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7, 2019

2019-01-27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한계를 돌파하는 제자 (마28:19~20)

제자훈련의 마지막 단계는 선령을 받고 나가는 것이다. 모임에 힘쓰기도 해야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흩어져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것은 흩어져서 밖에서 어떤 사람을 살고 있느냐이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일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느냐이다. 세상에 나가지 말고 너희끼리 모여살아라고 하면 그 당시 제자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모여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앞으로 제자들이 걸어야 할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살도록 제자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제자의 삶에는 놀라운 새로운 단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마지막 말씀이다. 넘 제자들의 모습이 연약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복음서의 제자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니다. 단지 세상을 향해 어딘가로 움직이는 차원이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보지 않고 도전해보지 않았던 삶을 도전하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단계로 돌파하고 도전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의 차원, 신앙의 차원에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가는 삶이 되길 바래요. 예루살렘 살다가 사마리아로 가라거나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라는 그런 차원의 의미가 아니다. 지역적인 문제를 떠나서 나의 삶, 경계, 울타리가 있다면 그것에서 머물지 말고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믿음을 가지고 도약하고 반응하라는 것이다. 그렴 반드시 돌파와 도약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직접 훈련받는다. 구약에 보면 엘리야가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실 때 어땠을까요? 엘리야가 불을 내리고 해야할 것 같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을 동역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히려 부끄러운 모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맞는데, 예수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복음서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은 모든 나라에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은 선포할 때 제자다운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에게 하는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과 같은 한계를 돌파는 삶이 되길 바래요.

1. 관계의 한계를 돌파하라

교회는 잘 아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친목단체가 아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와서 구원 받는 곳이다. 즉, 새로운 죄인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제자다운 삶을 살고 영적인 권세를 가져야 한다면 관계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내가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력을 미치길 바란다. &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를 연구하는 책들도 많이 나와있다. 인간적인 관계의 기술로 관계를 넓히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우리 교회 안에 1,000명의 성도가 있다고 하면 과연 1년 동안 몇명의 성도와 관계를 갖고 대화를 하며 살까요? 심지어 같은 팀 안에서 말 한마디 안하는 경우도 있다. 부부간에도 대화가 없고 평화로운 말도 안하는 그런 관계이기도 하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사람들을 만나는 관계가 점점 줄어든다. 나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 공통점이 있는 사람,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사이, 오랫동안 함께 있어서 별다른 대화 없이도 편히 지내는 관계만 만날수도 있다. 여기서 돌파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돌파가 필요하다. 우리가 은혜 받고 나면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전에는 저 사람이 왜 이리 어두운지, 짜증이 많은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은혜받고 난 후에는 그 사람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 내 마음에 품어지고 관심이 가져지기 시작하고 사랑과 긍휼이 생긴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들에게 먼저 찾아오셨다. &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죄인된 우리들에게 사랑과 긍휼의 손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은혜가 강권한다. 나와 같은 생각하는 사람만 만났는데, 내가 정해놓은 관계의 울타리를 허물어주셔서 내가 품을 수 없는 사람을 품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행3:1, 2) 시간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기도를 했다. 나면서부터 걷지못한 앉은뱅이된 장인이 있다. 이 사람을 성전미문에 둬서 그 사람이 먹고살 수 있도록 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전에는 이 사람을 봤지만, 영적으로 변화될 때 이 사람에게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걸으라고 선포할 때 걷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변화되었을 때 새로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관계에서 돌파가 생기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새로운 사람을 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그 사람을 통해서 돌파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한계에 부딪친다. 하나님은 사건으로 제자들을 뿔뿔히 흩어놓으신 것이고 흩어졌을 때 각자의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이 유대인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이방인, 세상에 흩어놓으셨다. (롬10:14, 15) 복음을 들고 나갈 때 성경은 이것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세상사람들은 미련해 보이지만, 그들 안에 믿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빛을 가지고 있는데, 대낯에는 그 빛이 쓸모가 없다. 교회 안에서 성도님들과 함꼐 있을 때는 내가 받은 은혜가 작아보인다. 하지만 어두운데 가면 내가 가진 작은 빛이 밝아보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믿음은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다. 나의 관계 안에 계속 머물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성령으로 변화되고 있는 만큼 관계도 변화되고 품고 있는 사람과도 변화되길 바래요. 내가 다가가지 않았던 사람, 나와 맞지 않아서 다가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다가가길 바래요. 내 인생을 소극적인 인생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2. 지식의 한계를 돌파라라.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말씀이 더 많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 계속 말씀하신다. 부활과 고난 앞에서 말씀을 계속 하셨고 제자들도 "아멘" 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 십자가 앞에서 모두 숨었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그 말씀들이 영으로 깨달아지면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쓰임받게 되었다. 신앙이 변화되고 새인생을 살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말씀이 깨달아져서 변화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주일학교에서도 계속 듣고 해서 잘 아는 그 말씀이 영으로 깨닫게 되어서 변화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역을 하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잡아서 법정 앞에 세웠다. 제자들은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한다. (행4:13)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 이 사람들이 어부나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타당하게 변했냐고 깜짝놀라서 반박을 못한다. & 결국 제자들을 풀어주게 된다. 기독교 교리나 신학으로는 구원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종이에 적힌 말씀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능력이 없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니 운동력이 있는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히4:12) 우리 가운데 역사해야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운동력이 있어서 내 인생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들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지식도 있다. 많은 신앙서적, 성경을 단지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내 신앙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목사님도 신학교에서 많은 교과목들을 배웠는데 영혼의 변화는 없었다. 변화가 없어서 군대에 갔는데 폐결핵에 걸려서 죽을 뻔했다. 그 병 때문에 제대하고 목사님 선교단체에서 만나서 훈련을 받고 성령을 받으니 폐결핵이 낳았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그 말씀, 기도에 대한 말씀은 아지만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은 알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 말씀들이 내 안에서 영으로 깨달아지고 살아나면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난다. 창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열정이 일어난다. 예전에 내가 세상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럽지 않다. (고후3:6) 바울도 동일하게 고백한다. 성경말씀을 다 안다고 해서 지식으로 남아있으면 그 지식은 아무 능력도 없고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넘어진 것은 종교적인 지식이나 헌신,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이 깨달아지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은 것이다. 그 시대에 성경저식으로는 종교지도자들이 뛰어났을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또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곳에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길 바래요.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을 영으로 만나길 바래요.

