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29, 2017

2017-09-29 (금요철야 김민성전도사님) 모리아로 올라가라 (창세기22:1~14)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관심이 많으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어제는 요구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요구하는게 있을 수 있고, 어제는 작은 것을 요구할 수 있지만 오늘은 큰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인격을 주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길은 세상의 사람들이 번접할 수 없는 믿음이 있다. 자기의 믿음만큼 간증, 성령의 인격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리아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체험하길 바래요.

1. 모리아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모리아로 부르기 전에 특별한 부르심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도록 아이가 없었고, 아내는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이때 하나님은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지만 아들을 준다는 확실한 약속이 있었다. 아들을 주겠다는 확실한 약속으로 갔지만, 오늘 모리아로 가는 것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두번째 부르심은 첫번째 부르심에 비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인생에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부르심 뿐만 아니라 생명을 번제로 드리라는 부르심도 있다. 이렇게 모리아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강력한 인격과 능력을 부어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2. 모리아의 하나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으로 가라고 명령하기 전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1) 아내가 가능성 없다고 해서 시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이스마엘이었다. 그 후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다. 그 후 내 쫒으라고 하셨고, 이 집에는 오직 이삭만 남았다. 그 후 하나님은 테스트 하길 원하셨다.

1) 이삭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에 가서 죽이고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것이다. (2) 너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신 것이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 것이다.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한 아들인지 하나님도 알고 계시는데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내 중심을 보고 테스트 하길 원하시면 이렇게 하신다. 이제 하나님보다 더 우상시 하는게 있으면 하나님이 불편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신들은 내가 마음대로 해도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불편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이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달라고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아브리함은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이 정하신 모리아 땅으로 간다. 아브라함은 단지 아들을 얻는 믿음에 머무르지 않고, 드리는 것까지도 믿음으로 준비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하나님을 꾸준히 초청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가자고 하는 땅, 원하시는 땅 모리아로 가는 믿음의 결단이 있는 밤이 되길 원해요.

2) 온전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3일은 아브라함의 중심을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4) 세상이 볼 때는 3일은 하나님의 믿음과 생명이 역사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이 길은 가신의 가장 귀한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길이다. 혼자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길이다. 사흘길을 가는 동안 뽑힐 사람은 뽑힐 것이고, 굳건히 가는 사람은 열매를 가질 것이다. (5) 아브라함이 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번제에 쓸 뗄감을 준비한 것은 모리아산에서 번제를 드리기 위함이다. (6) 아들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죽음 앞에서 당당한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


종들이 방해할까봐 아래 두고 왔는데 번제는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바로 너라고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포기하고 밑으로 내려간게 아니다. (8) 번제할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확신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남은게 없다. 인간적인 소망이 사라질 그 때 하나님이 친히 쓸 번제를 친히 준비하시는 것이다. 모리아의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다. so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다. 하나님은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중심을 달아볼 때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해하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때가 되면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래요. 하나님은 세밀하게 체크하시고 세밀하게 보길 원하시는 것이다. (12)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 인정하는데까지 준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3. 모리아의 승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열매를 보기위해 부르신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위를 바라보니 숫양 한마리가 뿔이 걸려서 있었다. 믿음있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숫양을 볼 때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나에게 관심있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대하는지 봐야 한다. 오늘 자신에게 가장 귀한 독자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특별히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래요. 자기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자녀를 위해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하나님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간 사람만이 육신의 눈, 영적인 눈이 벗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리아로 보낼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분인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믿음의 훈련을 시킨 후에는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모리아로 가는 땅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번제로 드리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믿으시길 바래요.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기쁨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하나님을 믿길 바래요.

