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9, 2019

2019-05-19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말을 바꿔라 (마12:33~37)

말이 내 마음과 기분을 결정하기도 한다. 선한 말이 한 사람을 살리기도하고, 나쁜 말은 주변 사람에게 파괴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말 한마디 때문에 때로 원수가 되기도 한다. 독이 되는 말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so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믿길 바래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 내가 하는 말에도 권세가 생기기도 한다. (잠6:2) 우리가 나쁜 말, 부정적인 말에 잡혀 있으면 긍정적인 말을 하기 너무 어렵다. 좋은 말을 하려고 했는데 괜히 말을 했다가 싸울 수도 있다. 좋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말들이 흘러나오게 된다. 내 삶에 영적인 성장이 없고 잘 안풀린다고 한다면 나의 말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나의 부정적인 말이 나를 묶고 있는건 아닌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껴야 할게 있다면 결단하고 바꾸길 바래요. 말 못하는 병자가 예수님으로 인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가지고 다르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힘을 빌렸다고 한다. 요즘은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분별하기 너무 어렵다.

1. 말은 나를 말해준다. Words Reveal Who You are


말이라고 하는 열매로써 그 사람,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33) 말은 각 사람의 실제를 드러내는 열매와도 같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나를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이 말이다. 말이라는 것은 아무리 내가 나를 안드러내려고 해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들은 새로운 인색을 위해 조용히 해야겠다고 하지만, 입이 근질근질 해서 결국 다 드러난다. 내가 무엇을 옳게 여기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잘 드러낸다. 말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바래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바알새불의 힘을 빌러서 하는 것이라고 악하게 말한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지만, 이들이 하는 말을 통해 영적인 상태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은혜가 있으면 감사의 말, 은혜의 말이 나온다. 반면에 반대의 경우에는 나쁜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선한 말을 하게 된다. 내가 누구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고 부정적이게 보느냐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로 나타난다. (요12:49~50) 예수님은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말했다고 하지 않는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대로 전했다고 말한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씀을 해도 변화되지 않는다. 자녀들에게 많은 말을 할수록 좌절하게 된다. 우리 말에는 아무 능력이 없다. 하지만 수련회 한번 갔다와서 변화가 일어난다. so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의 말은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우리 말에 권세가 나타난다. (롬8:13) 말을 염두해두고 이 말씀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육신의 생각대로 말하면 내 영이 죽는다.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세력인 혈기, 미움, 정죄, 판단대로 행동하면 육신의 세력이 강해지고, 내 영이 더 죽고 기도가 잘 안되고 신앙생활이 더 괴롭다. 내 안에 성령이 근심하시고 소멸되기 때문이다. 영으로써 행실을 죽이면 영이 살아난다고 말씀하신다.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한 첫단계로 말을 바꿔야 한다.

2.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Words come out of the Heart


마음에 쌓인 것이 언젠가는 말로 나오게 된다. so 예수님은 말이라는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 말은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과 세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말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말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습관대로 하는 말은 그것이 내 삶에 인격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실수가 아니고 가치관이자 인격이다. 우리의 영과 관련이 있다. 이런것은 말을 바꾸고자 하는데 잘 안된다. 셀에서 "이렇게 살겠습니다"고 선포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격화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말에 무엇을 쌓았는지 봐야 한다. 독과 같은 말이 있다면 버리길 바래요. 교회에서 우리 삶과 마음을 바꾸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가 말을 바꾸는 것이다. 교회 개척기부터 목사님은 입에 청테이프를 붙이라고 하신다. 진짜 붙이라는게 아니고, 나쁜 말을 많이 할 바에는 말을 안하는게 더 낳다. 말을 바꾸려면 말을 쌓는게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쌓느냐가 중요하다. (고전2:4) 사도바울은 뛰어난 설교자였지만, 나의 말과 나의 지혜의 말은 버렸다고 했다. 우리의 삶과 생각도 내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 안에 마음에 쌓여있는 것을 바꾸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굳어진 오래된 것들이 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말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담아서 전할수록 우리의 말에 권세가 나타난다. 내가 하고싶은대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말을 전하길 바래요. 이것을 위해 마음에 담는 것을 바꿔야 하는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담길 바래요. (요6:63)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달갑지 않은 말씀일 수도 있다. 내가 변화되길 원한다면 말이 변화되길 바래요. 예수님의 무서운 말씀이라도 종교인들이 받아들였으면 그들 안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영의 말씀인 것이다. (롬10:17)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이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취해서 나의 말씀으로 받길 바래요. 교회에서 하는 중요한 훈련 중 하나가 말하는 훈련이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신앙은 하지만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불신앙의 말이 있다면 거부해야 한다. 말을 할때나 교제할 때는 비밀을 지킬만한 신뢰가 되는 사람과 교제를 해야한다. 내가 말을 해도 내가 실족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과 교제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실족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말을 들어도 내 수준에 따라 이해하고 해석하는게 다르다. 나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so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말로 나를 채우시길 바래요.

3. 말로 심판을 받는다 By your words you will be judged


(민14:28)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다. 적들의 손에 죽을바에는 광야에서 죽는게 더 낳겠다고 하며 모세에게 불평했다. 그들 스스로 말로 대적하는 일을 했다. 하나님이 주신 상급과 유업이 눈 앞에 있는데 그들의 불평하는 말과 거부하는 말 때문에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말을 고백하길 바래요. 때론 내가 하고싶은 말이 있고 변명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면 안할 수도 있어야 한다. 반면 내가 하고싶지 않은 말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전하길 원하시면 전해야 한다. 이것이 파수꾼의 삶이다. (에스겔33:7) 파수꾼은 적이 오는 것을 알고 권고해야 한다. 리더는 각각 맡기신 셀, 팀 등에 파수꾼으로 세우셨고, 파수꾼의 권위를 주셨다. 파수꾼은 사람들이 듣던지 안듣던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예수님 또한 그들이 듣던지 안듣던지, 그들의 미움을 받을 것을 알면서 경고하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소수의 사람이지만 니고데모라던가 아리마데 사람은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회개를 통해서만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회개와 개혁이 없으면 부흥이 없다. 회개와 개혁 없이 생긴 부흥은 대부분 거짓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안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와 상관 없는 다른 사람의 일을 어림짐작해서 수근거리기도 한다. 때론 나쁜 의도는 없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이야기 하곤 한다. 나의 지위와 권위를 벗어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 교회에 내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 함으로 심판을 쌓을 필요는 없다. 예수님의 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보면 된다. 나의 신앙과 인격 수준 이상의 것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심판을 쌓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는대로 거둔다고 말씀하신다. (갈6:7) 우리가 축복의 말로 심으면 축복을 거두게 되고, 믿음의 말로 심으면 믿음의 역사로 거두게 된다. 나의 인생에 하나님의 말, 믿음의 말로 심길 바래요. 하나님의 믿음의 말씀, 축복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심길 바래요. 기도할 때 믿음을 주시는게 있으면 믿음으로 선포하길 바래요. 아브람과 사래도 이름을 바꿔서 불렀다. 내 안에 불신앙의 세력들을 내 입의 말을 통해 몰아내길 바래요. 육신의 소욕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길 바래요. so 우리가 의지적으로라도 말을 바꿔야 한다. 말을 바꿈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 하길 바래요.