3. 능력의 한계를 돌파하라

제자들은 부르심은 받았지만 지금까지는 자기 능력으로 따라갔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생각과 마음으로 한 말이기 때문에 사건 앞에서 따라갈 능력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부족한 우리를 통해 큰 일을 원하시는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섬겨도 우리는 우리의 영광이 되길 원한다. 우리가 신앙하며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길 원하신다. 내가 못할만한 일을 맡게 되면 어케 할까요? 그 사람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기도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밍을 나의 생각가 경험으로 하지 않고, 깊은 곳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내 방법으로 하는게 아니고 내 문제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은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풀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은 내가 내주지 않으신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난관에 빠진 사람 있습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만 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고 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능력 중에는 십자가를 지는 능력도 더불어 주신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지시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고후12:12)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더 더 큰 능력을 행했다. But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되 그것을 행함으로 더 큰 핍박을 견뎌야 했다고 고백한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능력을 준다. (요21:18) 베드로를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베드로의 남은 삶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순종할 때 베드로를 통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고전2:4)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사람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아름답게 신앙하려고 하면 하나님께 책망받습니다. 구원받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관계으 돌파가 있길 바래요. & 새로운 차원으로 복음을 들고 예수님의 제자로써 복음을 증거하길 바래요. 남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역동적인 삶을 살길 바래요.






Sunday, January 20, 2019

우리도 느끼듯이 지금 시대는 가치관의 변화가 극심한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는 시기이다. So 영적 분별력이 많이 요구되는 때이다. 분별력을 위해서는 이 세상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원본을 보면 지금 얼마나 어디서 벗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돌아가고 운영하시는 원리를 다 만들어 놓으셨다. &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계획이 하나하나 나타나는 형상을 뿐이다.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다 기록해 놓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봐야 할 때가 지금인 것이다. 그래야 거짓되고 혼란한 시기에 거짓된 말, 사상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역사에 하나님의 때에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서론 격으로 마지막 때에 무엇을 주의해야 할지를 보고자 합니다. 지금은 시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요즘은 인터넷, 유튜브, 시중의 책들은 시대를 빠져드는 방법이지, 시대를 분별하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가서 정확하기 분별하는 시대를 정복하고 앞서가는 예언적인 삶을 살길 바래요,