Sunday, September 24, 2017

2017-09-24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2:5~8)

성경 말씀을 들으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말씀을 계시라고 한다. 읽을수는 있지만 이해되고 믿어지지 않으면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성령님이 나타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마음을 품고 이 땅에 오셨는지 말씀하고 있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느껴지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지식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누군가 대화를 하는데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 이해는 되는데 전달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요17:3) 영생이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만나서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한번 만난다고 해서 알 수 있습니까? 몇십년을 같이 산 부부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믿는다는 것이 다른다. 믿음, 영적 성숙 등에 따라 다르다.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만 마음은 다 다를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주님께 나오는지, 사는지 날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신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예수님의 생각, 영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영의 생각을 하길 원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문제는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다. 말씀을 읽는다고 해서 생각이 바뀌나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영적인 능력인 것이다. 은혜를 경험하면 생각이 바뀐다. 동역자가 똑같은 사람인데 예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영이 바뀌지 않으면 동역자를 모두 뜯어고쳐서 바꾸고 싶다. (롬8:5~6) 아무리 그 사람의 지혜가 열심히 생각을 해도 결국 그 사람은 육신을 따라 한다. 성령의 생각과 영으로 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이 있다. 나의 영의 변화가 일어나서 생각이 바뀌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늘 말씀도 많이 들어봤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영으로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 근본을 바꿀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내 인생의 라이프스타일, 생각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나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영적인 근본적인 변화, 영이 변화되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예수님의 마음이 되길 바래요.

1. 자신을 비우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다 비우고 이곳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 자신을 비우고 이땅에 오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다. 외국사람은 외국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인 것처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등에 날개가 있었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다. 말씀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써의 권위, 권세를 전혀 보이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우고 오셨다. (이사야53:2) 가장 높으신 예수님은 높임 받을만한 권리를 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영광스런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오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오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 자아에 내게 있다. 내 자아의 중심에 내가 주인이 되어가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다. (고후10:5)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내 마음의 보좌, 중심이 된 그 자리를 내어드리고 예수님꼐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라도 내가 주인이고, 내가 싫으면 나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에서 하나님과 협상하고 따지고 말씀을 판단한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나의 권리, 인권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리를 포기하셨다.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서서 심판 받아야 할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주장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자신을 다 버리셨다. 정말 우리가 은혜 받았다면 예수님을 위해 못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변명꺼리가 있다. 내가 나의 인생에 주인인데 하나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 마음의 중심에 내가 왕인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 앞에 내 자리를 비워드리고 내 자리를 내어드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영에 속한 사람인지 육에 속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만약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방법대로 섬기고자 한다면 인정되지 않는다. 주님 앞에 나의 의, 나의 자존심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높이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까? 섬기는 척만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낮아지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아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고통스럽다.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비울 수 있는게 능력인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이것이 윤리,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해도 낮아질 수 없는 것이다. 죄의 세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정과 육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길 바래요.

2. 종의 마음을 가지심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말합니다. (눅22:27) 예수님은 섬기는 잘 이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목수의 아들로 오셨지만 왜 내가 목수의 일을 해야하는지, 빨리 사역을 시작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목수의 일은 하셨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다. 어떤 모습을 하던지, 때론 거지의 모습을 하더라도 왕은 왕이다. 예수님을 믿고 날마다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내 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래요. 예수를 믿으면 능력을 갖길 원하는데, 예수님의 능력이 뭔가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을 수 있는게 능력이다. 세상은 반대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낮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 사람들이 다투고 싸우는 이유가 빌립보 교회에서 분리와 다툼이 있어서이다. 예수님은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당시 바리새인과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나와 같은 모습으로 한없이 낮아지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와 같이 힘들면 힘들고 지치면 지치고 나와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오셨다.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를 예수님은 어리석게 만드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반대로 내 마음을 겸손히 낮추시는 자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셨다.

