 한마디 하니 귀신이 다 나온 것이다. (막9:25~27) 모두들 못듣는 귀신이 하는 것이다. 귀신 쫒아내는 권세를 모두들 얻으시길 바래요. (마12:28)

2) 새 방언을 말함


믿는 자에게 이렇나 새 방언을 받는데, (행2:4)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방먼이다.말씀대로 이뤄지는 교회가 성령의 교회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기도를 할 때도 방언이 중요하다.

3) 뱀을 집어올림


하나님 자녀에게 주시는 권세이다.

4) 무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조롱, 핍박 받으십니까?

5) 손을 얹은 즉 낫게 됨


세상의 방법으로도 낮지 않는 영적인 정자가 있다. (약5:15~16) 기도 받았는데 병이 안난다고 하면 안된다. 그 사람의 믿음이 기도 받을 때의 믿음이 그런 믿음인 것이다.

Sunday, October 30, 2016

2016-10-23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성전세를 내시는 예수님 (마17:22~27)

성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첫 단계의 인간의 성숙도는 어린아이의 단계를 생각하면 된다. 어린아이는 아직 어려서 생각도 어리고 육체도 어리다. 그래서 자기 엄마가 힘들고 지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떼를 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단계이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단계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생각을 못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워지고 왕따 당하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왜 그러는지 모르고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이다. 물질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 모든 것이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다. 우린 이런 존재가 되면 안된다.
두번째 단계는 가족 정도는 생각하는 단계이다. 가족을 위해서는 희생하고 봉사하고 그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한다. 모든 시간과 물질을 가족을 위해 사용하지만, 그 외의 사람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어주거나 물질을 사용하고 하지 않는다. 혈육 외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소극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가족에 머무르는 좁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세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단계이다. 친구, 직장동료 등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 도와주고 희생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다.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도 좋고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있다. 사람이 영향력을 주고 리더십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겨우 자기만을 위한 삶은 결국 있으나 마나 한 인생일 수 있다.
네번째 단계는 자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애국자, 충성된 사람을 사는 사람이다. 개인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큰 사람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큰 사람이다.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다. 이는 사람의 차원이 아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는 예수님의 인격이다. 보통의 사람은 하기 힘든 단계이다. 이런 인격은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다. 가족, 직장, 자신이 먼저가 하나님은 나중에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쓸 것을 쓰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물질이 자기를 위해서는 그리 기쁘지 않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신앙의 과정은 마지막이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가는 성화의 과정이다. 자기, 가족 문제 해결하기 위해 교회 나오고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한 기도를 하는 신앙의 성장이 있어야 한다. 오늘은 예수님의 삶의 인격이 어떤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 말씀을 반복하시는 예수님


계속 자신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 성격책 보는데 십자가 얘기하고, 주일예배에서 십자가 말씀이 선포되고, 극동방송에서 십자가 말씀이 나오고, 아이가 십자가를 얘기한다.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이 들리면 무시하면 안된다. 제자들도 이런 말씀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심히 근심했다고 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죽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자신이 따르는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이해하는데 약한다. 아직 자기의 생각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서 근심하는 것이다.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근심, 부담, 걱정꺼리가 되면 안된다. 그러면 두려워하는 그것이 이뤄진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제자는 없었다. 두려움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부담있는 말씀이라도 믿음과 기쁨으로 들으시길 바래요.

2. 성전세를 내시는 이유

사건이 있는게 좋다.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성전세는 성경에 나오는 세금으로 예수님이 안낸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 말을 듣고 온걸 알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물으셨다. 아들에게 받을지 타인에게 세금을 받을지 물으셨다. 하지만 그들이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낸다고 하시면서 밖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면 입을 벌리면 한세겔이 있는데, 그것을 반세겔은 예수님, 반세겔은 베드로의 것으로 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안내도 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실족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낸다고 하신 것이다. 돈 반세겔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내는 세금을 안내기 때문에 사역예수님의을 공격하고 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을 공격하기 위해 비 본질적인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결 하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초신자들이나 믿음없는 사람이나 종교인, 세상적인 사람에게 공격꺼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만 가지고 신앙한다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실족꺼리가 되고 공격하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작은 것 때문에 사단의 공격꺼리가 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는 것이다. (롬15:1) 믿음이 약한 자는 작은 문제에도 넘어진다. 어린 아이는 길을 가다가 작은 돌 뿌리면 있어도 잘 넘어진다. 그런데 자기가 약해서 넘어졌다고 얘기하지 않고 돌 뿌리 때문에 넘어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안넘어질 사람은 안넘어지고, 넘어질 사람만 넘어진다. 약한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포용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약자의 변명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정도의 둘뿌리로는 안넘어진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당하셨기 때문에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포기할 줄 알아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하나님을 위해서는 접을 수 있어야 한다. 꼭 내가 옳은대로 행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 없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사도바울도 과거에는 꼬장꼬장한 사람이었다. (롬14:20~21) 내 자존심, 내 정당성 별거아닌 그거가지고 많은 사람을 넘어뜨리고 실족하게 할 필요가 있냐? 고기 먹는 사람이 고기 먹는건 아무 문제가 없지만 고기 못먹는 사람과 같이 먹을 때는 고기를 먹음으로써 고기 못먹는 사람에게 꺼리낌을 주고 실족케 하는게 좋은 것인가? 항상 믿음이 약한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을 판단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 덕을 세우는 것이 영혼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고기를 먹을 때는 산 아래 9명이 있을 때 먹지 말고, 세사람이 모여서 산 위에 올라가서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항상 궁색한 삶을 사는 것이다. 내 믿음을 주장하지 말고, 한 영혼을 위해 믿음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선한 도구로 쓰임받게 되는 것이다. 자기 권리를 포기할수록 자신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을 알길 바래요.

Sunday, October 23, 2016

2016-10-23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믿음이 없는 세대 (마17:14~21)

믿음은 추상적, 막연한 것 같아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믿음만큼 실제적인 것도 없다. 반면 아무리 믿음이 있어보여도 믿음없는 사람은 믿음이 필요한 사건을 만날 때 믿음없는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믿음없는 삶을 살기에 항상 공허하다. 믿음없는 실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회일을 한다고 자신이 믿음이 있는줄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들어 사람을 상대로 말 잘하는 사람에게 식사기도 또는 대표기도를 하라고 하면 두려워서 잘 못한다. 말을 못해서 기도를 못하는게 아니다. & 사람과 만나길 좋아하고 영업 잘하는 사람에게 전도 하라고 하면 전도 못한다. & 강의 잘 하는 사람에게 5분 설교 하라고 하면 두려워서 못한다. 종교적인 최고의 지식을 가진 니고데모도 예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과 자기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어느 때 결정적인 문제가 생기는지 알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윗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믿음으로 자기 문제를 돌파하는 실제적인 신앙 하길 바래요.