Sunday, May 12, 2019

2019-05-12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남자와 여자의 창조질서 (창세기2:21~24)

지금시대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점점 멀리 나아가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무너지고, 창조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리를 판단 못하게 하고 있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성에 대해서 파괴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괴하고 있다. 동성애 못지 않게 페미니즘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소수의 인권을 가지고 다수의 인권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 세상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아부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세상이 창조원본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 (에스겔33:6) 이 악한 시대가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대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파수꾼의 역할을 하며 알리지 않으면 그 책임을 먼저 묻게 되는 것이다. 듣던지 안듣던지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오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원본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은 상식이다. 변질된 이 시대의 문제를 분별해서 죄를 방관하지 않길 바래요.

1. 창조 순서의 차이 Difference in creation sequence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여자를 창조하셨다. (딤전2:11~14) 성경은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질서를 주셨다. 그 근거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여자가 뱀에게 속아서 온 인류가 죄에 빠지게 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남자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여자라는 성을 지으신 것이다. (고전11:9) 인간은 남자나 여자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을 받은게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각자의 성을 받은 것이다. 성이 중요한게 아니고, 각 성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는게 중요하다.

2. 창조질서의 차이 Difference in creation order


(고전11:3)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는 질서를 세우셨다. &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위에 있는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신 질서이다. 이 질서의 원형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원형이다. 세분은 똑같이 하나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질서를 세우셨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열등감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으신다. 그 권위에 순종하는 본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엡5:22~23) 교회의 머리는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가 예수님께 순종할 책임이 있듯이,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3. 영광의 차이 Difference in glory


각 사람은 자기 머리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고전11:7) 모든 권위와 질서는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머리되신 하나님께만 영광 드리는 일을 하셨다. 똑같은 하나님임이도 불구하고, 자신의 머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 하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능히 내려올 수 있으셨다. but 내려오면 자신의 영광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내려올 수 있었지만 내려오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으셨다. 이것이 세상에 주신 본이다. so 남자는 자신의 머리되신 예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고, 여자는 남편의 영광이 될 때 여자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자기 영광을 받는 자는 하나님 앞에 영광이 없다. 그 질서를 지킬 때 그것이 자신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남자의 머리는 사람이 아니다. (고전11:6) 당시 매춘부 등은 머리를 짧게 깎았다. 하지만 여자의 긴 머리는 이 권위 안에 있다는 표시이다. (고전11:14~15) 반면에 남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은 남자의 머리인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4. 특성의 차이 Difference in characteristics


남자는 독립적인 흙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속한 갈비뼈로 만들었다. 즉, 여자를 만들 때는 남자에게 속하게 만들었다. (고전11:8) 남자는 사람을 대표한다.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남자라는 뜻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성경에서도 남자만 세는 것은 남자가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만든 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특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는 역할과 기능을 달리 해야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대로 살 때 온전한 삶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처럼 되려고 하거나, 여자가 남자처럼 되려고 한다면 고유의 특성이 파괴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이 힘든 것이다. 정상적인 남자와 여자의 모습은 남자는 남자다운 모습이고, 여자는 여자다운 모습인 것이다. 강한 것이 남자의 특성이고, 여자의 뜻은 유순하다는 것이다. 각자 파괴된 자기의 성을 되찾길 바래요.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유언이 "너는 대장부가 되라"고 했는데 번역이 이렇게 되어서 그렇지 원본에는 대장부가 "남자"라는 의미이다. (벧3:3~5) 여자의 성품대로 살라는 것이다. 여자로써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자기를 단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온전한 삶이고, 이것을 거스를수록 자신에게 고통이 있는 것이다.

5. 역할의 차이 Difference in roles


하나님은 아담을 돕는 베필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똑같으면 여자로써 존재가치가 있을까요? 이미 남자가 있는데요. 자기 정체성을 성에서 찾는게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찾아야 한다.

1) 남자의 역할


남자에게는 밖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려 일을 하게 만드셨다. (창3:19)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남자를 이 일 하기에 적당한 재질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남자를 일해서 가정에 경제력을 지키고 가정을 보호고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가정의 머리는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보호하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머리에는 책임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델을 보여줘야 한다. 가정에 남자와 여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모델을 보여줘야 한다.

2) 여자의 역할


(창3:16) 여자에게는 이런 재질과 본성을 주셨다. 남편이 나를 원하길 원하지만, 남자를 이런 재질로 만들지 않으셨다. 여자는 결혼의 목적을 남편의 사랑을 받길 원하는 것이다. so 여자는 절제력을 가지고 순결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게 하셨다. (디도서2:4~5)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선하고 유순함을 주시고 이런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다.

이게 남자와 여자를 다른 역할로 주신 하나님의 질서이다. 자기가 정하는게 아니다. 성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대로 살아야 한다. 사람의 존재는 각자에게 정하신 사명과 역할이 중요하지, 남자냐 여자냐 하는 성으로 가치를 가지려고 하면 힘들어지는 것이다. 자기 소관이 아니고, 자기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위치를 잘 지키고 분량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이다. 특별히 성 대결로 몰아가서 성정체성을 파괴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딤전5:14~15) 아이 낳고 집을 잘 다스려서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사명이다. 사단은 이게 여자의 사명인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여자가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평가는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 인생의 진짜는 하나님나라에서 살 인생인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앞에 주신 말씀에 순종해서 잘 살았느냐 아니냐가 하나님 심판이지, 성별에 따라 상급이나 심판이 아니다. 그래서 남자로 또는 여자로 사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사람을 상대로 살면 속는다. 사람이 나를 심판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대로 분별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분별하길 바래요.

Sunday, May 5, 2019

2019-05-05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하나님의 결혼 원본을 지키자 (창2:21~24)

Let's abide by marriage Prototype of  God''

오늘날에는 가정에 많은 이슈가 있다. 동성애 문제는 한 국가나 개인 차원의 문제에서 세계적인 문제로 발전을 했다. 동성애 문제가 개인의 차원의 문제라면 전세계에 이슈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적인 이슈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권위와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so 원래의 것과 반대로 가고 있다. 흰것을 검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의 원본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 밖에 할 수 없다. 오늘날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원본을 알게 될 때 문제를 할 수 있다. 오늘 이것을 나눠보고자 한다.