3. 십자가에 죽으심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셨다. (8) 십자가에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정도였다. 당시 로마 시민들에게는 십자가의 형벌을 내리지 않고 외국인이나 노예들에게 하는 최고의 형벌이고, 유대인에게는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제일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내가 예수님을 섬기는 이유는 내가 언젠가 높아지기 위해서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길 원하느냐 교회에서 영광받고 인정받길 원하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광받는 삶이 아니고 이 땅에서 영광받고 높아지길 원한다. 예수님은 겸손히 낮아지는 이 모습을 기뻐하셨다. (마11:29) 멍애라는 것은 두마리의 소가 같이 땅을 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와 같이 멍에를 매고 배우라고 하셨다. 21세기 사람들의 관점에서 믿음, 누군가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했더니 비난받는다. 역사에서 보면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왕들은 제일먼저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것이 이 세상의 왕들의 모습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종으로 오셨다. &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다. (막15:16~19)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은 멸시한다. 십자가를 피할 수 있지만 끝까지 십자가를 감당하셨다. (시22:14)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상하고 깨어지셨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내가 왕이 되려고 한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딤후2:11~12) 내가 내 마음의 중심에 살아가면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도 우리를 부인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는 삶을 살 때 하늘나라에서 보화로 살아갈 줄 믿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높아지고 내가 드러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 열정,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일 것이다. 신앙을 오래 하긴 하지만 변화가 없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일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품으시길 바래요. 나의 인간적은 것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나의 의를 입혀주신다.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길 바래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섬길 때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영광스러운 복이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Friday, September 22, 2017

2017-09-22 (금요철야, 송경훈강도사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행2:42~47)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밥도 누군가 농사를 짓고 마트까지 운송하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밥을 쉽게 먹을 수 있다. 사람들은 함께 해야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듯이 신앙도 혼자 할 수 없다. 함께 해야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을 한다. 한자어로 가르침이 있는 모임이란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악한 영을 물리치고 병자를 치유하셨다. 본문 2장은 성령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모였다고 했다. 선택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일으킨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몇 안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이전에 체험하지 못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다. & 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을 통해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는 분명한 목적과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를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어떤 것을 이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변화되는지를 교제하는 곳이다.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


지도자가 없으면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 같을 것이다. 교회도 성도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도자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셨다. 성경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셨다. (갈6:6) 교회 안에는 이렇듯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받는 자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배우고 가르치는 학습의 의미는 아니다. 교회 안에서 의무와 권리로 신앙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머리라는 권위 아래서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 좋은 것은데 모든 좋은 것이라고 한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와 리더와 함께 좋은 것을 나누는 것보다 나쁜 것을 많이 나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된다. 듣는 것은 좋긴 하지만, 좋은 것도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히13:17)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도록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권위는 사람들 앞에 실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인도한다. 그 지도자를 통해 깨닫고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따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할 수 있는게 얼마나 기쁨인지 알아야 한다. 생명의 말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신앙할 때 안전하게 보호받는 놀라운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교회 다니면 잘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되려면 교회 안에 선포된 말씀을 순종하고 십자가를 따라야 한다. 말씀을 듣기 때문에 지혜가 생기고 변화가 되는 것이다. 우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지도자의 가르침과 말씀이 있다.

1) 서로 교제하며 떡을 뗌


기독교 신앙에서 교제를 빼면 할게 별로 없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교제 역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교제는 코이노니아다.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세상 소식이나 넋두리가 교제는 아니다. 교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셨다. (고전1:9) 주님이 초청하는 교제는 거부하고 세상과 친밀한 교제를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가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친구로 오시는 것이다. (요일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에는 능력이 있다. 함께 떡을 뗀다는 것이 아무하고나 떡을 뗄 수 없는 것이다. 나와 친밀한 사람, 관계가 있는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귀한 곳에서 떡을 뗄 수 있는 것이다.

2) 기도에 힘씀


떡을 떼는 것에 만족하는게 아니고, 기도가 있다. 기도의 삶이 없으면 안된다.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말이 너무 많이 나온다. & 예수님 조차도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셨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일은 이 세상에서의 물리적인 일을 초월하는 것이다. 크도 놀라운 비밀스러운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도 기도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공식은 기도하라는 것이다. (막14:37) 육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때 임하신다. (요14:14) 기도할 때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예수님이 이뤄주시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도할 때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힘들게 일할 때 힘들게 살든지, 기도하고 예수님의 놀라운 일로 살건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요16:24) 육신이 연약해서, 이런저런 방해로 기도하지 못했다면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할 때 주시는 것을 받는 기쁨이 있다. 그것도 좋지만 기도하는 것 자체로 기쁨이 있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기도할 때 응답받는 것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이 더 귀하고 감사한 것을 기도하는 자는 안다.