1. 예언적 선언

웅장한 성전 건물이 너무 놀라워서 예수님께 나오는 과정이다. 그 성전건물은 평생 처음보는 웅장한 성전이었다. & 그것을 자랑하러 예수님께 왔는데, 그 마음에 찬물을 끼언진 말씀이다. (2) 이 말씀에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건물은 성정 하나 짓는데 약 83년 동안 지었다. 이 말씀이 있는 당시도 그 건물은 아직 30년을 더 지어야  하는 건물이다. But 완성된 후 약 7년 후에 로마에 의해 허무하게 한순간에 무너졌다. 사람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는 것은 한순간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성전 외형은 볼 수 있었지만, 그 건물의 영적 상태는 보지 못했다. 예수님도 그 건물을 왜 멋있게 안보셨겠습니까? 분별력있는 예수님의 눈에는 그 건물은 더럽고 타락된 사람의 마음과 도둑의 것처럼 보인 것이다. 같은 것을 한쪽은 웅장하고 멋지게 보는 반면에, 다른 쪽은 더럽고 추악하게 보였다. 제자들은 성전에 대한 기준과 가치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성전을 영적으로 볼 눈이 없었다. 반면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성전 원본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원본에 따라 볼 수 있는 기준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것도 예수님은 오리지날 교회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교회를 원본 그 모습으로 보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될 때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원본이 아니면 무너질 것을 예표적으로 보이시는 것이다. (계18:2)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몸을 지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가져야 할 기준을 하나님께서는 가지고 계신다. 어떤 사람은 평상 성전 된 자기 몸을 화려한 것으로 낙서한다.  성전된 우리 몸에 소금의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의 발에 밟힌다고 하셨다. 결국 성전은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이다. 돌덩이만 남은 것이다. (히12:27, 28) 진동시키는 이유, 성전을 허무는 이유는 진동하지 않을 것들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진동 안될 것이 무너질 일은 없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들, 흔들리지 않을 것들만 남을 때 남는 인생 되길 바래요.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흔들텐데 지금이 그러는 시대이다. 성전까지 무너뜨릴 하나님께서 뭘 아끼며 뭘 무너뜨리지 않으시겠어요?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들로 인생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 신앙해야 한다. 말씀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무너지기 때문이다.

2. 예억적 경고

제언제 알어날 것이며,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까 하고 물어봤다. 제자들의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아침에 뿌옇게 되면 미세먼지 많을 것이다 생각한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자연현상을 예언할 수 있다. 말씀이 잘 안들리고, 기도 하면 5분도 못하고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불만 많고 짜증나고 비판적이게 되고 하면 그 안에 죄를 짓고 있다는 징조이다. & 그것을 돌이키지 않고 계속 하면 돌이키지 못할 심판이 있을 징조이기도 하다. 그 시대에 나타나는 징조를 잘 관찰하면 된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질문에 (4)와 같이 대답 하셨다. 마지막 때에 지 죄가 무엇인지,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 미혹하고 혼돈하게 된다.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5) 많은 미혹자들이 나타나고, 그 결과는 믾은 사람이 미혹다앟게 되는 것이다. (고후11:14~15) 미혹하는 자, 거짓선지자의 방법이다. 마지막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이단들에게는 특징이 이미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 이단을 다니는 것이다. 이것이 택한 자를 미혹하는 것이다. So 교회 있는 사람이 공격의 대상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요일4:1) 세상에 이미 나와있다. 모든 영들을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했나 영을 분별해야지 된다. 죄를 짓는 것도 마귀에 속한 것잊만, 죄를 지을 때마다 속하고 또 속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고전2:12)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알곡과 쭉정이를 분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십자가 신앙을 가진 사람만 살아나있다. 교회로 청한 받는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택함을 받고 남는 자는 적다고 했다.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이 때 내 믿음을 뿌리를 튼튼히 해놔야 한다. (마7:15) 오직 인격과 삶의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속은 인격이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따를 수 있다. 광명의 천사가 따라 있는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길 원하고 인기있길 바란다. 그것이 거짓선지자들의 모습니다. 대표적으로 매스미디어, 미디어이다. 혹이라도 그런 것들에 미혹되지 않길 바래요.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소극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가장 적극적인 기도가 뭐겠어요? 처음 받은 십자가 신앙을 끝까지 지켜서 세상의 방법이 아닌, 보좌로 올라가는 기도의 권세로 더 큰 세상일 이기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Sunday, January 13, 2019

2019-01-13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라 (시100:3~4)


과거보다 편하고 좋은 것도 있겠지만, 지금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는 등으로 인해 안타까움이 생기게 된다. 성경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는 감사하지 않음이라고 했다. (딤후3:2) 지금 시대의 모습에서 별로 다르다고 것이 없다. 당연히 감사해야 좋은 상황에서 감사함이 없고 불평하고 원망한다. 지금봐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에도 지금보다 각박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게 뭔지 생각해봤다. 세상을 보면 점점 불만스럽고 감사함이 사라지고, 믿음이 사라진다. 물론 세상의 흐름도 살피고 분별도 해야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땅만 보면 안된다. 우리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감사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시편 100편은 감사의 시라고 한다. 말씀을 통해 감사의 예배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은혜가 있길 바래요.