1. 예수님께 나오게 된 동기


세명의 제자가 산 위에서 승리의 모습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능력 없는 상황을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다. 예배 나올 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예수님을 만날 만한 자세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 예수님을 만날 사람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병자, 세리, 귀신들린자 등 만날 사람이 만나지, 모든 사람이 만나는건 아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있는 자보다 문제를 예수님계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만난다. 예수님을 만날 형편이 되고 문제가 있는게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됐던 것이다. 예수님을 만날 자를 만나주시고, 치유할 자를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매일 만나러 오지만 변화가 없는 자가 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 하는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는지를 내 삶이 되어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나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이 꼭 행복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는 오히려 불쌍한 사람인 것이다. 세상 기준을 보면 지위가 있고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박탈당한 불쌍한 사람이다. 내 인생이 본문의 아버지와 같은 인생이 불쌍한 인생처럼 보여도 주님께 나갈 기회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다. 이런 삶을 살길 바래요. 나에겐 부족한 것이 없어서 예수님께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은 돈을 주고라도 안약을 사서 걷어내야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불 안에 들어가고, 물로 들어 가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면 복받을거라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겠냐? 이건 내가 하는게 아니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강한 세력에 굴복당하고 있는 것이다. (막9:17, 18) 내 아들은 귀신들러서 이렇게 된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귀신이 하는걸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혈기를 내고 늘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삐딱하게 하고 자기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하고 나중에 후회한다. 정상적이라면 하면 안되는건 안하고 해야하는거면 하는게 정상적인 것이다. 자기 힘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지 육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물에 빠져서 죽을뻔하면 다음에는 물에 들어가면 안되는데 또 들어가는 것은 정상적인게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 권세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예수님께 나와서 해결 받길 바래요. 내가 노력해도 안되는 문제를 예수님께 해결받길 바래요.

2. 치유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17)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회당과 제사장이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아이를 치유할 수 없다. 이런 믿음 없는 세대,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신다. 이 세대만 그런게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신다. 패역하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뜻이다. 종교는 있는데 믿음을 가르치지 못하고 믿음없는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많은 것을 했는데 믿음을 보이지 못했다. & 이런 종교생활을 아무 의식 없이 지나간다. 내 문제는 내 문제고, 예배는 예배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문제시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삶에는 아무 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성경의 변화, 능력, 이적을 다 알고 있으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아무 문제시하지 않는다. 남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을 가르치지만 정작 자기 문제는 하나도 해결받지 못한다. & 남의 티끌은 성경말씀에 연결해서 얘기 잘 하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성경에 연결이 되지 않는다. 서기관과 변론했다고 하는데 능력 행하지 못하는 두 부류가 뭘 변론할게 있냐. 너희에게 다 보여줬는데 왜 능력이 없냐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영으로 듣지 못하고 혼으로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할 수 있지만, 제자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큰 믿음이 있어야 쫒아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없으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믿음이 있으면 어떤 것도 문제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돌파하길 바래요. 자기 문제 때문에 낙심하고 신앙 떠나는 기회가 된다면 그건 믿음없는 세대인 것이다. 사건을 통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 되길 바래요.

2) 예수님의 치유사역

꾸짖었더니 그 즉시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치유됐다. 단지 귀신을 쫒아냈더니 모든 증세가 떠나간 것이다. 귀신 때문에 생긴 병은 귀신을 쫒아내면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귀신이 우리 영혼육을 망가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 의학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병일 것이다. 귀신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이런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 창피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한적한 곳에서 물어봤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했다. 하지만 안됐다. 똑같은 방법으로 했는데 안되서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작아서라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데 그 능력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믿음이 커야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문제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은 믿음과 연관된 문제이다. 베드로가 물 위에 걸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광풍을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믿음이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바라보면 믿음이 사라지고 세상의 것이 들어온다. 어떤 사건을 만나서 합심기도를 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믿음이 떨어진다. 믿음은 항상 유지되는게 아니고 있다고 없다가 한다. 그래서 항상 믿음을 가져야 한다. 기도하고 전도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과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내가 말씀을 은혜롭게 전할 수 있는데 믿음으로 전했냐의 차이이다. 믿음은 능력이 있는 것이다. (행19:13~16) 귀신을 쫒아내는 것은 행위로 하는게 아니다. (20) 믿음으로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을 믿어야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를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면 있던 믿음도 없어진다. 믿음을 지키는게 말씀을 들음으로써 지키는 것이다. (21) 예전 성경이나 KJV에서는 "이런 류는 기도와 금식에서가 아니면 나가지 아니 하느니라"는 것이이 있다. 육체의 소욕과 세상의 세력을 막아야 믿음이 생기는데, 그것이 기도와 금식이다. 그런 것을 끊어야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말씀이 들려야 믿음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진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냐? (막 9:29) 기도 외에는 안된다. 고질적인 문제, 시간만 끌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이시간 이후로 끊어질 줄 믿습니다. 육신의 세력을 영으로 이기는데, 그게 기도와 금식이다. 한해가 가기 전에 고질적인 문제를 끊고 넘어가길 바래요. 그럼 문제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Saturday, October 22, 2016

2016-10-16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깨닫지 못하는 세대 (마17:9~13)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많다. 신학교에서는 하나님의 신학교리를 가르치는 곳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론을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 신앙을 잘해야겠지만, 그런것만은 아니다. 강의실 안에서는 좋은 말씀이고 좋은 이론이지만, 실제 삶과는 별개인 것이다. 삶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한 사람이 삶에서 좋은 삶을 사는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이론이 아무리 좋아도 실제 우리 삶에 좋은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신앙이 좋은 신앙은 아니다. 자기가 아는 말씀에 실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신앙지식은 많이 늘어날 있지만, 그것이 신앙인격을 변화시키고 믿음을 좋게하는 것과는 별개일 있는 것이다. 많이 아는 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살지 않으면서 아는 지식으로 하는 신앙은 살면 살수록 힘들어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신앙이라 하면 처음에는 미약하게 시작할 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시작은 눈물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신앙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신앙은 마지막이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 주님 앞에 설때 그때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 살때 겸손해서 말씀을 살아가는 신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을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실제로 살아가는 실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길 바래요. 제자의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 살아나기 전까지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9) 영적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하는 말은 증거가 되지만, 일어나기 전에 말하면 예언이 되는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을 오해하고 대적하고 공격하기 때문에 피차가 서로 도움이 되는게 아니다. 좋은것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받을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면 오히려 주는 사람을 해치고 대적하기 때문이다. (4:29) 영적인 사람이 육적인 사람을 핍박하는 일은 없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하는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보는 관점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좋게 여기는 사람과만 나눠야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영적인 풍요를 원하면 어떤 영적인 것을 나눠도 받을 있는 영성이 되야 하는 것이다.

2. 자기 시대를 알지 못하는 세대

서기관은 성경지식은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지식이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셀예배마다 참석하고 QT 하고 성경 읽고 해도 실제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말씀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상당히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그냥 말씀일 뿐이지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11~13) 예수님이 서기관의 말처럼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하신 것이다

1) 엘리야에 대한 말씀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이 엘리야를 배척한 것이다. 서기관들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가 왔는데 모르고 배척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이뤄지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인 삶을 사는 것이다. 엘리야가 회개의 세례를 요단강에서 요단강까지 대부분의 백성들과 제사장, 바리새인들도 나왔다. 하지만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세례를 거부한 것이다. 성경은 스스로 자기들의 은혜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눈으로 보고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고도 배척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맹인이라고 했다. 영적인 맹인이다. 제자들도 말씀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요한이 성경이 약속한 엘리야라는 것을 몰랐다. (13) 제자들도 이때서야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케 해야하는지를 알게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몰랐을까요? 세례요한은 자기 스스로 자신이 엘리야라고 말하고 오지 않아서이다. 그렇게 왔으면 안믿었을 것이다. 세례요한이 스스로 엘리야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말씀으 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성경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지식을 삶에 적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문자적인 지식을 알기위해 주신게 아니다. 신학자들에게 연구하라고 성경을 주신게 아니다.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시대와 자신에게 어떤일을 하시는지 적용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번주에 주신 말씀이 실제 시대의 현상과 자신의 삶에 어케 적용하는지 알고 사는게 신앙이다. 말씀을 교회, , 직장, 가장, 시대에서 적용하는 사람이 신앙을 하는 것이다. 예배와 삶이 다르다면 그런걸 하나요? 성경은 삶과 다른데 성경을 연구하나요? 시대와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신앙 하길 바래요.