2. 공동체 삶


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사도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1) 서로 통용함


통용한다는 것은 동정의 의미가 아니고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함께 나눴다는 것이다. 함께하는 나눔이 있었다. 현대 교회는 이런 나눔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구원의 은혜로 인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자발적인 모임이 이뤄졌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이다. (행20:35)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다. 우리도 구원의 은혜를 거저 받았다. 오히려 새가족이 은혜받으면 기존 성도들보다 더 섬긴다. 지난 신앙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꼐 갚지불을 얼마나 했는지 생각해보시길 바래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받다보니 당연시 여기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감사의 갚지불이 없다면 하나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계속 나도는 불확실성 속에서 믿음의 신앙을 하고 지겹고 피곤한 인생에서 감사와 은혜있는 삶을 사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2) 마음을 같이 함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쉬운건 아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같아지는 것이다. 이게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같아지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서로 이해하고 섬기고 같이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없다면 그리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서도 분열되고 나뉘는 것이다. 늘 같이 있는데 재미있고 즐겁다. 놀라운 공동체이다. 이런 기쁨과 감사함이 초대교회에 있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면서 모이기에 힘쓰는 공동체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심


역동성이 있어야 교회다. 편하게 안식만 얻기 위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영혼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사실 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초대교회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서 회개하고 부흥하고 자발적으로 모여서 공동체가 생겼다. 그 안에서 넘치는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46) 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대교회는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이뤄지길 바래요. 컴 가운데 놀라운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Sunday, September 17, 2017

2017-09-17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무슨 권위인가? (마21:23~27)

시대가 갈수록 악해진다. 절대진리와 절대권위가 무너지는 사회이다. 개인, 집단, 계층간에 많은 충돌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상극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같이할 수 없는 것처럼 배타적인 상극관계이다. 빛에 속한 하나님나라와 어둠에 속한 사단의 나라이다. 자신이 순종하는 권위에 모든 사람이 속한다. 중간지대는 없다. 의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속하게 되고, 죄에 순종하면 사단에 속한다. 항상 둘은 대적관계, 긴장관계이다. 오늘 본문도 성전에 예수님이 들어갈 때마다 충돌사건이 일어난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다. 성전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종교의 권위를 가진 종교인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1. 권위의 근원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마다 종교인들이 항상 고소꺼리를 찾는다. 이 사건에서도 종교인들이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고, 누구로부터 받은 권위냐?"고 물었다. 자신들은 권위를 주신 적이 없는데 무슨 권위로 하냐?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역으로 물어보신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고, 대답하지 않으면 나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종교인들은 세례요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례요한은 주의길을 예비하기 위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간 사람이다. 이들은 세례요한을 인정하면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으로 회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무서워서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사람은 두려워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세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게 권위의 차이다. 목사, 장로, 권사의 지위는 기관에서 줄 수 있다. 세례요한은 공적인 지위를 받은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직접 부르셔서 광야에서 훈련시키셨다. & 요단강에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다. 하지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공적인 직분은 있었지만 아무 일이나 능력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게 나타난 것이다. 이게 제도권의 권위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위의 차이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알고 기관에서 받은 권위와 다르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막1:22) 서람들이 서기관들이 권위가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서가관들은 백성들도 받던 말씀과 회개를 정작 받지 못한다.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요일4:5~6) 강단에서도 세상적인 말, 인간적인 말을 전하면 그 말에 은혜받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은혜 받겠지만, 반면에 영적인 사람들은 떠나갈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의 말은 듣지만 하나님 말씀은 듣지 못한다. 영의 세상에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밖에 없다.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못알아듣는지를 통해 어디에 속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영의 문제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말에 감동을 받는다. 하나님에 속한 사람은 영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만 은혜받는 것이다. 스데반이 죽기 전에 명설교를 했다. 종교인들은 그 말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이를 갈며 결국 스데반을 죽인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이 좋고 어떤 말에 은혜 받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자세의 문제이다. 사람의 감동의 말씀을 전하면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다. 전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개하는데,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회개하지 않고 세례받지 않는다. 종교가 얼마나 무서운지 나타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고 회개하는 자리에서 회개하지 못하고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요? 다 은혜받는 그 곳에서 왜 은혜를 못받겠어요? (요8:43~45) 사단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자이다.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속에는 악한 마귀의 영이 있었던 것이다. 2천년 전에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같은 말씀을 듣고도 반응은 다 다르다. 항상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곳은 항상 알곡만 있는게 아니고 쭉정이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어둠의 권세에 속하게 된다. 은밀하게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권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성전 안에 있으면서 영적으로 충돌하고 권위에 들어오지 못하겠습니까? (요3:19~21)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빛가운데 드러내지 못해서 교제를 못하고 항상 베일에 가려져있는 것이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사귐이 있고 교제가 된다. 죄를 가진 자는 감추기 위해서 교제를 두려워한다. 십자가의 권세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항상 드러내려고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백성들은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힘들었지만 전했다. 하지만 거짓선지자인 하나냐는 하나님이 돕는다고 거짓을 말했다. &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돌을 던졌다. 영적 전투의 실태이다. (고후11:14~15) 어느시대나 그 시대에 기득권을 가진 의의 옷을 입은 사단의 세력의 반복이 역사다. 내가 어디서 나온 권위로 하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권위에 속했는지, 세상의 말을 듣는지 체크해봐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 안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속해야 한다.