1. 인간의 창조목적 Purpose of the creation of Man


핸드폰이나 컵을 만들 때도 목적이 있다. 하나님도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했다. 이것을 인식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만족이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내신 이 창조원리를 찾으며 살 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창조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마치 고장난 기계와 같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정체성을 잃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2. 인간의 사명 Mission of Man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창1:28) 하나님은 우리가 복 받길 원하고 행복하길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세기 말씀과 같이 사는게 복 받게 사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만들 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닯게 만드신 것이다. 특별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한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결혼은 자기들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but 결혼은 자신들의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3. 결혼의 원리 Principle of Marriage


하나님은 첫사람인 남자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라는 사명을 주셨다. and 모든 동물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름을 지어줬다. 하나님은 혼자 감당하는게 보기 좋지 않아서 여자를 만드셨다. (창2:23, 24) 이것이 결혼이다. 남자가 사명을 감당하는데 돕는 베필로 여자를 지은 것이 결혼의 원리이다. 동성애는 이런 창조목적과 사명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자신이 기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동성애자들은 이런 것들과 아무 상관없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1) 남자와 여자가 결혼함 Marriage between Man and Woman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은 남자와 여자이다. 이외에 제3의 성, 제4의 성은 사단이 만든 것이고 이런 것은 없다. 남자의 갈빗대를 떼서 남자를 만든게 아니고 여자를 만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야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so 남자와 남자가 결혼하거나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레18:22) 하나님은 동성간에 성관계는 가증하고 역겨운 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벌이 따른다. (레20:13) 그 죄는 아주 심각하게 다루시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 말씀을 지킬지 말지는 개인의 자유이다. but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어야 한다.

2)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함 (Marriage between One Man and One Woman


아담에게 갈비대 1개만 떼서 여자 1명을 만들었다. 결혼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는 것이다. so 한 남자와 두 여자 또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죄이다. (레20:10) 요즘 간통죄가 없어졌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원본과 떨어지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간음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신 성은 하나님이 주신 원본이지, 자기가 임의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so 동성애는 개인의 성적 취향이나 사회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벗어나는 죄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음란한 성향이 강한 성 중독자인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합법화, 정당화 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나요? 이걸 인정할수록 하나님의 가증하다고 여기시는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인정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합리화 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결과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창4:7)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죄가 없는 사람 없고 완전한 사람도 없다. 가인이 시기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죄를 허락한 것이 아니고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다. 죄의 성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죄를 다스려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 어떤 사람은 혈기가 많아서 다른 사람을 많이 때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도벽이 강해서 게임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향이 있지만 이 성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죄성을 인정하고 해결하고자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도와주신다. (고전6:9~11) 고린도교회 안에도 남색, 음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문란한 교회였다. 이런 사람들도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회복된 것이다. 문란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 만나고 해결함 받은 간증도 너무 많다. 예수님 안에서 해결받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없었으면 해결받지 못할 일들이 거의 없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걸 해결받고 깨끗하게 될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성경은 죄를 지으면 마귀에게 속한다고 하셨다. 마귀로 인해 죄가 확산된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 so 이 문제가 전 세계(지구)적인 문제로 번지고 있다. 마귀와 대적하는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를 모르는 시대에 창조원리를 잘 가르치고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Sunday, April 28, 2019

2019-04-28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칼을 빼어 마주서신 하나님 (수5:13~15)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소원이 있다. 새롭게 되고 변화를 원하지만, 신앙과 삶에서 성장과 변화, 도약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변화를 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변화하는 방법도 지식으로 있다. 하지만 그 값지불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값지불이 없으면 신앙을 하기는 하지만 변화의 열매가 없거나 아주 더딥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변화의 실제가 없고 더 공허하다. 신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다. & 어떤 이는 과거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지만 거기에 안주한다면 더이상의 변화는 없다. 과거의 놀라운 변화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 우리 인생의 비전이든 사명이든 그 일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큰 일을 하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다. but 하나님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준비되길 원하신다. 세상은 남들보다 앞서고자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세상을 이기는 것보다 나를 변화시키는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변화의 계기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1. 여호수아의 질문 Joshua's Question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을 받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이다. 가나안 민족 중에는 골리앗과 같은 아낙자손도 있다. 하나님은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시는데, 군대대장의 모습으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이 보낸 이 군대대장을 보고 "누구의 편이냐?"고 여호수아는 물어본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대장에게 "너를 축복한다", "너가 이기길 원한다"고 듣길 원한다. but "아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대장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러면 내 편이군요"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은 당연히 내 편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군대대장은 아니다, 아군도 적군도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군대대장이니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여호수아 편이라고 생각한다. but 하나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러는데 왜 이러십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이다. 하나님은 한국의 편일까요? 일본 편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이시다. so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내 편이 되어주세요"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내 편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야 한다.

2. 여호수아의 하나님 God of Joshua


여호수아가 만난 하나님은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칼을 빼어 마주서심 Stands in front with a draw sword


하나님의 천사가 가서 전쟁을 끝내시려나보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이 칼은 가나안을 위해 들고 계신게 아니다. 여호수아를 향해 칼을 들고 마주서고 계신다. 여호수아는 가아안은 정복하기 전에 먼저 여호수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개혁과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심판하실 죄의 분량이 찰 때까지 400년을 기다리고, 그 때가 왔다. but 하나님은 단지 육적인 전쟁 뿐만 아니라 영적인 전쟁도 이기길 원하신다. 그 땅에 있는 죄와 어둠의 세력을 심판할만큼 여호수아가 거룩하고 정결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겉으로는 성공하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영적인 승리가 아닐 수 있다. 겉으로는 이기지만 뒤로는 지게 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의 세력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시대에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자기 유익만 취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다. (눅19:45~46)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집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유익만 취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개혁을 칼날을 빼든게 아니고, 성전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부패를 탓하기 전에 우리 안으로부터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도구처럼 쓰지 않으신다. 재능과 능력, 은사만 쓰시지 않는다.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자로 부르셔서 우리의 인격을 쓰신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정결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직진하는 성질이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실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똑같이 은혜를 받기는 받는데 어떤 사람이 받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다른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 앞에 여호수아라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모세를 준비시키신다. 이것을 모르면 좋은 일만 하길 원하고, 훈련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 편에서는 준비된 한 사람이 중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길 바래요. 하나님이 만약 마음이 급하셔서 빨리 일을 끝내고자 했다면 여호수아 전에 모세를 통해 이미 일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40년을 기다리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길 원하시는데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칼날 앞에 서길 바래요. (히4:12) 예배 가운데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길 바래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 하실 때 말씀에 검을 들고 나에게 마주서고 계실 때 나의 마음의 문을 열어서 내 인생에 새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나오길 바래요. 내 인생이 개혁되고 변화되는 과정이 없다면 나에게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 개인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새 일을 행하신다. so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내 삶에 인격이 될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한다.

2) 발에서 신을 벗으라 Take off your sandals


신을 벗는 것은 종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을 나의 인생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내 사명이고 내 비전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도 "그래 너의 비전이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내 인생과 내 비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생과 하나님의 비전이다. 사업, 가정도 하나님의 사업, 하나님의 가정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가정의 가장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자녀에게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가 번 물질이라고, 내 몸뚱이리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익숙한 것들, 습관이 있다면 이것을 버리길 바래요. 새로운 차원의 변화가 있길 원하신다면 이것을 바꿔보길 바래요. 내 인생에 병이 생기면 새로운 식단 등 변화를 결단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에게 익숙한 방법,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결단이 있길 바래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하신다. (삼상2:30b) 다윗이 스스로 왕이 되길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목숨걸고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삶을 존중하신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도 낮게 보신다. 여호수아는 전쟁에 나가서 이기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생을 사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일을 하라고 하시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방법으로 정직하게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꾀와 지혜로 하는 사람이 더 잘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살길 바래요. 말씀대로 여리고성을 돌기만 하지만, 말씀대로 할 때 그 두꺼운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but 그 후 아주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는 크게 패배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는 사람의 죄 때문이다. 여리고성에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취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이 두렵다. 세상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하나님 안에서 순금과 같이 단련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세상은 감당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비춰보시고 새로운 기회가 되길 바래요.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에 대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시간을 관리한다. 우리의 삶에 변화게 되는 실제적인 삶이 되길 바래요. (엡4:13) 나를 개혁하고 내 삶을 개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개혁하는데 쓰임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결단이나 변화가 없다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내 삶을 사건을 통해 개혁하기 이전에 말씀을 통해 변화시키는 것이다. 말씀 앞에 개혁하는 편에 서길 바래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추는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지금의 삶에 안주와 만족하지 말길 바래요.