1. 하나님께 드려야 감사 (Thanksgiving to give God)


감사 자체가 예배이고 예배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구나 경험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 감사함으로 나오라고 한다. 단순히 감사를 입술로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사의 제사와 희생의 제사를 의미한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감사하는 것이 오늘 감사의 단어이다. 감사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무엇으로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 (Thanksgiving for his is God)


우리가 은혜를 받고 나면 신앙이 성장한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감사의 깊이도 깊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복과 은혜 때문에 감사한다. 물론 내가 되면 감사하지만, 내가 안되면 불평과 의심이 들어오가 감사하지 않게 된다. 모세시대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감사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음이 사라지고 불평하게 된다. 감사의 이유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면 하나님을 느낄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곁에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 하나님은 아무도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도 말을 들어주신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그것 뿐이예요" 라는 찬양도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가장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모두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에서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핍박과 고난이 와도 믿음을 지키고 순교하기도 했다. 터키에 서머나교회가 있었다. 계시록의 일곱교헤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이다. 여기에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처형하기 전에 "너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했는데, "주님은 한번도 나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라고 하며 화형을 당했다. 하나님은 나를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없다. 감사의 반대는 불평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이기도 한다. 세상의 세력이 들어오면 불평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며 감사하지 않게 된다. 두려움이라는 자체가 영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를 회복하길 바래요.

2)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감사 (Thanksgiving for the Works hi has done)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승리를 감사하길 바래요. 예수님을 이미 우리 모든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뤄놓으신 것을 감사하길 바래요. (16:33)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길 원하고 누리길 원한다, 너희는 환란을 당하나 이미 세상을 이겨놓았다고 말씀하신다. 이미 승리한 싸움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사단은 거짓의 세력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이겼기 때문에 승리가 보장된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것에 감사할 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든지 감사하며 나갈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걸 믿으면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할 있는 것이다. 기도를 안하는 사람은 "내가 기도를 안해서 그렇지 기도 하면 있다"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인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 많거나 할일 많은 사람이 기도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갈급한 마음이 있는 사람, 하나님이 기도를 들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고 바라보길 바래요.

3)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감사 (Thanksgiving for the works hs will accomplish)


믿음의 근거가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을 감사함으로 기다릴 있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있는 것이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향연이 되어서 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바래요. (11:6)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상주시길 원하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언약을 맺으신다. (15:17) 하나님께서 계약을 맺으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홀로 하나님의 횃불이 사이를 지나셔서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의지적으로 이루실 것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우리들에게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우셔서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은 가능케 되실 것이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에도 감사하며 나올 있는 것이다.

2. 궁정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God who leads us into his courts)


그의 문을 지나서 궁정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문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이나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깊은 하나님의 왕궁, 궁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궁정은 하체르라는 히브리어 단어이다. 왕궁에 있는 안뜰이라는 의미이다. 왕궁도 아무나 못들어가지만, 안뜰은 왕이 초대하는 경우에만 들어갈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성전의 안뜰과 같은 곳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은밀하게 가까이 만나길 원하신다. 에스더 또한 마찬가지이다 왕이 조서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일 수도 있다. (에스더4:11) 에스더도 왕을 만나지 못한지가 30일이나 지났다. 왕을 만나려면 왕이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안뜰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밀한 교제를 하길 원하신다.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홀로두지 않고 밤새도록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찾고 계신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것이 많다. 어려운 문제가 너무 많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것이 있는게 그것이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게 있는데, 남들이 부러워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같은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면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다. 세상 문제가 해결되면 더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결혼이 인생의 목표라면, 세상의 성공이 인생의 목표라면 그것이 이뤄지만 더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때론 기도도 하고 하나님을 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But 세상을 영적인 지혜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과 깊은 , 개인적인 친밀함을 갖게 위해서 안뜰로 들어가길 원한다. 세상을 살면 부당한 일이 많지만, 하나님만이 참되신 분이다. 진정한 만족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세상의 것으로 배부른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한 목마름이 없다. 문제가 해결되면 더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 상항 심령을 가진 사람을 찾으신다. (5:4) 성경은 시대 가운데 영적인 사모함, 애통함, 갈급함이 있는 사람을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부족함 없이 육신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것이 즐거워할 것은 아니다. 영적인 애통함이 있는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84:2, 10)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급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래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로 하여금 보좌로 있는 길을 열어두셨다. 자격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전부 하나님의 보좌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면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달리 해야한다. (22:24~25) 시대는 은이 금보다 귀하던 시대이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길 원하는 사람을 초청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정말 삶에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떼어놓길 바래요. 하루 정말 바쁜데 정말 중요한 사람이 나를 만나길 원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일을 미루고 만날 것이다.