2. 권위의 시행


하나님이 권위를 나타내는 방법이 말씀이다. 하지만 제도권에서도 권위를 만든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운 율법으로 권위를 만든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도 자기들이 세운 권위와 다르기 때문에 핍박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율법과 권위만 가질 수 밖에 없어서 부딪칠 수 밖에 없다. 말씀, 진리를 던져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어둠에 속한 사람과 빛에 속한 사람이 항상 충돌한다. (갈4:29~30) 늘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같이 유업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내어 쫒으라고 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교회만이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를 막는 곳이다. & 회개를 거부하고 변화되지 않으면 그 곳에 있을수가 없는 것이다. 강력하게 성령이 역사하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은 다 떠나게 되어있다. 세례요한이 오기 전 400여년동안은 선지자가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그 후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나타나서 성령의 역사가 임하니 종교인들은 대적하는 것이다. (요일2:18~19) 성전 안에 있다고 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와 교제가 된다. 빛에 속하지 않는 자는 결국 우리를 떠난다. 우리가 교회로 불러주신 것이다. 처음부터 빛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빛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로들은 먼저 불러주셨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엡5:7~8) 누구든지 교회 안에 들어온 이상 빛가운데 나와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나오길 바래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받으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길 바래요. 빛의 자녀로 하나님 안에서 살길 바래요.

Saturday, September 16, 2017

2017-07-15 (금요철야 방글라데시 정익모선교사님) (눅5:1~11)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는 능력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찾은게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럼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 것이다.

방글라데시를 가게 된 이유가 2가지가 있었다. 89년도에 방글라데시로 단기선교를 갔다. 나라의 2/3이 물에 잠기게 된 사건이 88년도에 있었다. 공항에 새벽에 도착했는데 1다카(한국돈 20원정도)를 구걸하기 위해 200여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 사건이 마음에 도전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신약성경을 일부 무슬림은 사려고 한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무슬림 이맘(선생님)이 찾아와서 팔지말라고 했다. 죽인다고 했는데(방글라데시 말로) 알아듣지 못하고 팔았고, 당시 선교사님이 도망가자고 해서 도망갔다. 그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한국에 돌아와서 고민하게 됐다. 방글라데시 갈 때 후원하는 교회가 없어도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결정은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을 가는 것이다. 아무골짝 빈들에도 가오리다는 찬양이 들렸다. 내가 기뻐하는데 왜 고민하냐고 하셨다. 정확하게 말씀에 순종만 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다. & 그해 12월에 방글라데시로 떠난 것이다.

