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 2016

2016-10-02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예수님의 제자도 (마16:24~28)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주님께 나가는게 중요하다. 이게 성숙한거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이면에는 남에게 비난받고 부끄럼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다른말로는 남이 실수하면 정죄하고 부끄럽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so 바리새인처럼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이 인생의 기초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실패를 한번 한 사람은 그 실패로 인해 넘어질 수 있지만, 많은 실패를 한 사람은 한번 더 실패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베드로가 왜 실패할수밖에 없었는지 알려주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을 따르는 기준으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실패를 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일인데, 이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세상을 따르는 원리와 영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필요한 원리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인간적인 가치관으로 신앙을 시작하면 항상 반론하고 부딪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을 따를때는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을 따를때는 영적인 원리로 따라야 한다. 교회에서 내 신앙을 할때마다 시험에 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이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알고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는데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기본적인 영적 원리를 알아서 초보적인 문제로 걸림이 없길 바래요.

1. 제자도의 원리 (24)


 예수님의 제자도를 따르는 가장 기본 말씀이 (24절) 말씀이다. 이대로 하지 않으면 교회는 주일날 나올 수 있어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누구든지라고 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교회다니는 사람은 삯꾼이요 도적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 자기를 부인함


앞절에 베드로 사건을 기억하고 들으면 더 잘 이해갈 것이다. 신앙이 안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을 해도 자기 생각대로 하기싫으면 안하고 하기 좋은것만 찾는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좀 해보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안한다. 이건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안생기는 것이다. 베드로가 앞절에서 예수님께 한 말은 자기의 뜻이 너무 강했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길 원한다면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더러운 구유의 마굿간에서 오신 것은 자기부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에서도 동역자에 있다가 셀동역자로 내려가도 자존심 상하고 교회를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오시고, 바리새인들에게 심한 모욕을 듣는걸 자기부인을 기꺼이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말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넘어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신 것이다. 이게 신앙의 원리인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육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중에 형편이 되면 한다는 것은 자기가 속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것은 기도의 소원을 주실 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육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걸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게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니 억울한 일, 권리를 포기할 일 등이 얼마나 많나요? 이런것을 연습하는 것이 신앙인데, 자기 의가 많은 사람은 뭐 하나 할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자기 조그마한거 하나 부인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자기부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늘 남을 넘어뜨리는 일 밖에 할수있는게 없다. 자기 고집을 세우면 상대방은 아플수 밖에 없지만, 상대방은 섬기는 것이다. 신앙을 오래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는 예배는 드리기는 드리는데 자기를 부인하면서 까지는 예배를 못드린다. 예수님께는 아무 유익이 안된다. 신앙에는 원리 원칙이 있는데, 그것만 받으신다. 문 밖이나 문 위로 들어오는 자는 강도인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신앙 하길 바래요.

2) 자기 십자가를 짐


자기 부인을 하고 난 후에 이후 부인한 자기를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인하지 않은 자기가 살아난다. 자기 부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 같아도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서 신앙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죄이다. 그래서 자기 죄를 십자가에 죽이지 못하면 맨날 방해 받는 것이다. 내 속에 죄가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죄를 못박아야 방해받지 않고 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전에 종교인이었다.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는 것은 두 늑대가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늑대와 죄의 늑대가 항상 싸운다고 한다. 이런 갈등이 자신을 곤고하게 만든다고 한다. 세상을 따르려면 세상을 따르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신을 죽인다고 했다. (고전15:31)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사는 것을 자랑하는데, 바울은 날마다 자기가 죽는 것을 자랑한다. 신앙이 뭔지 아는 사람만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뭐냐? 기도모임 참석하고 성격 읽고 찬양하는거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은 종교행위일 뿐이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베드로가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신앙의 문제가 뭔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머리만 굴리는 신앙으로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다. (빌3:7~8) 바울은 그 전 자기 생각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교리 등)이 다메섹동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리스도인을 이해서는 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유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주님께 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적 리더들 입장에서는 다 보인다. so 과거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해로 여긴다. 이걸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이 귀하게 보입니까? 그러면 아직 먼 것이다. 모든걸 배설물로 생각한다면 십자가 지는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것이 죽어야 신앙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답을 알려 드리니 다음부터는 틀린 답을 말하지 마세요.