(4:8) 우리도 누군가 나를 만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도 사람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도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신다. 사람이 우리가 되길 바래요. 하나님 앞에 나올 감사함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신다. 하나님이 계신 때문에 감사하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우리실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나오길 바래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근심걱정 염려하는 것을 이길 있는 것이다. 궁정에 들어가는 친밀한 은혜가 있길 바래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부담이 아니다.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나오는 것으로 영적인 비밀을 깨닫고, 이전에 알지 못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길 바래요.

2019-01-06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하나님을 이기는 기도 (창세기32:24-33:4)


살다보면 인생에 새로운 일도 있고 위기도 있고 한다. 위기를 많이 겪은 사람은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을 알고 있다. 인생의 위기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시겠다는 사인이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이런 사건, 어려움이 아니면 스스로는 자신을 변화시킬 없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개입시키는 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없는 일이 세상에는 많다. 우리가 있는 일이라고 하면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없는 일에 하나님이 일하게 방법이라고 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특권이다. 위기의 때에 기도마저 없다면 얼마나 낙심할 밖에 없을까요? 어려울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특권이요 힘이다. 세상사람들은 권력, 재물, 힘을 의지하고 살지만, 어느 때가 되면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권력, 재물 등이 있다고 사고, 불치병이 없어지나요?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일할 있는 것도 은혜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있는 일을 있는 조건이다. 문제를 통해 자신이 변화되는 기회로 맞이하길 바래요. 오늘 야곱의 일이 전화위복으로 오히려 복이 것이다.

1. 기도의 동기 (Motivates of prayer)


야곱은 에서로 부터 도망을 쳐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거했고, 많은 돈과 재물을 가지고 부모님이 있는 고향으로 가서 살려고 했을 것이다. but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는 이길 없는 인생 최대의 위기상황이 생겼다. so 가족들을 모두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은 얍복강 앞에서 생사를 걸게 됐다. & 기도가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기로에 기도가 되었다. 씨름을 기도로 비유했다. 우리의 기도의 분량을 달아보시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야곱의 기도의 분량을 달아보면서 계속 상대해주고 기다리신 것이다. 기도는 힘들다고 포기하면 지는것이고, 이길 때까지 인내하며 해야 한다. 기도가 힘들다고, 응답이 안된다고 그만두는 것은 그만둔 자체가 실패하고 지는 것이다. 끝까지 인내하는 것만이 승리하는 것이고 응답받을 있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문제가 너무 절박했기 때문에 기도를 포기할 없었다. 기도 밖에 없다는 사람이 기도를 쉽게 포기할 있겠어요? "기도나 한번 해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기도를 포기할 있는 것이다. 생명을 거는 기도를 통해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생을 거는 정도의 값지불이 되어야지, 그것보다 약해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오랫동안 인생을 살아도 한번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지, 문제를 인생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힘든 것이다. 연초에 한번정도는 생명을 거는 기도를 권면합니다.

2. 기도 방법 (Ways to pray)


기도에 지면 원수인 에서에게 죽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25) 하나님이 이길 없음을 보았다고 했다. 이는 야곱이 기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겠습니까? but 하나님을 이길 있는 비밀스러운 방법을 깨닫길 바래요. 복음서에 이미 예수님이 알려주셨다. (18:5, 7) 재판관을 이기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길 있는 방법을 비유해주셨다. 과부가 원한을 들어달라고 했는데 불의한 재판관은 외면하고 무시하고 들은 척도 안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나고 자존심 상하고 해서 때려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과부는 그럴지라도 밤낮, 시도때도 없이, 수시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니 없이 자신을 위해서 들어준 것이다. 알아들을 자만 들으라고 귀있는 자만 들으라고 비밀스럽게 말씀하신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자체가 하나님을 이길 있는 비밀스러운 기도의 원리인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힘으로는 엄마를 이길 없지만, 원하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하면 없이 괴로워서라도 해주면 누가 이기는건가요? 이런거는 하나님에게 무례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는 것을 말해주신 것이다. 기도의 방법을 새롭게 하길 바래요. 응답 될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길 바래요. 응답 될때까지 기도에 승리해서 기도가 보좌에 올라가는 기도가 되길 바래요.