Sunday, September 10, 2017

2017-09-10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기도의 핵심요소 (마21:18~22)

가을학기에는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실제 기도를 하면 많은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불치병이 치유되고, 회개를 통해 영적인 회복이 일어난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의 어려움은 그것을 끝까지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기도를 계속 못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못할만한 이유는 많다. 어떤 사람은 직장, 자녀문제로 기도하던 사람이 안보이는 것은 그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기도를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기뻐하는 것보다는 문제해결 수준으로 기도를 보는 수준이다. 좋은 기도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응답이 안되서 지치고 힘들어져서이다. 응답이 안되서 하나님께 실망이 되서 기도를 포기했다고 하지만, 응답이 되기 전에 기도를 포기한 것이다. 이 사람이 실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기대하던 하나님이 오히려 더 실망할 것이다. 다른 경우는 방해를 이기지 못해서 기도가 중단된 것이다. 몸살, 아이가 아픔, 직장일이 많은 것 등의 여러가지 일이다. 마음은 있으나 육신이 연약해서 방해를 이기지 못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날수록 방해도 크다. 기도는 영적인 전투다. 어떤 사람이든 기도가 쉬운 사람이 없다. 기도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모든 과정에서 이기고 끝까지 승리하는 사람만이 기도에 승리하는 것이다. 기도를 못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결국 진 것이다. 이유에 진게 아니고 사단에게 진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100% 다 이기셨고, 100% 다 응답됐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면 우리에게도 응답이 되는 것이다. 이번 가을학기는 기도의 돌파가 일어날 수 있도록 축복합니다.

1. 무화과나무의 심판


잎이 너무 무성해서 열매가 있는줄 알고 갔는데 열매가 없었다. 그때 제자들이 모두 있는데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무화과나무는 즉시 말랐다. 이 나무는 예수님이 찾으실 때 열매가 없었다. 하지만 잎만 무성해서 가증해서 심판하셨다. 종교인들을 심판하겠다는 예언적인 행동이었다. 봉사, 구제는 많이 하고 자신의 인격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사람 앞에 좋은 직분은 다 가지고 한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무엇을 체크해야 하는가를 봐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열매를 요구하신다. 영혼구원의 열매, 내 안에 새사람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요구하신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시지,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 찬양의 가락이나 멜로디를 보지 않으시고 찬양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심을 보신다. 내면에 열매가 있는 보여드릴 것이 있는 자가 승리자이다.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되지 않길 바래요.

2. 기도 응답의 원리


예수님은 기도하는 즉시 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오늘부터 기도할 때 내 기도를 다시 체크해보시고, 새롭게 적립하는 기회가 되길 바래요.

1) 하나님에 대한 믿음


내 기도 자체가 능력이 있는게 아니다.  내 기도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 기도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도는 우상이다. (막11:22~24)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지 안믿는지 먼저 보길 바래요. 믿음이 없다면 그 믿음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안믿어진다? 그럼 기도를 왜 하나요? 이런 조건이 되어야 기도가 된다. 기도의 근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전능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래요. & 일단 기도했으면 받은줄 믿어야 한다. 응답이 없다면 이 문제가 없는지 체크해보길 바래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나에게 어떤 반응을 하시는지 그 자체를 믿어야 한다. (마7:11) 기도할 때 주시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주시는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게 안믿어지면 기도하다가 상처받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실 것과 듣는 것을 믿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믿길 바래요. 예수님은 항상 그런 기도를 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마다 항상 믿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11:42~43) 죽어서 썩은 나사로를 살릴 때 하셨다. 또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믿으시는 것이다. & 믿음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나사로가 나온 것이다. 이번에 기도의 문제를 돌파하길 바래요. 믿음이 들어오면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내 안에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반응이 오는 것이다. 내 몸에 질병이 심각해도 기도할 때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오면 이미 치유된 것이다.
또 다른 경우 내가 구한 것과 다른 결과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so 지금 이 일이 나는 깨닫지 못하지만 나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 