2) 메시아에 대한 말씀 (12)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말씀만 아는게 아니고 메시아는 어떤 모양으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성경을 통해 알고 있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왕을 만나기 위해 왔는데 별이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봤는데 서기관들이 오히려 알고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다. 말을 듣고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갔는데 서기관들은 가지 않았다. 이들은 많은 말씀은 알고 있는데 실제 삶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지식만 아는 것이지 삶에 변화, 인격의 변화는 없는 것이다. 오직 성경지식을 아는 재미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다. 배우는 자체에 열심을 보이는데, 삶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자기영광이고 자기만족인 것이다. (23:3~4)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이 정확하게 그들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하는 사람이 종교인이다. 남에게 말은 잘하는데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자기는 철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말로만 남을 지적하고 시키려고만 하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지식에만 관심이 있고, 메시아가 태어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동방박사에게 놀라운 지식을 알려준 것에 많은 자부심과 만족만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뜻을 알고 시대에 행할 일들을 알아서 하나님이 주신 예언적인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고 주시는 것이 말씀인 것이다. 배우려고 하는데는 열심이지만 배운데로 살고 있는지 물어보신다. 알지못하고 행한 자는 적게 맞지만, 알고도 행한자는 많이 맞는다.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어케 감당하실래요? 지식을 즐기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지식을 가지려고 하나요?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사니까 영혼이 곤고하게 되는 것이다. 선포되는 말씀을 따라서 자기 시대에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매주 선포되는 말씀이 시대와 교회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감을 써도 자기문제만 주절주절 쓰지 안에 말씀이 없는 소감을 쓴다. 소감에는 자신의 삶과 말씀,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데, 넋두리를 쓰면 안된다. 하나님은 계속 일하시는 분이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말씀을 들을때도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듣고 자기 시대를 읽을 있는 사람이 시대를 돌파할 있고, 자기 문제를 읽을 있는 사람이 자기 문제를 돌파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씀을 거스르는 일에 자기가 들어간다. 군중들도 십자가에 못박으로고 외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조류에 함몰하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시키면 목박으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시대를 읽을 있는 유일한 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끝까지 믿음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영으로 들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있는 자를 통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말씀을 한주간 적용하는 삶을 살길 바래요.




Sunday, October 9, 2016

2016-10-09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변형되신 예수님 (마17:1~8)

어린아이는 태어나서 단계가 있고, 그 단계만큼 할 수 있다. 그 단계를 넘어서 하면 넘어지가 된다. 신앙도 비슷하다. 신앙의 단계를 넘어서면 넘어지게 된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단계에 맞는 말씀은 은혜가 되지만 자기 영성이 따라가지 않으면 오히려 시험꺼리가 되는 것이다. 감당할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은혜가 되는 것이지, 믿음이 따라가지 못하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 각자에게 좋게 되는 것을 좋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좋게 안되는 사람이 있다. 각 사람에게 유익한 한도에서 주시고 기다리게 하신다. so 예수님도 성경에서 있는자는 더 받아서 풍성하게 되지만 없는자는 있는것도 빼앗기게 된다. 주님은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예비하신다. 그래서 더 좋은것을 받기위한 준비가 되면 주님은 주실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되길 바래요.

1.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산에 데리고 가셨다. 올라가고자 하는 목적이 기도하려는 것이었다. 기도하러 가시는데 아홉 제자는 데리고 가지 않으셨다. 모든 제자가 같은 훈련을 받았지만, 아홉 제자는 산 아래에서 기다리라 하셨다.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으로 하신 것이다. 같은 훈련을 받았지만 12제자 모두 믿음이 달랐다. 평시에는 같이 사역하고 했지만, 결정적일 때는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 이번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집 등 한두번이 아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러 가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 편에서는 사람차별이 아니고 영적인 차별이다. 하지만 이 상황 가운데서도 아홉제자들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은 왜 자신은 산에 올라가지 못하는지 자신의 믿음 상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실족하고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적인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 예수님 편에서는 걸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계속 걸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남아있을 수 있다. so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일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무조건 좋은 것을 가지고 하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산 밑에 있게 하는 것이다. 믿음의 상태를 알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수련회 가서도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고 산 아래 있는 사람이 있다. 세 제자는 믿음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데리고 가셨고, 아홉제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래 두신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래서 믿음을 키워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 하시길 바래요.

2. 예수님의 영적 변화


예수님이 산 위에서 기도하는 중에 변화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세 제자는 깊이 졸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산 위에 따라갈 수 있었지만, 기도는 따라가지 못했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기에 기도를 하면 힘이 나고 시간가는지 모르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가 힘이 나는 시간 이었지만, 제자들은 힘든 시간 중에 하나였다. 그나마 세 제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변화되는 그 순간에는 깨어서 볼 수 있었다. 모세와 엘리아는 몇백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 것이다. (눅9:31, 32)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4) 베드로가 너무 황홀경에 빠져서 엉뚱한 얘기를 하신 것이다. (막9:6) 무슨 말씀을 할지 모르면 가만히 있는게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기 때문에 몹시 두려웠던 것이다. 말씀을 들으면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듣지 못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세 제자는 그나마 감당할 믿음이 되어서 데리고 갔지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아시고 영광의 단계에 초대하시는 것이다. 산 아래서 초라하게 있지 말고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 하세요. 산 위로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3.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구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5)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인생이 바뀐다.

1)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증거하는 말이 가장 확실한 말이다. 이슬람에서 예수님을 못믿는 것 중에 영이신 하나님에게 아들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믿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바리새인이 잘못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미워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한주간 예수를 사랑했는지 한번 바라보세요. 자기 취미, 즐기는 것을 사랑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형통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인생이 형통하지 않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예수님도 아버지를 기뻐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요8:2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것이 어떤 뜻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사역, 행동들을 하나님인 기뻐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행동, 말씀을 기뻐하셨다고 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라는 말이 제일 싫다. 신앙이 어려운 이유와 부담이 되는 이유는 여기 있다. 신앙을 하면서도 얼굴이 펴지지 않고 불만이 많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한가지만 해보세요. 그러면 그 문제는 금방 없어집니다. 내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데 어케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 속한 말을 예수님께 듣는다. (요8:46, 47) 예수님이 진리를 말하는데 왜 책망하냐? 하나님께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가 없어서 못듣는게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는데 어케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나요? 마귀에게 속하니 하나님 말씀이 기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론, 세상 말, 세상 가치관을 들을 때 판단하고 듣지 않고, 오히려 솔깃하게 듣는다. 자기가 속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영으로 들려야 그때부터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을 수 있다. 교회를 다닌다고 생명을 얻는게 아니다. so 예수님은 변화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세 사람만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산 아래 있는 제자들은 바리새인이 데리고 온 병자를 고치지 못해서 무기력한 신앙을 하고 있었다. 산에 올라가는 신앙을 하길 바래요.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니 심히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엎드렸다. 세 제자들은 엄청난 경험을 한 것이다. 베드로서에서 베드로는 이 광경을 간증한다.