Sunday, April 21, 2019

2019-04-21 (부활절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부활신앙으로 살라 (고전15:31~34)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만 했다면 다른 종교와 같을 것이다. 죽음에서 모든게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이를 통해 죄를 인한 사망을 이기신 증표이기도 하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다시 사망권세가 주장하지 못하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보장에 부활신앙이고, 믿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승리이다. 죄로 인한 사망을 이기는 것이 부활의 역할이다. (롬6:8~9)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죽은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신앙을 하지 않는다. 십자가 없는 신앙인 것이다. 맨날 십자가만 지고 죽을까요? 다시 죽지 않고 사망이 우리에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종이호랑이 같은 신앙을 하게 된다. 절기를 지키는 부활절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의 부활절이 되길 바래요. 이게 예배와 신앙의 목적인 것이다. 부활신앙을 하게 되면 사망의 권세가 내 삶에 두려움 등을 주지 못할 것을 믿길 바래요. 부활신앙을 하면 어떤 세상 문제와 어려움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어떤 문제도 두려움이 없다. 안다고 주어지는게 아니다. 부활 때문에 죽는 것인데, 부활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헛된 죽음이다. 오늘 이 단계를 벗어나서 땅의 문제에 메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신앙 하길 바래요. 부활은 우리 삶에 최후 승리이다. 부활의 신앙은 최종 열매로 승리의 표이기 떄문에 부활의 신앙까지 올라가길 바래요. 바울의 신앙을 통해 부활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몇가지만 보길 원합니다.

1, 부활 신앙의 삶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신앙이기도 한데, 부활 신앙이기도 한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날마다 죽겠어요? 십자가의 신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서 매일 남들과 싸운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결국 남을 죽이는 신앙을 하게 된다. 가정에서 내가 살려고 하면 온 가족이 죽고, 내가 죽으려고 하면 온 가족이 살게 되는 것이다. 영혼을 도울 때 성경적으로 싸울 때 내가 이기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영혼은 떠나게 된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뭡니까? 영적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의 변화, 인격, 감사가 있습니까? 오히려 남을 시비하고 질투하고 온갖 악한 것이 역사한다. 이것이 남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부활 시 있을 새로운 삶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고전15:42~44) 내가 썩을 것으로 심으면(죽으면)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기 때문에 썩을 것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것 하나 못끊기 때문에 죽어지지 못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부활이 있겠어요? 썩어질 것에는 죽어져야 한다. 부활만 바라니 맨날 허상만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는게 없는데 부활로 살아날 것이 어디 있겠어요? 결혼 안한 여자가 임신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누구나 십자가에 죽는 것은 힘들다. 예수님도 힘들다. but 예수님은 살아날 것을 아셨다. 내가 살아온 스타일 버리기 힘들죠? 힘드니까 힘든 것이다.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 수 있다.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세상 썩을 것을 위해 죽는 것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일년에 한번 씩 죽는다고 하지 않고, 날마다 죽는다고 하셨다. 매 순간마다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시기하는 생각 등 매 순간 죽어질 것을 위해 죽는다. 죽어지는 것이 없는데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까? 혈기있는 내가 혈기에 죽지 않으면 결국 피해를 주게 된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능력이나 기쁨, 자유함이 있겠어요? 자기 안에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의 부스러기에서 나오는 열매들이다. 내 안에 성령이 주는 열매와 성품으로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십자가에 죽이지 않는 것은 죄를 보호하고 죄를 옹호하고 죄를 키우는 삶인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 없는 곳에는 무기력해지고 아무것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이 되길 바래요. 신앙은 실제여야 한다. 말씀을 받으면 열매가 맺어져야 신앙이지, 열매가 없으면 속는 것이다. 신앙을 종교놀이로 하면 안된다. 작년보다 올해 뭐가 바꼈는지, 고질적으로 넘어지는 죄가 무엇인지 날마다 체크하고 죽어져야 한다.

2. 부활을 믿지 않는 삶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사람과 똑같은 삶을 산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지 않으려고 한다.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는 것이다. (32) 어차피 하는 인생 십자가 없는 교회 가서 십자가 없는 신앙을 하는 것이다.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자는 YOLO족이 많이 있다. 십자가에 값지불하는 것은 멀리하는 기독교라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들의 마음에는 뭔가 공허함이 있고,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이 없다. 십자가를 피하면 육신은 만족스럽지만, 만족스러운 만큼 고통과 채워지지 않는 것, 짜증이 있다. 욜로족이 겉으로는 즐겁게 사는 것 같은데 영혼은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고통으로 산다. 게임을 해서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좋은 삶을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먹는 즐거움이 내일까지 안간다. 내일 해야할 것을 계속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부활이 주는 참신앙과 사랑의 은혜는 썩지 않다. 오늘 받은 기쁨이 내일도 가고 일주일 후도 가고 죽을 때까지 가는 것이다. 썩을 것의 기쁨은 기쁜 일을 할때나 환경이 허락할 때만 기쁘다. 하지만 영원한 기쁨과 부활신앙은 내가 어디 있든 환경이 어떻든지 기쁘다. 어제 좋았는데 왜 오늘 이런 행동이 나올까? 썩어졌기 때문이다.

3. 바울의 권면


1) 속지말라


왜 신앙을 지혜없이 그렇게 사냐고 한다. 자기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죄와 사망이 역사한다. 마지막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믿는 사람만 부활하는게 아니다. (요5:28~29)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지만,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한다. 내가 천국, 지옥을 부정한다고 천국과 지옥이 없어지는게 아니다. 지옥에서 죽으면 괜찮을텐데, 지옥에서는 죽지 않는다. 이것이 재앙이다. 지금 십자가를 피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혜로운게 아니다. 지금 고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길 바래요. 믿음의 사람과 함께 공통체에 있는 것에 감사하길 바래요.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다.