2. 이유


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냐?
첫번째는 (25절)의 영어에서는 because로 시작한다. 자기 목숨에 관계되는 것은 부인하기 너무 어렵다. 먹고사는 문제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차원을 뛰어넘는다. 자기 목숨이 너무 아까워서 육신의 생명을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가치있게 생각하지 못하면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자기 형편에 따라 예수님을 사랑하라는게 아니고, 자기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선택인 것이다. 육신이라는 거에는 상황, 생각, 상태 등 모든게 다 들어가 있다. 셀이나 주변에 영적인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자존심, 십자가를 지지 못한다. 이는 영적 생명이 없는 것이다. 자기를 죽일 때만 주시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다. 변화가 없는 사람의 특징(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열매가 없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가끔 4천년 전의 볍씨가 발견된다. 자기가 죽지 않으면 4천년 동안 열매가 없는 것이다. 이 4천년된 볍씨를 땅에 심으니 싹이 난다고 한다. 4천년된 볍씨도 죽으니 싹이 나고 열매가 난다. 자기 죄에 죽어지지 않으니 죄가 자신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때 자기부인하지 않고 따를 일이 없는 것이다. Pre-come에서 전도할 때 사람이 없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부인을 하지 않고는 전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기도모임 하나 나오는게 힘든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기도하기 너무 어렵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데서 모든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종교생활 하니까 힘든 것이다. 그래서 육신대로 편하고 쉽게 하면 육신은 좋겠지만 그 몇배의 영적 곤고함이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누가 신앙의 생기가 있고 활력이 있나요? 많은 고난과 피박, 경제적 어려움이 있지만 그걸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게 신앙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한번 영적으로 망하고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영적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육적인 생명이 죽어야 영적 차원의 생명이 열리는 것이다. 정말 은혜로운 간증은 천국 갔다온 간증이 아니라 죽었다 깨어난 간증이다.
두번째는 (26절)이 우리가 죽어야 할 결정적인 이유인 것이다. 세상의 쾌락, 물질 등 세상의 문제 때문에 신앙을 잘 하지 못한다. 장례식 가면 "저 양반 평생 가족을 위해 과로하다가 일찍 가네. 저 불쌍한 양반"이라고 한다. 목숨보다 귀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 없이 세상적인 성공은 성공이 아니고 치명적인 실수이고 최악의 선택인 것이다. 평생 헛수고를 한 것이고, 결국 그거 얻으려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영적으로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3. 결과


마지막 때 (27절)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각자 한대로 행해진다.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심판 받는다. 우리는 지금 그 준비를 하는 기회의 삶을 살고 있다. 예수님 말씀이 그 판결의 기준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살았는지, 내 뜻대로 내가 좋은 삶을 살았는지가 기준이다. 매일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살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성질날때 성질부리고, 화날때 화내고 하는 안아무인의 삶을 사는 것이 막사는 것이다. 이런 삶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내고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고싶지만 참고 부인하는 삶이 그렇게 보응을 받는다. (롬2:5~6)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진노와 심판을 쌓아가면서 사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그 행한대로 보응하고 심판하는 것이다. 알고나 행하세요. 우리의 영원한 삶은 이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보이는 곳에서는 부인을 해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려져 들어가는 것이다. (롬8:13) 이게 영적 원리이다. 신앙은 죽기위해서 해야 한다. 내 고집, 죄를 죽기 위해서 예배에 와야 살아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사도바울처럼 오늘 이시간부터 무슨 각오로 나가야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부인해야 할지 의식하면서 살길 바래요. 의식만 하고 살아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