오늘 말씀은 더 높은 영적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준비해야 한다. 예수님은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산위에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한 신앙을 하길 바래요. 산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한주간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통해 산 위로 올라가는 신앙하길 바래요. 이게 내 삶에 힘을 주는 것이다.

Sunday, October 2, 2016

2016-10-02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예수님의 제자도 (마16:24~28)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주님께 나가는게 중요하다. 이게 성숙한거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이면에는 남에게 비난받고 부끄럼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다른말로는 남이 실수하면 정죄하고 부끄럽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so 바리새인처럼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이 인생의 기초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실패를 한번 한 사람은 그 실패로 인해 넘어질 수 있지만, 많은 실패를 한 사람은 한번 더 실패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베드로가 왜 실패할수밖에 없었는지 알려주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을 따르는 기준으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실패를 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일인데, 이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세상을 따르는 원리와 영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필요한 원리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인간적인 가치관으로 신앙을 시작하면 항상 반론하고 부딪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을 따를때는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을 따를때는 영적인 원리로 따라야 한다. 교회에서 내 신앙을 할때마다 시험에 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이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알고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는데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기본적인 영적 원리를 알아서 초보적인 문제로 걸림이 없길 바래요.

1. 제자도의 원리 (24)


 예수님의 제자도를 따르는 가장 기본 말씀이 (24절) 말씀이다. 이대로 하지 않으면 교회는 주일날 나올 수 있어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누구든지라고 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교회다니는 사람은 삯꾼이요 도적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 자기를 부인함


앞절에 베드로 사건을 기억하고 들으면 더 잘 이해갈 것이다. 신앙이 안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을 해도 자기 생각대로 하기싫으면 안하고 하기 좋은것만 찾는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좀 해보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안한다. 이건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안생기는 것이다. 베드로가 앞절에서 예수님께 한 말은 자기의 뜻이 너무 강했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길 원한다면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더러운 구유의 마굿간에서 오신 것은 자기부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에서도 동역자에 있다가 셀동역자로 내려가도 자존심 상하고 교회를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오시고, 바리새인들에게 심한 모욕을 듣는걸 자기부인을 기꺼이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말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넘어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신 것이다. 이게 신앙의 원리인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육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중에 형편이 되면 한다는 것은 자기가 속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것은 기도의 소원을 주실 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육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걸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게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니 억울한 일, 권리를 포기할 일 등이 얼마나 많나요? 이런것을 연습하는 것이 신앙인데, 자기 의가 많은 사람은 뭐 하나 할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자기 조그마한거 하나 부인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자기부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늘 남을 넘어뜨리는 일 밖에 할수있는게 없다. 자기 고집을 세우면 상대방은 아플수 밖에 없지만, 상대방은 섬기는 것이다. 신앙을 오래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는 예배는 드리기는 드리는데 자기를 부인하면서 까지는 예배를 못드린다. 예수님께는 아무 유익이 안된다. 신앙에는 원리 원칙이 있는데, 그것만 받으신다. 문 밖이나 문 위로 들어오는 자는 강도인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신앙 하길 바래요.

2) 자기 십자가를 짐


자기 부인을 하고 난 후에 이후 부인한 자기를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인하지 않은 자기가 살아난다. 자기 부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 같아도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서 신앙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죄이다. 그래서 자기 죄를 십자가에 죽이지 못하면 맨날 방해 받는 것이다. 내 속에 죄가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죄를 못박아야 방해받지 않고 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전에 종교인이었다.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는 것은 두 늑대가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늑대와 죄의 늑대가 항상 싸운다고 한다. 이런 갈등이 자신을 곤고하게 만든다고 한다. 세상을 따르려면 세상을 따르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신을 죽인다고 했다. (고전15:31)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사는 것을 자랑하는데, 바울은 날마다 자기가 죽는 것을 자랑한다. 신앙이 뭔지 아는 사람만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뭐냐? 기도모임 참석하고 성격 읽고 찬양하는거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은 종교행위일 뿐이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베드로가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신앙의 문제가 뭔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머리만 굴리는 신앙으로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다. (빌3:7~8) 바울은 그 전 자기 생각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교리 등)이 다메섹동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리스도인을 이해서는 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유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주님께 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적 리더들 입장에서는 다 보인다. so 과거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해로 여긴다. 이걸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이 귀하게 보입니까? 그러면 아직 먼 것이다. 모든걸 배설물로 생각한다면 십자가 지는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것이 죽어야 신앙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답을 알려 드리니 다음부터는 틀린 답을 말하지 마세요.

2. 이유


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냐?
첫번째는 (25절)의 영어에서는 because로 시작한다. 자기 목숨에 관계되는 것은 부인하기 너무 어렵다. 먹고사는 문제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차원을 뛰어넘는다. 자기 목숨이 너무 아까워서 육신의 생명을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가치있게 생각하지 못하면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자기 형편에 따라 예수님을 사랑하라는게 아니고, 자기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선택인 것이다. 육신이라는 거에는 상황, 생각, 상태 등 모든게 다 들어가 있다. 셀이나 주변에 영적인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자존심, 십자가를 지지 못한다. 이는 영적 생명이 없는 것이다. 자기를 죽일 때만 주시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다. 변화가 없는 사람의 특징(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열매가 없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가끔 4천년 전의 볍씨가 발견된다. 자기가 죽지 않으면 4천년 동안 열매가 없는 것이다. 이 4천년된 볍씨를 땅에 심으니 싹이 난다고 한다. 4천년된 볍씨도 죽으니 싹이 나고 열매가 난다. 자기 죄에 죽어지지 않으니 죄가 자신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때 자기부인하지 않고 따를 일이 없는 것이다. Pre-come에서 전도할 때 사람이 없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부인을 하지 않고는 전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기도모임 하나 나오는게 힘든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기도하기 너무 어렵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데서 모든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종교생활 하니까 힘든 것이다. 그래서 육신대로 편하고 쉽게 하면 육신은 좋겠지만 그 몇배의 영적 곤고함이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누가 신앙의 생기가 있고 활력이 있나요? 많은 고난과 피박, 경제적 어려움이 있지만 그걸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게 신앙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한번 영적으로 망하고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영적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육적인 생명이 죽어야 영적 차원의 생명이 열리는 것이다. 정말 은혜로운 간증은 천국 갔다온 간증이 아니라 죽었다 깨어난 간증이다.
두번째는 (26절)이 우리가 죽어야 할 결정적인 이유인 것이다. 세상의 쾌락, 물질 등 세상의 문제 때문에 신앙을 잘 하지 못한다. 장례식 가면 "저 양반 평생 가족을 위해 과로하다가 일찍 가네. 저 불쌍한 양반"이라고 한다. 목숨보다 귀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 없이 세상적인 성공은 성공이 아니고 치명적인 실수이고 최악의 선택인 것이다. 평생 헛수고를 한 것이고, 결국 그거 얻으려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영적으로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3. 결과