2) 의심하지 않음


기도는 영적 전투이다. 의심과 이겨야 한다. 믿음의 기도의 최대 방해는 의심이다. 사단의 불화살이 의심인데, 기도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면서 내 마음이 요동친다. 우리의 영혼이 소용돌이 치게 하는 것이다. 최대 난제는 의심과의 싸움이다. (약1:6~7) 의심이 들어오면 그 기도는 이미 패배하고 무너진 것이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의심이 들어오면 사단의 공격에 가졌던 내 믿음이 빼앗긴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하는 자에게 일을 하지 않으신다. (히3:12) 악한 마음에 정복된 것이다. 의심이 들어온 사람은 기도의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사단이 준 악한 마음에 이미 포기한 것이다. 의심의 악한 마음이 들어오면 신앙의 기초, 믿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믿음있는 사람은 이상해보일 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보시고 일하신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라는 것을 믿음으로 걸어간 것이다. 근데 잘 걷다가 바람이 불었다. 이게 의심이다. 바람 불면 빠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물에 빠진 것이다. 이게 믿음과 의심의 차이는 바람 하나의 차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놀라운 일을 순식간에 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을 빼앗는 것이 세상이다. 미디어, 인터넷 등에서 세상의 정보를 취하면서 교회에서 받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의심을 무너뜨리려면 세상과 싸워야 한다. 세상과 접하는 시간보다 하나님을 접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 (엡6:16~17) 사단이 아무리 의심하게 해도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믿음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구원의 투구와 하나님 말씀이 사단을 이길 수 있는 공격무기이다. 사단을 이기려면 믿음이 강해야 한다. 믿음을 강하게 하려면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길 바래요. 기도가 안될 때 내가 믿음으로 했는가? 의심하지 않는가? 체크해보길 바래요.

3) 말로 선포함 (21)


말로 선포해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 형상으로 지으셨지만, 생각으로 창조하셨다. 하늘이 있으라 선포하니 하늘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말의 권세도 동일하게 주셨다. 다만 2가지 조건이 될 때 그게 되는 것이다. 선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믿음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안될것이라는 의심 때문에 법화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암세포가 있다면 떠나라는 믿음의 선포로 떠나는 것이다. 의심은 우리 믿음의 선포를 무력화시킨다. 저주를 하면 저주의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의 선포는 축복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도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은줄 믿고 기도하길 바래요. 어떤 문제도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선포하면 이뤄지는 것을 믿길 바래요. 한번 해보시길 바래요. 응답될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Sunday, September 3, 2017

2017-09-03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섬김 (눅10:38~42)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그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섬기고 돕고싶지만,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마음껏 섬기기가 어렵다.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법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심심할까봐 계속 대화를 거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도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을 깊이 알면 예수님을 섬길 수 있다. 이것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오늘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서 이왕이면 예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을 행하길 바래요.

1. 예수님을 영접한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님께서 한 마을을 지날 때 두 사람의 집에 들렀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다. 신앙을 하면서 어떤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가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관점은 많이 다르다. 처음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섬겼는가가 중요하다.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지 관심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아무나 쓰지 않는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는 선한 사람, 그리고 이것들을 가치있게 느끼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 남을 괴롭히는 악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악인도 적당하게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받으셔서 귀하게 쓰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작은 것을 섬기면 빼앗기지 않는다. (마10:41~42)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를 섬기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초대해서 섬기는 이 일을 자세히 말한다. 동생 나사로가 죽은 일에서 살리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기뻐서 감사와 사랑과 기쁨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길 바래요. 많이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은 것을 요구한다고 말씀하신다. (눅12:48)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2. 마르다의 섬김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는데, 먼저는 마르다가 어떻게 섬기는지를 말한다.