2)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가기 때문에 속이는 자가 있다. 깨어서 속지 않을 책임은 나에게 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그렇게 산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를 메고 고난 받는 것이 미련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나" 신앙으로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깨어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악한 시대에 죄를 안 짓는 것은 쉽지 않다. 죄에 대해서는 죄와 함께 죽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죽으려고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자기가 살려고 하니까 남을, 공동체를 죽이게 된다. 내 안에 주님의 부활의 능력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한 가정이 남편, 아내 자녀 모두 그냥 그런 가정은 왜 그럴까요?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 상급을 쌓아야 한다. 상급 쌓기 위해서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 가정을 세우고 다른 영혼을 세우고 영혼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상급이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고 답답한 것 밖에 없죠? 마지막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십자가의 신앙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부활신앙을 가질 때 십자가 신앙을 할 수 있다. 혈기를 심고 썩어지면 온유한 마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죽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부활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죄가 있는 그 곳에 자기가 죽는 삶을 결단해보세요. 그러면 바로 부활의 생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의 문제가 풀어질 때 풀리는 것이다. 매일 죽는 사람에게 매일 새롭게 되는 신앙을 경험하길 바래요. 지난달보다는 이번달 뭔가 새로워지는 게 있어야 생명력 있는 신앙이 될 수 있죠. 적어도 지난달보다는 이번달 새롭게 되는 비결이 뭘까요? 지난달에 죽지 못한 것이 이번달에 십자가에 죽는 만큼 이번달에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으로 십자가에 죽으면 부활로 변화될 수 있다. 실제적인 능력으로 신앙이 나타나길 바래요.


Sunday, April 14, 2019

2019-04-14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마지막 때의 행동기준 (마24:15~22)

대처요령을 잘 익혀두고 교육을 받으면 위기 때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모를 경우 위기에 처하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지식이 인격화 되기 위해서는 한번에 되지 않고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이 되어야 몸에 체질화가 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을 한다고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 직장이나 가정에 가면 본능대로 옛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격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는 지식과 행동이 같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so 아는 말씀을 매주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말씀으로 실제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훈련을 받고, 다음주, 다다음주에 반복해서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는 지식이 마지막 때에 실제화가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전에 들었던 말씀이 인격화와 능력이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실패한 신앙이다. 다 아는 지식, 신앙을 계속 반복해서 해야하는 이유는 내 인격적으로 나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고 다 되지 않기는 하지만, 아는게 중요한 이유는 내 삶을 체크하는 것을 통해 말씀이 내 인격화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실제화가 되는 신앙 하길 바래요.

1. 마지막 때의 징조 


(15)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은 갑자기 그 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수천년 전에 선지자를 통해 알려주셨다. 아는 것을 실제 적용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600년 전 다니엘 선지자가 한 말씀을 인용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단11:31)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성소에 세워지는 것이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것이 마지막 때는 훼손되고 망령되게 일어나는 일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가증한 사람이 거룩한 교회나 강단을 더럽힌다면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런 일을 하도록 냅둘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 때 영적 전투에 실패하면 하나님의 가장 가증한 것이 들어와서 짖밟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이 훼손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600년 뿐만 아니라 6000년이 지나도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시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세상 관점에서 시대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다. 성경 말씀과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바른 대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그 시대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분별력 있는 눈을 가지길 바래요.

2. 마지막 때 행동원칙


아는 것에 머물면 안되고 반복 훈련을 해야한다. 평생동안 아는 말씀,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들음으로 내 삶에 체질화, 생활화가 되어야 한다.

1) 산으로 도망하라


(16) 유대인에게 산은 거룩한 장소의 상징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은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하루일과를 끝내시고 기도하러 가시는 곳이 산이고, 산상수훈 말씀도 산에서 하셨다. 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평소에 믿음이나 신앙이 준비되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살 길을 알려준다고 사는게 아니다. 롯 시대에도 살려면 산으로 피하라고 해도 농담으로 듣고 피하지 않아서 결국 모두 죽었다. 떠날 때 떠나는 사람은 피해를 보지 않는데, 떠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 so 악인과 함께 있는 자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잠22:3) 피할 곳은 피해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과는 피할 길을 주실 때 피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시59:16) 주님만이 나의 요새이시며 환난날에 피난처임을 믿길 바래요. 이것을 지식으로 안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평안한 지금 이 때에 그 피난처 되는 말씀을 연습해야 한다. 의인들에게는 피할 기회를 주는데, 지금 피할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이유가 있을텐데 내가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거나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있다면 피할 연습을 하길 바래요. 계속 그 장소나 사람과 있다면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2)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


(17) 지붕 위는 교제도 하고 기도도 하는 장소이다. 마지막 때 환란이 있을 때에는 지붕 위에서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즉시 산으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말이 쉽지 상황이 닥치면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 명예, 물질을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한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미리 하시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집 안에 귀중품을 건지기 위해 불길 안으로 뛰어들고 죽는 경우가 많다. 원숭이들은 바나나 하나 포기하지 못해서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롯의 아내도 환란 가운데 도망가는데 뒤 돌아보면 죽는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두고온 물질이 아까워서 뒤돌아 봤다. 주님을 위해 물질 포기하는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이어야 마지막 때에 뒤 돌아보지 말라고 할 때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신앙은 그 때 큰 화를 당하는 것이다. 롯의 아내는 물질을 이기지 못해서 뒤돌아봐서 결국 소금기둥이 되었다. 편안의 때에 세상것 끊는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마지막 때에 쉽지 않다. 신앙을 부단하게 연습할 수 있길 바래요.

3)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


(18) 밭에 일하러 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두고 일하러 간다. 마지막 때에 일하다가 환란이 생기면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때도 빈 몸으로 너의 목숨을 위해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겉옷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지금도 내 생명을 위해 살지 않고 좋은 겉옷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어케 결정적일 때 겉옷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편안한 때 인격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4) 어려운 상황을 피하도록 기도하라


(19) 하나님의 마지막 때에 내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so 지금 연습을 해야한다. 아직도 주일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 있죠? 주일이 되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신앙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주일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자기에게 속한 자기 책임이다. 셀모임 하나 잘 참석하기 위해서도 야근, 약속이 없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름수련회 때 꼭 가야할 사람이 가지 못할 상황이 생기는데, 이런 일이 수련회 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창세기 강의, 교회생활가이드 등도 피치못할 상황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타당한 일이겠어요? 피할 길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만나고 고난이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고난주간 기도로 승리할 수 있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길 바래요. 중요한 일이 생기면 사단이 방행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3.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배려


마지막 때는 창세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노아나 롯 때의 심판과 마지막 때의 심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계속 일곱 심판과 같이 그렇게 되면 믿는 사람이라도 피하기 힘들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환란이 계속되면 택한 자 까지도 구원받기 어려운 것을 아시고 택한 자를 위해서 배려해주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가 정말 문제가 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지막 때가 너무 힘든 사람이다. so 마지막 때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들을 미리 주신다. 지금 그런 고통이 없는 사람은 마지막 때의 고통에 대한 개념이 없을것 아니예요? 믿음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시면 그 고난이 괴롭지 않겠지요? 우리는 하나님 믿죠? 고난을 주시지만 감당할 고난만 주시는 것을 믿고, 끝까지 견디면 피할 길을 주시는 것도 믿을 때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막 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기는 신앙을 감당하길 바래요.