마지막 때 (27절)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각자 한대로 행해진다.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심판 받는다. 우리는 지금 그 준비를 하는 기회의 삶을 살고 있다. 예수님 말씀이 그 판결의 기준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살았는지, 내 뜻대로 내가 좋은 삶을 살았는지가 기준이다. 매일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살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성질날때 성질부리고, 화날때 화내고 하는 안아무인의 삶을 사는 것이 막사는 것이다. 이런 삶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내고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고싶지만 참고 부인하는 삶이 그렇게 보응을 받는다. (롬2:5~6)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진노와 심판을 쌓아가면서 사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그 행한대로 보응하고 심판하는 것이다. 알고나 행하세요. 우리의 영원한 삶은 이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보이는 곳에서는 부인을 해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려져 들어가는 것이다. (롬8:13) 이게 영적 원리이다. 신앙은 죽기위해서 해야 한다. 내 고집, 죄를 죽기 위해서 예배에 와야 살아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사도바울처럼 오늘 이시간부터 무슨 각오로 나가야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부인해야 할지 의식하면서 살길 바래요. 의식만 하고 살아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Sunday, September 25, 2016

2016-09-27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16:21~23)

신앙은 이 세상에 속한 차원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영적인 차원이다. 영적인 일을 인간적인 것으로 할 때 종교성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혼합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본주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본적인 것은 사람들에게는 상식,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좋은 것은 영적인 부분에서는 닫힌 사람이 많다. 영적인 것과 인본적인 것은 큰 벽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신앙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우리의 선한 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지 못하고 책망받게 되는 건지 보길 바래요. 영적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받아지는지 볼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래요.

1. 예수님의 예언


앞에서 베드로를 통해 신앙고백을 받고 칭찬을 하셨다. 이후 부활의 아주 중요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 그러나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씀이 어렵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라서 받지 못하면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관계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이 이뤄질 수 있는 예언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하시는 것이다. 장차 올 하나님의 일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 깨닫게 되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잘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예언적인 신앙을 하는 방법이다.

1) 예수님의 죽으심


a. 예수님이 죽으시는 장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종교인들이 있는 장소이다. 예수님은 더러운 악의 소굴에서 끌려가서 죽으시는게 아니고, 거룩한 장소에서 죽는 것이다. 이건 매우 아이러니한 것이다. 거룩해야 할 교회가 사단에 잡히면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는 악한 장소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기 위해 거룩한 하나님의 장소에서 가장 악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당한 일을 당할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b.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
강도들에게 맞아서 죽는게 아니고, 거룩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되는 것을 알고 계신 것이다. 불신자가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죽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거룩한 척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게 가장 거룩한 직분을 가진 자를 통해 하는 것이다. (고후11:14~15)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이 되어야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그 당시에 가장 거룩한 일꾼들로 인정 받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길 원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믿음은 없으면서 좋은 직분은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직분과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단이 직분 없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예수님 죽이는 일에 어떻게 쓰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직분과 지위를 가지는 것의 위험성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 죽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 하시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에 죽은 것이 승리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새사람으로 살아날 것을 믿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내 영이 죽어야만 새 사람이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경험이 있어야 변화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영광을 얻길 원한다면 아프고 두렵지만 죽는 것이 우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께 항변하는 베드로


예수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화를 내듯이 강하게 항변한다. 자기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설 것이라고 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가 너무 기특하고 훌륭해 보일 것이다. 베드로는 사흘만에 살아날 것으라는 말도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십자가 말씀을 받았으면 예수님을 십자가 앞에서 3번 부인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받았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의 사건을 만났을 때는 보고도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말씀을 영으로 받지 못하면 나중에 그 일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으로 받지 못하면 그 말씀을 들을 때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만, 영으로 들리고 믿음으로 받으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들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다.

3. 베드로를 책망하는 예수님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할 것이다. 이게 인본주의를 가진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게 우리의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것들이 우리 신앙을 어렵게 한다. 정확한 분별력과 상식이 우리 신앙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차이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가 교단을 나누고 자유주의신앙 등을 생기게 한 것이다. 제자를 교육하기 위해서 알지못하는 영적인 부분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책망하며 알려주는 것이다.

1) 예수님을 넘어지게 함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보호한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넘어지게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다. 이 말 듣고 남아있는 베드로도 참 대단하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데 왜 사탄이라는 말을 듣는지 억울하고 섭섭한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때 시험에 든다. 영적인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육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사탄의 목적은 베드로가 아니고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사단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공격한다. 은혜받고 인정받고 세워지고 영향력을 갖추고 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이 그런 사람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겸손할 수 있는 인격이 없는 사람은 넘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세워지는게 좋을게 없는 것이다. 영적인 것을 넘어뜨리는데 가장 쓰기 좋은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이다. 다윗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요압이다. 요압이 다윗이 있게한 일등공신이다. 요압은 인간적으로 다윗에게 충성심이 너무 뛰어났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을 넘어뜨리고 힘들게 하는데 평생을 살았다. 다윗은 반역한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요압은 죽였다. 항상 이런 식으로 다윗과 대치됐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말이 사단이 준 말인지 인간적인 사람은 분간하기 어렵다.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것을 통해 사단이 틈타고 쓰기 좋아서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쓰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은 인간성을 기본으로 하는 옛사람이 죽어서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신앙 하길 바래요.

2) 사람의 일을 생각함


십자가를 설명하실 때 베드록 지는 십자가가 아닌 예수님 자신이 죽는 것을 말씀하신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예수님 자신이 먼저 분이 나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불로 죽여야죠. 하지만 당사지인 예수님은 영적으로 담담하게 말씀 하시지만, 베드로는 사람 편에서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모든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꼬이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만, 이 생각은 하나님이 아닌 사단이 준 생각이다. 우리도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건을 말씀 중심이 아닌 사람의 이성 중심으로 생각하면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이해관계에 의해 생각하면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닌 이런 생각을 준 사단을 꾸짖은 것이다. (롬8:5~6) 육신의 일, 세상의 일을 추구하는데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의 일을 하려고 해야 한다. 생각을 따라서 사단을 속하는지 하나님께 속하는지 알아야 한다. 생각이 중요하다. 그리고 속기 쉬운 것이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대제사장 등을 보면 안다. 속지 말아야 한다. 목회, 선교, 봉사일을 해도 하나님 영광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인간적인 야망을 위해 목회하는 사람도 많고, 인간적인 비전을 위해서 교회 직분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시지만 그냥 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다 아신다. 사단은 우리의 생각을 조절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한다. 시험에 들거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사단이 준 딴 생각을 하게 되어서이다. 우리는 매 순간 그 생각을 막아야 하는데 그걸 막는 수단은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으로만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자기 의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변화되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자기의 생각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점검해보길 바래요. 인간적인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을 부인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인정만 해도 영적으로 많은 성장이 있을 것이다. (빌4:8) 항상 말씀에 비취서 참된 생각만 하고, 경겅한 생각만 하고, 옮은 생각, 정결한 생각, 사랑받을만한 생각, 덕이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 사단이 주는 생각을 막는 방법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무슨 기준으로 신앙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신앙 잣대로 했는지 등을 생각해볼 좋은 기회이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도 한번 다시 생각해보길 바래요. 이게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오지 않은 것은 십자가 못박아서 옛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해보길 바래요.