3. 기도의 응답 (Prayer that s answered)


하나님이 기도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야곱은 이제 씨름을 없다. 더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씨름할 힘조차 없어졌다. 야곱이 기도한 것과는 반대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을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 했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응답해주셨다. 강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이제는 누구와도 싸울 없게 해주셨다. 에서는 옆에 있는데 기도의 응답이 자신을 망하게 하는 응답이었다고 생각했다. 형에게 이제는 죽을 밖에 없다. but 하나님 생각은 야곱의 생각과 다르다. 야곱이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일할 있다. 야곱이 강하면 하나님이 일할 없다. 야곱을 약하게 만드는게 기도의 응답이다. 기도의 원리를 따라 기도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응답 방법이다. (고후12:9) 야곱도 인간적으로 강한 사람이지만, 신약에서는 야곱 못지않게 강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실력도 있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런 바울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하셨다. 강한 것을 자랑하던 바울이 이제는 약한 것을 기뻐하게 됐다. 약할 그리스도께서 일할 있는 조건이 것이다. 야곱은 20 동안 강한 환도뼈를 가지고 많은 재물을 모으고 자신을 믿으며 살아왔다. 억척스럽게 자수성가해서 거부가 성공한 경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못할게 없다. 자수성가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남의 말을 안듣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을 들을 있겠어요? 이런 야곱의 기도는 에서보다 능력있고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자기의 힘으로 이기기 위해서 이런 기도를 했을 것이다. 신앙, 공부, 일도 자기의 힘으로 하기 위해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옛사람의 근성, 속사람의 근성, 자기 자신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야곱도 성공을 했지만 자신의 근성은 바뀌지 않았다. 자수성가가 성공한게 아니고, 오히려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 아내인 라반, 아버지 마저도 야곱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의지하는 환도뼈가 꺽여야지만 바뀐다. 야곱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응답이 아무도 꺽을 없는 환도뼈를 꺽은 것이다. 누가 사람의 자존심, 의를 꺽을 있겠어요?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지, 옛사람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기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이 일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이 은혜인 것이다.

4. 기도의 축복 (Blessing that come through prayer)


부러진 환도뼈를 가지고도 오히려 팔로 하나님을 붙잡았다.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다. 야곱이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낮아진 적은 인생에서 없었다. 환도뼈가 꺽어지니까 한없이 자신을 부인할 밖에 없는 모습이 세상에서는 낮은 모습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좋은 모습이었다.

1)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심 (Changed Jacob's name)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은 몰라서 물었겠어요? 너의 인생이 어떤 인생이냐고 물은 것이다. 성경에서 이름은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 너의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돌아보라는 말씀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하는 야곱의 근성을 보여준다. 야곱은 이름같이 살았다. 경쟁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왔다. 자기 힘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살았고, 자기가 원하는 재물, 아내, 자녀를 얻었다. 수십년 동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줬는데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쌓아왔던 것을 잃을 같은 위기를 주셨는데, 이런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이다. (28) 성경에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름 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꾸시는 것이다. 시몬을 베드로라는 "반석" 삶을 살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서 이스라엘의 인생으로 바꾸겠다는 의미이다. 근본 속성이 바뀌는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사람을 이기는 삶을 살아왔는데, 인생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인생이 것이라는 것이다. 예전처럼 야곱에게 힘을 주셔서 에서를 이기는 방법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면 야곱의 속사람의 인생은 변하지 않는 그대로의 삶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사람, 의는 안꺽여도 되니 이기는 인생이 있도록 기도한다. & 기도했으니 이렇게 되었다는 자기 자랑만 쌓일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근본본을 바꾸려고 하신다. 이제는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이 이기는 인생을 살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게 행복이요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야곱의 인생에서는 안식이 없었고, 험난한 밖에 없었다. 이게 행복인가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힘으로 이기는 삶을 사니 안식이 되는 것이다. (28)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이기는 기도를 통해서만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아무도 나의 근본을 변화시킬 없는 기도에 도전해보길 바래요.

2)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주심 (Changed Esau's eart)


야곱은 자고 일어나니 동네 이름이 브니엘이 되고 많은 것이 바뀐 같지만,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but 자기 자신은 바꼈다. 저는 걸음으로 정면돌파로 에서에게 나갔다. 에서가 야곱을 보더니 달려왔다. 전까지는 죽이려고 달려왔는데, 자기를 죽이려던 형이 동생의 목을 안고 서로 울었다. 어떻게 이해할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에서는 와신상담으로 20 동안 복수심으로 살아왔다. 이걸 어떻게 용서할 있겠어요? 그래서 400명을 데리고 왔어요. 이런 에서가 동생의 목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서로 울었다. 복수심에 형이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주신 것이다. 야곱에게 능력으로 일하셨으면 오히려 피바람이 나는 방법으로 이겼겠죠. 하나님은 에서를 바꾸기 전에 야곱을 먼저 바꾸셨다. 그리고 후에 에서를 바꾸신 것이다. 야곱은 이미 에서와 싸울 능력이 없다. 야곱에게 일어난 것은 자기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이외에는 없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기는 인생을 것이라는 것이다. 자수성가의 삶에는 쉼이 없다.