Sunday, April 7, 2019

2019-04-07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끝까지 견디는 신앙 (마24:13~14)

죽고사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 천국은 다른데가 아닌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천국도, 지옥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이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잠4:23) 가정, 직장, 지식 등 지켜야 할 것들이 많지만, 성경은 그 중에서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마음 하나 잘못 씀으로써 생명을 잃기도 한다. 불평, 부정적인 생각으로 화를 내거나 하면 마음에 불안, 근심, 낙심 등이 찾아온다. 화를 내고 기분 나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기분 나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자기 마음을 긍정적, 좋은 생각을 갖기로 마음을 먹으면 평강과 기쁨으로 마음을 잡을 수 있다.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분노로부터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다. 행복은 상황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은 자기 생각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온다. 생각은 하나님 말씀을 받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단이 나를 공격하는 도구이기도 한다. (롬8:6) 생각이 내 운명을 결정하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즉, 남이나 사회의 책임이 아니고 내 책임인 것이다.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사단이 합법적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망의 실제이다. 모든 긍정적인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사단으로부터 온다. (잠16:32) 내가 성을 많이 빼앗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혈기와 분노를 이기는 능력이 다른 능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사람 앞에 인정받는 많은 일을 하고 사람이 칭찬하는 많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안에 혈기, 악한 생각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 생명을 잃게 되고,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보다 큰 자기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영적전투 최고의 승리이다. 마지막 때는 환란, 핍박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풍랑이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이 때 물 위를 걷는 믿음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마지막 때에 이른 환란 풍파를 이길 원리를 나누길 원해요. 어떤 사건에도 마음을 지킴으로 생명을 지키는 신앙 하길 바래요.

1. "그러나" 신앙 Faith of "But"


"그러나"로 오늘 구절이 시작한다. 예수님은 접속사 하나까지도 의미있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신앙의 반대는 "때문에" 신앙이다. 풍랑이 일기 때문에 내가 빠져 죽는다고 하면 죽는거고, 풍랑이 일지만 그러나 나는 이기겠다고 하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신앙인 것이다. 하지만 "때문에" 신앙은 어떤 이유 때문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생명을 잃는 것이다. 죽기로 각오하지 않으면 이런 신앙을 지키기 쉽지 않다. 어떤 환란이 오더라도 "그러나" 내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환란 "때문에" 믿음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엘리아 시대와 같이 끝까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7,000명만이 남는 신앙을 하는 것이다. 걸러지는 일, 믿음을 정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다. 환란, 핍박이 없으면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있다. 그러나 환란, 핍박이 한번 일어나면 믿음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남는 것이다. 신앙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어지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도 뱀이 정당한 이유를 들이댔고, 당당하고 정당하게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한 것이 어렵더라도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이유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그랬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용서하라"는 말씀에는 타협이 없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어떤 변명과 핑계꺼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말씀에도 마찬가지이다. 상황에 따라 봐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먹으면 자기 죄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 그사람 때문에 내 신앙이 죽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사단은 항상 "때문에"라는 합당한 이유와 이론을 제시한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러나" 나는 신앙을, 내 마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이다.
삭개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갔지만, 2가지의 "때문에"가 있었다.  키가 작기 때문에, 그리고 군중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음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마음 없이 군중으로 온 사람을 예수님은 보지 않지만,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을 예수님은 보신다. 많은 사람은 여기서 당락이 결정된다. 마음 먹는거 힘든게 아니다. 그냥 마음 먹으면 된다. 영적전투는 상황과 상황이 아니다. 키 작은 것과 싸우는게 영적전투가 아니다. 영적전투는 "그러나"와 "때문에"의 싸움이다. "그러나"를 택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인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기로 마음 먹어보세요.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보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평범한 어부였다. 그런데 물고기가 안잡혔다. 밤새도록 던졌었는데 안잡힌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던져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던졌고 예수님이 던지라고 한 거기도 던지고 했기 "때문에" 안던질 수 있었다. 베드로가 자신의 이론으로 던져도 안잡힐 것이라는 생각으로 던지지 않았다면 그 인생이 그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던졌을 때 예수님의 생명이 임했던 것이다.
항상 사건이 있을 때 이 두 마음이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사건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안에 두 마음의 싸움에서 어떤 상황이 있을지라도 마음을 지키길 바래요.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 가운데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죽을 인생이 될지, 산 인생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기 앞에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것을 선택하고 마음을 지키면 승리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수록 마음을 지키면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모든 환경을 승리하길 바래요.

2. "끝까지" 신앙 Faith of "to the end"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 앞에 가는 마지막 그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신앙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인내"기 필요하다. 신앙을 아무리 잘 해도 인내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만이 구원받을 믿음이고,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할 믿음이다. (눅8:15) 인내로 결실한다고 하신다. 즉,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인내"하는 사람이 결실을 맺는다. 중간까지 견딘 사람은 구원이 없다. 어렵다고 그만 두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 (행14:22) 구원은 환란이 있다고 해서 이기는것도 아니고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이 뭔가요?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죽을 지경에서 구원을 받고 죽는게 낮지, 구원을 포기하고 사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계2:10) 마지막 때에 고난과 환란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so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고난과 시험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잘 살다가 셀에서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 떠나게 되는 그런 세속적, 인본적인 신앙을 하면 안된다. 약해보이나 끝까지 견디는 것이 강한 신앙이다. 어려움이 많이 있는 사람이 있다. 아내, 남편 등으로 인해 훈련받는 사람은 언제까지 해야하는가 생각할 것이다. 끝까지, 주님 올 때까지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를 잘 다니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 까지 끝까지 지키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훈련받는 이유는 마지막 때 환란풍파의 때에 끝까지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금 훈련을 받는 것이다.

3. "그제야" 신앙 Faith of "then"


복음을 듣는 방법을 통해 구원받게 하신다. "그제야" 신앙은 마지막 때가 있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선교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이 불필요한 것을 주시겠어요? 환란핍박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증언하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핍박이다. 복음의 첫 시발점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함으로써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이었다. so 예루살렘 안에서 자기들끼지 전도하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겠어요? 스데반 순교사건이라는 핍박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을 가게 된 것이다. 핍박이 있어야 "그제야" 밖으로 나간다. 바울이 유럽전도를 하게 된 것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감옥에서 고난 후에야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핍박이 아니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계층에게는 핍박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급박한 구원을 위해서는 핍박을 통해서 구원을 선포하신다.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신앙은 주님이 언제나 올까요? 가족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제야" 신앙을 해야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위해서는 가정복음화가 되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되겠지 하면 안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서 썩어져야만이 복음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환란과 핍박이 있어야 한알의 밀알이 떡여져서 썩어지는 것이다. 죽지않는 신앙에는 새로운 생명도 없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마지막 때에 종말론적인 신앙을 해야 "그제야" 죽음을 각오하고 핍박을 각오할 때 가정, 직장, 사회가 변화된다. 마지막 때는 적당한 것이 아니라, 급박한 구원을 위한 "그제야" 신앙을 해야한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마음을 가지길 바래요. 왜 어렵냐면 내 마음으 어려운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내가 먹은 마음대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마음을 반대로 먹어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변화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불행한 쪽으로 마음 먹지 마세요. 모든 상황이 나를 어렵게 할지라도 "행복한 것"을 선택하고 마음을 지키면 천국을 지키는 것이다. 마지막 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승리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길 바래요.