Friday, September 9, 2016

2016-09-09 (금요예배, 강국정목사님)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라! (삼상 17:41~51)

싸움은 정말 피하고 싶습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싸움을 싸워서 져서 포로가 된다. 그래서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사단은 계속 싸움을 걸어오는데 싸우기 싫다고 하면 사단의 밥이 되는거다. 하지만 싸움에서 백전백승 할 수 있는 방법은 이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한 분이 뒤에 계시다면 이길 수 있다. 아기곰이 광야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맹수가 나타나서 아기곰을 쫒는데 외나무다리에 맞닿고 떨어져서 아기곰이 강으로 떨어진다. 맹수가 뒷따라와서 하류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기곰이 하류로 떨어져 나와서 맹수에게 잡혀서 아기곰이 막 울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만한 어미곰이 나타나서 맹수가 도망쳤다. 아기곰의 부르짓음에 어미곰이 나타난 것이다. 부르짓을 때 엄마곰이 나타나는 것처럼 부르짓는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골리앗이 나타나도 부르짓을 때 예수님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아바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적 전투에서 겁먹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갈 때 승리하실 줄 믿습니다. 영적 전투의 원리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너무 잘 나타난 것이다. 이런 대적을 어떻게 소년 다윗이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승리하는가를 통해 영적전투의 원리를 깨달아서 사단의 괘계를 파하는 우리가 될 줄 믿습니다.

1. 싸움의 무기 (43, 45)


일반적인 전쟁은 첨단 무기일수록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전쟁은 사드나 핵에 있는게 아니라 전쟁은 여호와께 있을 줄 믿습니다. 보이는 3차원은 보이지 않는 4차원이 다스리는 것이다. 싸움의 승패는 보이지 않는 다윗과 함께 하시는 영이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1) 골리앗의 무기 (43, 45)


단창을 가지고 나왔다. 보이는 무기를 보면 키는 약 3미터이고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다. 몸에는 비닐갑옷을 입었는데, 갑옷의 무게는 약 50kg정도 된 것이다. 다리에는 놋 각반을 차고 어께에는 놋 단창을 매고 창날은 철 600세겔이었다. 이런 골리앗이 큰 목소리로 이스라엘을 보며 외쳤다. 더 큰 소리로 나가야 될 것입니다. (삼상17:9) 이렇게 이스라엘 국민들을 모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큰 소리로 나와 싸울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삼상17:11) 이런 말은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적장의 사단의 말은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 지어다 즉시로 선포할 때 그런 말은 모두 물거품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 아휴 무서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만 들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이 들어오면 전쟁에서 이미 지는 것이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싸우면 100전 100패가 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반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마음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딤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이 들어올 때 즉시로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기억할 때 두려움의 세력들이 즉시로 떠나가는 것이다. 사단의 말에는 창조의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즉시로 사단이 떠나갈 것이다. (이사야41:10) 두려움이 들어오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이다. 놀랄 때 청심환 드시기 마세요.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가기 때문에 평강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골리앗을 볼 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우리를 보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권세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다윗의 무기 (43)


골리앗의 무기는 사람이 보기에는 엄청 견고하다. 여기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총이나 대포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혈과 육이 아니라고 하셨다. 다윗은 물멧돌 밖에 없었다. 소년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갔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들 보니 너무 우스웠던 것이다. 다윗의 모습은 무서웠던게 아니고 아름다웠다고 표현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골리앗은 업신여겼던 것이다. 스스로를 개로 여기고 "나를 개로 여기고 나왔느냐?"고 골리앗이 물어봤다. 영적 전투이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이사야41:11) 골리앗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 멸망할 것이다고 한 것이다. 다윗으로 인해 자신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고 있고, 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한 사람만 있으면 모든 골리앗을 수치를 당하게 하고 멸망하게 될 줄 믿습니다. 골리앗과 같은 분들이 명절 가운데는 항상 있다. 말씀을 받길 바래요. 말씀을 기억하면 수치와 욕을 당하고 다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2. 싸움의 전략 (43, 45)


영적인 전략을 듣고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할 줄 믿습니다.

1) 골리앗의 전략 (43)

다윗의 배짱은 어디서 나올까요? (43b) 골리앗도 대충 나오지 않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저주한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울왕까지도 두려워했다. 골리앗처럼 주변에도 뒤에서 조정하는 신(후원세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갈 때 승리하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혈기세력을 떠나가라고 선포할 때 혈기의 세력은 떠나갈 것이다. 원리는 곰 예화와 똑같은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며 나갈 때 승리할 것입니다. 명절 때도 영적 전투를 해야 한다.

2) 다윗의 전략 (45)


만군의 여호와는 강하거나 약한 세력이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골리앗과 같이 뒤에서 조정하는 세력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분이 다윗에게 있는 것이다. 담대하게 선포 하라고 하면 해야되는 것이죠. 골리앗들을 향해서 "너의 목을 벨 것이다"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영적인 목을 베야 한다. (47)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고 선포합니다. 전쟁은 핵에 있지 않는다. 영혼을 죽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영혼을 지옥불에도 넣고 천국에도 보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길 바래요.

3. 싸움의 방법 (43, 48~51)


실전에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가 원리를 잘 배우시길 바래요. 하지만 지식으로 배우면 안된다. 원리를 배우시기 바래요.

1) 마주하여 달림 (48)


다윗은 골리앗이 달려올 때 두려워하지 않고, 다윗도 달려간 것이다. 대적을 보면 그냥 달려가시길 바래요. 함성이 나고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만군의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께 번제 드리는 것 외에는 할게 없는 것이다. 전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포하고 예배드리는 것 밖에 없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앞에 모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 나면 많은 신을 섬긴다. 수능이나 급한 일이 생기면 여기저기 신이 있는데, 여호와를 섬길 때 전쟁의 주관자이신 여호와를 섬기시길 바래요. 다른 신을 섬기니 승리할 수 없죠. 항상 섬겨야 하는 것이다. 좋을 때만 여호와 하나님 하면 안된다. 항상 하나님을 섬기시길 바래요. 그리고 내 뒤에 섬기는게 아니고, 앞에 섬겨야 하는 것이다. 항상 먼저 내 앞에 섬기시길 바래요. 아무리 전쟁이 있어도 요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평강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2) 익숙한 것을 사용함 (43, 49~51)


익숙치 않는 것은 벗어 던지고, 익숙한 나무막대기와 물멧돌로 골리앗을 이긴 것이다. 주신 것을 가지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하나님꼐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익숙한 것을 사용하시길 바래요. 세상에 가진 것은 작지만, 그것을 들고 나아갈 때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게 될 줄 믿습니다. 한번의 예배로 영적 전투에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익숙한 기도를 할 때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시고 크고 은밀한 일도 보게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을 통해 골리앗을 쓰러뜨리시길 바래요. 반드시 선포대로 이뤄질 줄 믿습니다. 익숙한 것을 가지고 기도하신다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적극적으로 달려가서 물멧돌을 던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Sunday, September 4, 2016

2016-09-04 (주일예배, 강국정목사님) 무덤에서 나오라! (요11:38-44)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so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는 것이다. 진화론자의 말처럼 뱀, 원숭이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너무 끔찍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한다. 저주에서 끊어진 줄 믿습니다. 자존감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정복할 줄 믿습니다. 사단은 뱀의 모습으로 죄를 짓게 하고 죄의 삵은 사망이기 때문에 실제 죽음 및 영적인 죽음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 마저도 무덤에서 3일간 가치게 했고, 거라사인 귀신들린자의 주거장소가 무덤인 것이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망하고 죽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다. & 사망권세를 깨드려서 무덤에서 부활하게 된 것이다.