2019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살길 바래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가 강한 것을 원하는게 아니고 우리가 먼저 꺽이길 원하시는 것이다. 원수의 마음을 바꾸기 전에 먼저 자신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내가 바뀌는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원수의 마음을 바꾸신다. 야곱이 없는 일을 이스라엘이 하게 하시는 것이다. (23:22) 내가 원수를 상대해서 이기게 되면 인생도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말에 순종하면 너의 원수는 내가 상대해주겠다는 것이다. 이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나가는 같아도 자기 한계를 만나면 지금까지 이뤄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이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삶을 살길 바래요.

2019-01-01 (신년예배, 정의호목사님) 보좌로 올라가는 기도 (계8:3~5)







2018-12-30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벧엘로 올라가라 (창35:1~7)


한해 여기 앉아있는 자체가 하나님 은혜이다. 우리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가족, 사회, 회사, 교회 모두 마찬가지이다.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있다. 신뢰할 없는 사람과는 관계가 깨어지게 된다.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할 때는 무슨 약속이든 한다. 빌려준 돈에 대해서는 잊지 않지만, 빌린 돈에 대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잃어버린다. so  관계를 위해서 금전관계는 갖지 않는게 좋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기도하라고 누가 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기도의 자리로 나오기도 한다. so  기도할 약속하고 서원하고 하면서 문제만 해결해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마음이 달라지는데 문제가 있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고, 기도도 서서히 식어지게 된다. & 예배도 5~10 늦어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리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해서 하나님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신뢰와 연관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신뢰관계가 유지된다. 오늘 말씀도 이런 내용이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끊어지게 만든 문제를 정리하고 회개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하나님과 깨어지고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생각해보길 바래요.

1. 하나님의 명령 (Command of God)


에서가 야곱에게 보복하기 위해 오는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이 바로 사건이다. 야곱은 이후 세겜으로 갔다. 사실 야곱은 벧엘로 가야했는데 세겜으로 갔다. 야곱은 사건이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니, 세겜으로 가서 지금까지 모은 물질로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세겜으로 것이다. 곳에서 야곱의 딸은 세겜 남자에게 간음당했다. 야곱의 아들은 동네 남자들에게 복수를 위해 할레를 시키고 죽였다. 사건이 크게 번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이 시작된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을 오래 전에 잊을 없는 생각이 들었다. (1) 30년여년 전의 사건이었다. 나는 잊었는데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구나 하면서 전율이 느껴졌을 것이다. 디나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는 결정적인 말씀이었다.

1) 벧엘에 거하라 (Sattle in Bethel)


정처없이 에서를 도망다닐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없는 위로를 해주셨다. 그때서야 하나님을 만나고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약속했다. (28:20~22) 야곱이 약속을 생생히 기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먹을 떡과 입을 옷만 주시는게 아니고 거부가 되게 하셨다. 야곱이 원하던 것을 하나님은 모두 이뤄주셨다. 안이뤄주신게 없다. 3가지를 서원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서원했다.", "십일조를 드리겠다" 서원했다. 라반문제, 에서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엉뚱한 세겜으로 갔고, 디나사건을 통해서 서원을 깨닫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다가 사건을 통해 돌이키게 하시는게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지, 불행이 아닌 것이다. (30:2) 성경은 서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하신다. 우리의 말은 하면 없어지는게 아니다. 말이 씨가 되고, 뿌리는대로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약속한게 있으면 무시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 어려울 때는 쉽게 말하고 쉽게 서원하고 약속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쉽게 잊는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기다리신다. & 고난, 환란을 통해서라도 돌아오길 원하신다. 까닭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생각해봐야 한다.

2) 재단을 쌓으라 (uild an ater)


벧엘에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재단을 쌓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 올라가는 곳이지, 자신을 위해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은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야곱이 서원한 장소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다.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2:4~5)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시는 분이다. 처음 사랑을 버리면 책망을 받는다고 하셨다. 야곱은 거부가 됐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다. 성공 후에는 자신이 희생한 알지, 어디서 성공으 떨어진지는 모른다. 세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기는 힘든 곳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에 합당한 삶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겜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선택한 자기의 장소이다. 세겜에서 삶이 잠시는 좋았을지 몰라도 열매는 것이다. so 징계는 당시에는 슬프고 힘들어 보이지만, 열매는 것이다. 목사님도 무엇이 나의 벧엘인가를 생각해볼 산에서 기도 은혜를 받고나서 "평생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요즘 바쁜 사역 때문에 말씀과 기도를 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나게 되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처음 만난 했던 것들이 있을 것이다.