Sunday, March 31, 2019

2019-03-31 (CS데이, 정의호목사님) 네 이름이 있느냐 (눅16:19~26)

사람에게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나쁜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한 일이 생각나고, 유명한 이름을 가진 조상을 가진 후손은 그것이 자랑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조상 중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후손들은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와같이 자기 이름을 잘 지켜야 자기 인생이 지켜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는 좋은 인생을 살지만, 죽으면 비참한 인생을 살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는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 뿐만 아니라 영과 혼도 있다. 육체로 아무리 잘 살아도 영혼이 어떻게 되느냐도 중요하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깨닫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인생이 다 가기 전에 어케 살아야 하는지 가이드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만족한 삶 살길 바래요. 말씀을 통해 인생이 새롭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래요.

1. 이 땅에서의 삶 Life on the earth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호화롭게 살았다.

1) 유명한 부자 A famous rich man


이 부자가 부자가 되기 까지는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인생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남들은 나갈때나 입는 옷을 집에서도 입고, 행사 때나 먹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이 부자와 남들이 이것을 성공과 행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이 부자를 부러워 했을 것이다.

2) 가난한 거지 A poor begger


이 거지는 먹을게 없어서 부잣집 앞에 누워있었다. 부잣집 개가 와서 핥았다고 했다. 더러운 몸에 더러운 것을 먹으며 무시받으며 살았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빛일수도 있고, 사업하다 망했을 수도 있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 받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육체적인 모습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but 우리 인생은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죽은 후에도 새로운 인생이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한번 살다 죽을것이라는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다.

2. 죽은 이후의 삶  Liffe after death


거지도 한번 죽고, 부자도 한번 죽는다. 이것은 육체가 죽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죽지 않는다.

1) 부자의 영혼  Soul of the rich man


부자가 죽을 때 화려한 무덤에 묻혔을 것이고, 비석에도 그가 한 위대한 공적을 적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부자처럼 살려고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다. 육체는 호화로운 모습으로 장례를 마쳤지만, 장례를 마친 순간 그의 영혼은 뜨거운 불못에 들어가게 됐다. 그가 모든 것에 성공했을지라도 자기 영혼을 위해 살지 않고 알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그는 죽은 후에 영원한 삶을 믿지 않았고 무시하며 살았다. 이것이 자기 인생에 영원하고 치명적인 실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삶을 살았다. 이것이 영혼을 지옥에 던지는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2) 거지의 영혼 Soul of the begger


부자가 먹다 버린 찌꺼기 음식에 거지의 삶이 달린 인생이었다. 거지가 불행한 것은 먹을게 없고 가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고 살기위해 사는 거지의 삶은 더 불행한 것이다. 거지 나사로도 이렇게 살았으면 불행한 삶이었을 것이다. 단지 한끼 먹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면 불행했고, 이 성경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거지는 영혼을 위해 살았다. 이 거지는 비록 거지지만 이 땅에 삶이 아니라 이후의 삶을 위해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 거지가 죽을 때는 장례식도 없이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 실패한 인생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할 일도 못하고 초라하게 살다가 초라한 인생으로 초라하게 죽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은 부자가 죽었을 때는 온 사람들에게 부고장을 돌리며 초청했을 것인데, 거지가 죽을 때는 어느 한명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알았다고 했다.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의 품에 모시게 했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초라한 죽음이지만, 하늘에서는 엄청난 큰 환영의 장례식이었다. 거지 한명이 죽었는데 하늘에서는 왜 이리 크게 했을까요? 세상에서는 무명했지만, 하늘에서는 유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누가나 한번은 죽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죽는 것에 focus를 맞춘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히9:27) 죽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이후 있을 심판이 더 크고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 유명했던 부자의 이름은 없지만, 거지의 이름은 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유명했겠지만, 하늘에서는 부자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지는 세상에서는 무명했겠지만, 하늘에서는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내 이름이 어디 있느냐가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해서 훈장에 이름이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범죄를 지어서 범죄인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계20:15) 부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어서 성경에 이름이 없는 것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불못에 던져지는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길 바래요. 생명책은 하나님의 족보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족보에 이름을 넣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만 하나님의 족보인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면 이 이름은 지옥의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신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불못에 떨어지지 않는데, 내가 죄를 안 짓는다고 해서 안 지을 수 있는게 아니다. (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어려운게 아니고 매우 쉽고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 아들을 십자가에 피흘리게 하셨다. so 이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셨다.

Sunday, March 24, 2019

2019-03-24 (주일예배, 김용식전도사님)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3:17)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의 의미와 사명이 있다. 어떤 사람도 예외는 없이 목적과 사명이 있다. 그것을 내가 깨닫게 될때 내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내가 이 땅에 와서 그냥 돌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누구인지 깨닫게 될 때 내 인생에 근본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전도사님도 일대일 선배 목자에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깨닫게 되고, 목사님과 창세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인생에 사명을 깨닫게 된 후부터 인생이 변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이 반드시 이 땅에 태어난 목적과 사명을 깨닫게 될 때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창조의 원본 소스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인문학, 사람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만이 우리 인생의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만이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촌 노부였지만, 하나님을 만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그의 인생은 놀라운 인생으로 변호되었다. so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인격적으로 깨닫고 있는지가 내 인생에 근본적인 본질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고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는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본질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면 신앙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있어도 그것은 신앙을 더 안좋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얼마나 잘 알고 있고 성품을 많이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본문은 스바냐 선지자이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직계 후손이고,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사역했다. 스바냐는 자신이 기득권을 가지고 남유다가 어떻게 되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바냐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짓고 하나님 앞에 달려갔던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말씀이 임했다. 스바냐는 이런 타락의 시대가 끝나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의 역사를 이뤄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인신제사를 드리고 무당이 득세하던 이 시대와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를 잘 되게 하시고 기뻐 하실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을 선포했다.

1. 하나님의 존재


본문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잘 설명하는 구절이다.

1) 너의 가운데 계심 Dwells amidst you


하나님이 계신것 같지 않은 흑암과 암흑이 가득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의 한 복판에 계신 분이다. 우리는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막막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안계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내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집값이 오르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가고 돈 잘 벌리고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한탄한다. 우리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의 변두리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건 못 되건 사회가 악하던 선하던 우리의 삶에 한복판에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삶에 중심에 계신다고 믿는 것이 시장에 중심이다.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라는 책에서 청년들은 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인 이신론이라고 정의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존재하는 것은 믿지만, 더이상 역사하지는 않으시고 내 삶에 영향은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오늘날의 신앙은 심리치료 정도의 존재로 유능한 집사요, 유명한 심리치료자 정도로 하나님을 미국 청년들은 보는 것이다.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시는 분 정도로 따라오고, 내 삶에 간섭은 하지 않으시도록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청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한번 바라봐야 한다. 신앙을 말씀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나도 오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힘들때 도와주시기만 하면 되고, 내 삶에 간섭하지 않으시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103:19) 하나님은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고, 나의 삶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2)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Mighty to save