1. 무덤에 찾아가신 예수님 (38~40)

사람들 눈에서는 무덤 안에서의 나사로는 소망이 없어보인다. 사람들이 보기에 믿음없는 사망 가운데 있는 나사로를 볼때 예수님은 너무 애통하신 것이다. 나사로 같이 영적으로 죽은 가운데 있다면 다른사람은 포기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무덤으로 찾아갈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영혼사랑이다. 이런 영혼들을 볼때 비통하게 여김으로 찾아가길 바래요.

1) 돌을 옮겨 놓으심 (38, 41)


나사로를 어떻게 하지 못했냐며 예수님은 조롱 받고 계셨다. 예수님은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셨다. 돌을 옮겨놓을 때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돌을 옮겨놓이시길 바래요. 다른 모든 것은 마음문을 열어도, 자녀의 고질적인 문제는 예수님도 못하실거야 하면서 생각의 진지로 잡혀있는 것이다. 또한 부부문제도 몇년이 되도 해결되지 않지만 예수님만은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문을 열길 바래요.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썩은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살아난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부정적인 막고있는 돌들을 예수님 앞에 마음을 열길 바래요. 돌을 옮겨놓으시길 바래요. 예수님이 일을 못하시는 것은 그 문제가 큰 문제라 못하시는게 아니고, 내 마음에 큰 돌이 있어서 못하시는 것이다. 돌을 옮기는 믿음의 행위를 제발 보이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래요. 겸손하게 순종하려는 마음의 문이 열려있어야 열 수 있는 것이다. 돌을 옮기지 못하는 것은 부정적인 자기의 생각 때문인 것이다. 마르다의 경우도 자기 관점에서 이미 썩은냄새가 나기 때문에 돌을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후10:5~6)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때 말씀에 복종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인 생각 마저도 굴복되게 되는 것이다. 왜 자기가 나사로를 살리려고 합니까?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단지 말씀에 순종해서 돌만 옮겨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실 것이다. (요11:40, 41) 이문제 만큼은 안돼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말씀을 듣고 돌을 옮기는 믿음이 들어오게 될 줄 믿습니다. 부활을 막는 돌을 옮기는 믿음이 생기길 바래요

2) 선포하심 (43)


예수님께 기도할때마다 예수님은 다 들으신다. 이미 다 이루신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시길 바래요. 하나님께 감사기도하신 후에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선포하셨다. 나사로가 나오게 된 줄 믿습니다. 선포만 하더라도 이뤄진 것이다. 큰소리는 애들한테 하는게 아니고, 이럴때 하는 것이다. 왜 무덤속에 있나요? 배웠으면 사용하세요.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를 받으면 어케 된다는걸 목사님은 경험했기 때문에 아신다. 말씀 한마디가 인생을 변화시킨다. 말씀 한마디가 들어올 때 어둠이 물러나는 것이다. (요5:25) 이 때 살아나는 것이다. 종교의 무덤에서 선포할 때 다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선포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 선포할 때 말씀 가운데 성령님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선포하길 바래요. (막11:23) 던져지며 말하라는 것이 선포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에도 생기가 들어가라고 말하고 선포하니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된 것이다. 큰 소리로 대상자의 이름을 부르며 선포할 때 사망에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2.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이유(40)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표적이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이유는 마르다나 마리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리신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영광 때문인 것이다.

1) 하나님의 영광


(이사야43:7) 우리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죽은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일을 행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참만족이 되는 것이다. (요11:4) 예수님은 2일을 더 유하신 이유는 나사로를 살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극대화 되는 것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 하길 바라고 하나님 영광을 입으로 선포하길 바래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을 때 바로 가서 살렸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40)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동역하는 예수님의 동역자로 쓰임받게 될 것이고, 나사로가 나오는 기적을 제일 먼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2) 믿게 하려 함(42b)


부활의 주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42)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 함이다. (요11:25~26) 영원히 죽지 아니 하는 것을 믿느냐? 라는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 하겠습니까? 대답은 무조건 "아멘"이다. 말씀을 들은 즉 바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눈을 멀리 보지 않아도 된다. 여름수련회 때만 보더라도 더러운 귀신과 묶인 저주에서 풀려나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게하려고 하는 것이다.

3) 다니게 하기 위함(44b)


나사로야 나오라 했을 때 죽음의 영이 떠나간 것이다. 죽음의 영이 가장 강한 영인 것이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면 모든 조무래기 영 들은 다 빠져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수적이 동여메여 있기 때문에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데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 찬양을 해도 자유함으로 하지 못한다. 예배를 드려도 얼굴이 수건으로 동여 메여져 있기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전도를 해도 손발이 꽁꽁 묶여 있기 때문에 선포할 능력이 없다. 천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십자가에서 다 끊어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이런 묶임에서 풀어나는 중보기도자가 되시길 바래요. & 풀려나길 바래요. & 풀려 났다면 다니길 바래요.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우리도 나사로와 같이 다녀야 하는 것이다. 풀어놓아 쉬게 하라고 하신게 아니고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다니시길 바랍니다. 다닐 때 조롱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이런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말씀이 들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이 생길 줄 믿습니다.

결론

수련회 가운데 모든 질병, 시기심, 상처로부터 살아났다면 다니시길 바랍니다. 무덤에서 나오라고 선포하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 묶고있는 수족을 풀어나게 하는 중보기도자가 되길 바래요.

Sunday, August 28, 2016

2016-08-28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17)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이 있지만, 아무도 자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왜냐면 내 체질을 만든 사람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만큼 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알아야 내 자신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나를 아는것 같아도, 내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믿기 전에는 자신이 의인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스데반집사를 죽이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놀라운 변화이다. 예수님은 바울을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느냐?"고 말하신 것이다. 예전 삶과 전혀 반대의 삶을 사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 이것이 능력이다.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것의 특징이 변화되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그냥저냥 물고기 잡으면서 사는 어부였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순종할 때 예수님을 만났고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이 자신이 죄인인 것이다. 아무도 베드로가 죄인인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특징이 변화의 삶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죄 지으면서 불쌍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철학책, 도덕책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하는 것은 없다.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지식의 욕구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우리의 영혼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있는게 아니다. 최고의 지식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다.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예수님을 잘 알아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꿀을 연구분석해서 꿀맛을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 수는 있지만, 꿀맛의 성분은 모르지만 꿀을 먹어본 사람이 실제적인 꿀맛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게 신앙의 차이이다. 예수님의 지식적인 이론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지식을 알아도 인생이 변화되지 않는 것보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화되는 것이 큰 차이이다. 교회를 다니더라도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단계인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신앙인지 생각해보세요.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니고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다.