1) 많은 것을 계획함


아마 예수님과 제자들이 편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준비했을 것이다. 마르다가 맛있게 식사를 대접한 것은 잘못한게 아니다. 하지만 이게 문제라는게 아니고, 더 성숙하게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줄 믿습니다. 내가 계획한 일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내가 좋아하는 방법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쁜 일을 할때만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행16:6~10) 사도바울은 터키 땅에서 아시아로 나가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령이 계속 막는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사도바울은 아시아에 열심히 교회를 세우고 싶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유럽의 마게도냐로 떠나길 원한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유럽에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자기 계획을 변경해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간 것이다. 결국 내가 원하고 생각한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것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잠16:9) 내가 계획할 지라도 우리 길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걸 믿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줄 믿습니다. 내 계획이 좋은 계획일지라도 주님 앞에 내려놓을 줄 알길 바래요.

2) 마음이 분주함


분명히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일이 안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어려워진다. 예수님을 초대했으면서도 일 자체에 마음을 다 빼앗겨서 분주하고 나중에 가서는 마리아를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다는 기뻐할 수 없다.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피해의식,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하다가 일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잠16:32)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상황에서 오는 것을 다스리고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근심하고 걱정한다. 많은 일에는 근심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영성보다 큰 일을 하려고 하니 어려워지는 것이다. 나의 믿음, 영성보다 큰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일로 인해 힘들어지고 어려워진다. 주님을 섬길만한 믿음과 영성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수준에 맞는 일만 맡길 바라고, 기도의 집이 회복되길 바래요. (고전10:23) 우리 마음에 어떤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내 마음이 곤고할 수 있다. 분주한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오시길 바래요.

3) 불평, 원망하게 됨


보여지는 일, 많은 일을 하는동안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마르다의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면 할수록 불평, 불만이 생기고 시기, 질투,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하라고 부탁한게 아니다. 하지만 자기 힘에 붙이는 일을 하다가 마음이 어려워진 것이다.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일,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가지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다.

3. 마리아의 섬김


이 말씀을 오해하면 혹시나 모든 부서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안되겠다고 하고, "나는 마르다야"라고 자책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염려된다.

1) 예수님께 귀를 기울임


마리아가 주님을 섬길 때 잘한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예수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께 집중한 것이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집에 쉬려고 왔는데, 마리아 때문에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쉬기위한 예수님께 계속 말을 거는 것은 실례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곳에 올 때 단순히 먹고 쉬기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먼저 파악하려고 노력하길 바래요.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다른 교회가 하는대로 따라가는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일주일동안 많은 일을 하면서 주님께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많은 일을 해야하는데 하는 말은 세상이 하는 말이다. 노아가 한 일은 온 인류를 구하기 위해 대단한 일을 한게 아니다. 노아가 창의적인 계획을 세우고 연구한게 아니다. 하나님꼐 귀기울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만 한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길 바래요. (대상12:32) 이러한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쓰임받길 바래요.

2) 예수님과 동역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 마리아는 쓰임을 받았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동역을 한 것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일할 수 있도록 동역한 것이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에 성공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하는 일에 따라가는게 도 중요하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동역자가 된다면 쓰임 받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택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일에 귀기울일 수 있도록 섬기는게 동역인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면 동역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깨어서 동역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쓰실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위로를 얻음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감사와 기쁨이 생겨났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것이다. 예수님의 일에 동역하고자 하고 예수님 앞에 있을 때 쓰임받을 것이다. 마리아는 많은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게 된 것이다.  & 하나님이 일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할 수 있는 영적인 일에 쓰임답게 될 것이다. 우리가 큰 일을 하겠다는 소원도 좋지만, 우리의 일과 관점이 하나님 중심으로 쓰임받는다.

한주간 우리 삶에 많은 일을 계획한게 있다면 하나님 말씀에 귀길울이길 바래요. 주님을 기쁘게 하고 영적인 일에 함께 동역하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