2. 야곱의 결단 (3)


뒤늦게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옛날에 극심하게 환난을 당할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과 함께 제단을 쌓을까 하노라 했다. 세겜에 갔던 것을 후회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다. 이것이 야곱의 귀한 마음이다. 환난을 당하고 화내고 깨달은 후에도 대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말씀의 반응에  따라 나온다. 야곱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귀한 마음이다. "우리 이제 벧엘로 알라간다" 모든 공동체에 선포했다. 하나님은 말씀을 무조건 먼저 주시고 일하신다. 가족 전체, 교회 모든 성도 모두가 회개하고 돌이킬 나라, 곳에 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것이다. 벧엘로 가기 위해 정리해야 것을 정리해야 한다.

1) 이방 신상을 버림 (Got rid of the foreign gods)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지 않은 세겜에 있을 때는 다른 신의 영향을 받을 밖에 없다.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산재물로 드리려면 세상 것을 시간이 없을텐데 세겜에 있을 때는 다른 것을 환경일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즐겼던 우상같은 것을 정리해야 벧엘로 올라갈 있는 것이다. 다른 신을 가져가니까 예전 삶이 일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원합니까? 좋은 것만 받길 원합니까? 좋은 것을 받고자 한다고 받는게 아니다. 버릴 것을 버리길 바래요. 10여년 동안 들고 다녔던 우상들을 내년에는 가져가지 않길 바래요.버려야 것이 뭔지 다이어리 앞에 먼저 적고, 그것을 먼저 버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길 바래요.

2) 자신을 정결케


이방 사람과 살면서 더러워진 것을 버리고 가라고 했다. 그들이 했던 부정적인 , 더럽고 불평하고 거짓되고 교만하고 시기, 질투, 혈기의 말을 버려야 한다. 더러운 것들을 회개하고 정결하게 다음에 벧엘로 올라가길 바래요. (4:31~32) 버려야 것을 버려야 새사람이 있다. & 취해야 용서 등을 취해야 한다. 정결한 후에 새해를 있길 바래요.

3) 의복을 바꿈 (Changed clothes)


믿지 않는 세상사람과 같이 살다보면 종교의 영을 얻게 된다. 옷을 입길 바래요. 종교, 민족마다 다른 옷이 있다. 옷은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 so 시대에 유행햐는 패션은 시대의 풍조를 있다. 음란을 부축이는 , 섬뜻함을 조장하는 , 밝은 , 어두운 여러가지 옷들이 있다. 영적으로 정결한 사람은 정결한 옷을 입는다. 자기가 맞지 않는 옷은 입지 않는다. (7:13~14) 하나님은 입어야 옷과 입지 말아야 옷을 정해주신다. 직분을 따라도 구분하고 사라을 따라도 구분한다. 가장 좋은 옷은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진 옷이라고 했다. 아무 옷이나 값이 싸다고 입는게 아니다. 야곱이 말을 했을 마음으로 순종했다. & 자기 손에 있는 이방신상과 귀걸이를 내려놨고, 세겜 근체에 나무에 묻었다. 이것들은 세겜에 놓고 와야지, 벧엘로 가져가면 안된다. 2018년에 가진 것은 2018년에 묻어두길 바래요.

3. 서원한 것을 지킴


방해와 값지불,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서원한 것을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야곱도 마찬가지다. 주위 많은 민족들이 보복할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작은 야곱의 가족이 동맹군이 공격해오면 망할 밖에 없는 것이다. but 야곱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갔다. (5) 하나님은 아예 추격해오는 사람이 없도록 원천봉쇄 했다. 우리 인생에서 걱정할 때문에 서원한 것을 하지도 못할 뿐더러 아무것도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막아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묻을거 묻고 씻을거 씻고 갈아입을거 갈아입고 경찰대 신년예배 오길 바래요. 하나님은 준비를 하고 있는지 보길 원하신다. 벧엘에 올라가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장소는 (7) 원래 루세였고, 벧엘로 바꼈고, 엘벧엘이라고 다시 바꼈다. 이룰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내가 지금 거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먼저 보길 바래요. 세겜인지 벧엘인지 하나일 것이다. 벧엘은 하나님과 약속한 곳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이다. 누구나 벧엘은 있을 것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서 벧엘에서 재단을 쌓는 인생이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