1. 세상 사람들이 아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지방에 갔다. 여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방으로 우상을 섬기는 지방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그나마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말씀 드렸다. 귀신들린자, 미친자 등의 답변은 얘기하지 않았다. 세례요한이 말한 사람이라 굉장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엘리야 역시 굉장한 선지자였는데, 그로 봤다. 하지만 놀라운 선지자로 봤다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좋은 사람, 놀라운 사람, 위대한 사람으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악한 바리세인은 빼고)은 믿었다. 이런 좋은 영향력과 교훈을 따라 산다고 해서 도덕적인 삶(착한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인생의 생명을 얻는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영혼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게 종교인의 불행이다. 자기 신앙이 어떤가를 체크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래요. 목사님의 좋은 교훈을 받아들일 지는 몰라도 영원한 생명, 근복적인 죄문제를 해결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직접 꿀을 먹는 신앙 하길 바래요. 말씀을 먹어서 네 창자에 넣으라고 하신다. 영생을 얻는 신앙 하길 바래요.

2. 베드로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아느냐?"고 물어보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케 믿든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예수님을 믿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질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내 앞에 서서 "너는 나를 누구라 아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 영원한 생명을 결정짓게 하는 질문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어케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자기를 위해서 신앙해야 하는데 셀장, 목회자, 주변사람 눈치 보면서 신앙하는 것은 안된다. 다른사람이 말하는 예수님이 아니고 내가 아는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는 내 양심에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갈등되고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낭패되지 않으려면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세운 사도들에게도 이 질문을 하신 것이다. 이런 질문에 누가 가장 바로 대답할 수 있냐면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베드로가 가장 먼저 대답 했다. 베드로에게 이 질문은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16)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신앙고백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엘리야다 세례요한이다 미친사람이다 귀신들린자다고 말할 때 이런 고백이 나온 것은 놀라운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믿으면 복이 됩니다. 이것을 믿을 때 내 인생이 구원과 복이 임함을 믿으시길 바래요, & 왕의 자녀가 되는 것도 믿으시길 바래요. 예수님만이 구원을 위해 보내신 유일한 분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요14:6)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예수님 이외의 모든 세상 이론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우리 인생을 자유케하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 만이 영생인 것이다. 자기가 생명을 준다는 것은 모두 사단의 거짓이다. 예수님이 아니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떠나면 길이 아닌 것들을 하고, 생명이 아닌 곳에 가있다. (행4:12) 천하에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지만, 구원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단 교주(적그리스도,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자신이 재림예수라 한다. 그리고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 죽었다. 이런 어이없는 말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수님의 자리에 자기가 있는 것이 거짓선지자, 적그리스도의 특징이다. 내가 악한 영에 미혹되면 예수님은 안믿어지고 그런 사람이 믿어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절대 구원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롬 10:9)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다. 무릇 지킬 것 중에서 마음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이 내 주님이라는 것이 서툴고 안나오는 것은 마음에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내 마음 중심에 뭐가 있는가를 자신이 한번 대답해보세요. 우리 인생에 최대 문제는 내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이다. 가장 가까운 문제가 죄문제이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풀과 같다고 한다. 풀은 봄에 아름다운 싹이 나오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잎이 나온다. 하지만 결국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는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 말씀이 내게 있으면 그 안에 씨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17) 여기서 예수님은 옛날 이름인 바요나 시몬(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얘기 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마11:25)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에 너무 감사가 된다는 것이다. 교만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는 보여주시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주이시다. 이게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찬송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을 내가 어케 믿고 있는지 마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Sunday, August 21, 2016

2016-08-21 (주일예배, 최장호목사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24))

(신10: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아바아버지의 관계이다. 자신은 불의할지라도, 자식들에겐 좋은 것만 주길 원하시는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마7:21) 우리 편에서 “주여”라고 하는 관계 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게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18b) 수련회 이후 우리를 괴롭히던 영으로부터 자유롭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풀려지는 역사는 진행 중이다.

1. 적극적으로 힘쓸 것 (16~18)


기뻐하는게 아니고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는게 아니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감사가 아니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어로 말씀 하신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았고,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기에 권면한다.

1) 항상 기뻐하라 (16)


(살전1:6) 말씀을 받고 변회가 되어서 데살로니가교회가 주변 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기쁨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 다음으로 나오는 열매이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빌4:4)로 말씀 하셨다. 억울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뻐했고, 문이 열렸다. 간수가 감옥에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것을 보고 자살하려고 했을 때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가족으 모두 구원 받았고, 빌립보교회를 세웠다.

2) 쉬지말고 기도하라(17)


보통 긴급한 경우가 아니면 기도의 자리로 나가지 않는다.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은 환경을 만들어서라도 기도하게 하신다. 좋은 환경이 꼭 좋은건 아니고 반면에 나쁜 환경이라고 곡 나쁜건 아니다. 기도는 호흡이라고 하신다. (삼상12:23) 이 마씀을 할 때 사무엘은 마음이 탐탁지 않을 때였다.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해서 왕을 세운 후였다.

3)범사에 감사하라(1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한 일에 대해서 입술로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신다. (눅17:19) 예수님은 10명에게 치유를 선포하시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했다.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몸이 깨끗히 나았는데 그 중 1명만 제사장에게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눅17:17~19) 사마리아인 1명망 영광을 돌렸다. 다른 9명도 치유가 됐지만, 영광돌린 1명만 구원을 선포해주셨다. 수련회 가운데 받은 은혜를 조목조목 선포하면서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치유의 역사를 계속 하신다고 하셨다. (빌4:6) 그러면 먼저 마음에 평강을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기적을 이후에라도 해주실 것입니다.

2. 소극적으로 삼갈 것 (19~22)


손바닥에 양면과 같다. 적극적인 것 3개가 손등이면, 소극적인 것 3가지는 손바닥이다.

1)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19)


성령은 불로 비유하기 때문에, 성령의 불을 꺼뜨리지 멀라고 하신 것이다. (행1:8)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받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 (막9:28, 29)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제자들은 기도로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적으로 기도를 해야 성령 충만할 수 있는 것이다. 핸드폰 배터리를 계속적으로 충전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도와 말씀을 게을리 하면 점점 약화되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하고 나서 혈기 한번 내버리면 확 꺼져버린다. 거짓말 한번 하면 꺼져버린다. (엡4:30) 성령이 소멸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성령이 떠나자 그 즉시 악한 영이 들어와서 나중 형편이 더 악화되는 것이다.

2)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20)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예언 하기를 사모 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언은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받은 계시는 성경의 말씀으로 확증을 받아야 한다. (계1:3) 이번 여름수련회를 통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계속 기도할 때 회개의 은혜가 계속 부어질 줄 믿습니다.

3) 범사에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버리라(21, 22)


이제는 성령의 음성으로 들은 것과 받은 것을 우리의 인생에 행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늘 익숙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좋은 것은 선이고, 하나님 편에 좋지 않은 것이 악인 것이다.

3. 미쁘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23~24)


(23)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라는대로 하면, 하나님만 잘되는게 아니고, 우리도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24) 이루는 것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하셨다. (렘33:2~3) 앞에 6개를 언급했지만, 그 중 한가지만 선택하라면 하나님께 부르짓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