구원은 좁고 위험한 곳에서 좋고 넓고 안전한 평야로 이동시킨다는 의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절망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안전지대로 이동시키신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능하다는 개념이 없다. 내가 하고싶은 것을 다 하는게 전능함이라고 생각한다. 오해이다. (창17:1) 아브라함이 자녀를 못낳아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24년이 지나도 아들 하나 주지 않으시면서 나타나셔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하나님이시다. 전능함이라는 개념이 내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함이다. 전혀 실수 없이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완벽함이고 온전함이고 전능함이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항상 나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기쁨 Joy of God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정말 이렇구나를 깨달을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1) 기쁨을 이기지 못함 Takes great delight in you


우리는 환경적인 요소 때문에 기뻐한다. 좋은 것을 얻고 잘 될때 우리는 기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쁨이 주체가 되지 않고 기쁘다고 말씀하실까요? 무엇이 하나님을 기뻐하실까? (17)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은 나의 인생을 보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도 나 자신을 기뻐하지 않고 나 자신의 연약함으로 실망하지만, 그런 나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이 주체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분노가 주체하지 않는 경우는 다 있지만, 기쁨이 주체되지 않는 경우는 많은 것 같다. 나로 인해 기쁨이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돌아가길 바래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뻐하셨다. (창1:31)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다. 스바냐가 사역한 남유다가 타락하고 흑암이 덮은 이 때지만 스바냐 선지자가 "너는 하나님의 기쁨이야"라고 선포했다.

2) 잠잠히 사랑 Silences you with his love


잠잠히라는 것은 조용하다는 뜻도 있지만, 깊이라는 뜻도 있다. 즉, 깊고 곰곰히 사랑한다는 뜻이다.(왕상7:14) 솔로몬 왕 때에 히람은 놋 전문가이기 때문에 놋 관련 모든 것을 만들었는데 최고의 기술자가 놋을 한땀한땀 놋을 끄집에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잠잠히라는 의미와 이 의미가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장인이다. 하나님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한사람 한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다루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 중의 걸작으로 만들어가고 계신다.

3)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심 Rejoices over you with shouts of joy


무엇이 하나님을 이렇게 하셨을까요? (17)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면서 기쁨의 큰 소리를 외치신다는 것이다. 내 존재가 다른 사람의 큰 기쁨이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하다. "여보? 당신은 내 삶의 기쁨이야."라고 들으면 너무 기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스바냐3:15)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형벌이 제거되고 사탄, 원수, 마귀들이 쫒겨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는 날 하나님이 이것을 너무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죄와 형벌이 사라지는 날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시고 기뻐하신다. (행3:19 - 개역한글) 우리가 회개하고 죄 없이 함을 받은 날은 하나님이 기쁨이 있는 유쾌한 날이라고 선포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관심이 너무 많으시다. 오늘 본문은 짧긴 하지만, "너"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너무 관심이 많으시다. 이런 하나님을 믿길 바래요. 이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 (스바냐3:16)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더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기가 죽어서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부터 손 늘어뜨리지 말길 바래요. 이번 한주 모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서 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주간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경험하고 기쁨이 회복되는 은혜의 한주간이 될 줄 믿습니다.

Sunday, March 17, 2019

2019-03-17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막2:13~17)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이성과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100%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 내가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나를 쓰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들보다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들보다 뛰어난데도 안쓰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안쓰시면 그만이다. 성경에서 모세가 있는데 모세는 에굽 왕자였다. 인생 최고의 전성기가 40세였고, 그가 가진 지식, 무예 등으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엇는데, 미디안광야로 보내서 양치는 일로 40년을 보내게 하셨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80세에 부르셔서 백성을 에굽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에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내가 너무 강해서 쓰지 못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을 거절하시고, 나의 죄를 깊이 깨닫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니만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죄인이었던 한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신다. 우리 인생도 말씀에 나오는 한 사람과 같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돕고 섬기는 한 사람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1. 죄인을 알고 계심 Knows the Sinner


(13) 예수님이 다시 바닷가로 나가서 가르치셨다고 한다. 이 바닷가는 가버나움을 말한다. 북쪽 갈릴리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시게 되었다.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기도 하셨다. 이 지역에 예수님의 소문이 나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자리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는 것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해결받지 못한 문제, 질병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흥분과 기대감이 있었다. but 여기에 낄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관에 앉아있었던 세리 마태였다. 유대식 이름은 레위이고, 로마식 이름은 마태이다. 동네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지역 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다. so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어져 있다. 오늘 예수님이 세관을 지나가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갈급하고 주려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이 알고 계신다. so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발버둥 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사냥꾼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리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세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선택해서 죄를 짓기는 했지만,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세리라는 직업으로 열심히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없고, 노력해서 재산을 모아도 오히려 손가락질 당했던 것이다. 착한 세리라는 것은 모순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남보다 죄를 덜 지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세리는 세리다. 나의 인생에 만족과 기쁨이 없거나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만족이 없는 것을 그가 살면 살수록 알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죄로 단절을 받고 있었다. 전통, 명예, 신앙을 중요시 여겼던 그 당시에 집안에 세리가 있다는 것은 수치였다. 아마 세리는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낙인찍혔을 것이다. 죄로 신음학 있던 한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2.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 Calls to a NewLife


예수님이 이 사람을 초청하신다.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어떤 말입니까? 죄로부터 떠나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으로 인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알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는데, 앞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에수님의 제자로 새 삶으로 부르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리 마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부터 만족, 위로를 얻고 성공과 돈과 세상을 쫏았다. but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영적인 암덩어리들, 어듬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but 역설적인 것은 내 안에 죄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야만 되는 죄와 어둠의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덮어두고 나의 인생에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내 안에 어둠의 세력이 더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와 사랑, 은혜를 먼저 경험해야 한다. 이것을 경험하면 먼저는 나를 보는 눈이 바뀐다. 이런 예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예수님 앞에 나오기 바래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제자로써 주어지는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길 바래요. 우리가 이런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죄인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그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사람, 죄로 인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도우신다. 나의 인간적인 능력과 성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인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은혜를 회복할수록 또다른 죄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고 완벽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서 실수 많고 문제 투성이인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이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나의 성실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의 공동체,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은 다르다. 새 인생을 살게 된 죄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불렀을 때 세리의 집에서 만찬이 일어난다. 그 당시 세리 집에서 만찬이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정도에서 머물지 않고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보고 황당하게 생각할 사람은 다름아닌 다른 제자들일 것이다. 그 전에 비난을 받을 때는 무식하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이제는 세리도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인데 은혜를 받고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경험하고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더이상 나를 주장하고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남들보다 더 착하고 성실하고 더 뛰어나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사람은 다른 죄인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내 안에 정말 깊은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놀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이다.

3. 결단을 요구하심 Requires a Decision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집에 가서 생각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때 돌이키고 결단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들릴 때 결단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머뭇거리면 안된다. 마태는 지금까지 철저히 자신을 위해 살았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알지만 그냥 내가 원하는대로 한다. 예수님이 부르기 전까지는 원하는대로 세리로써 육신의 본성대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세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 자리에서 결단하고 일어났다. 새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 속에 영적인 갈망이 있고 변화되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갚지불할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를 원하지만 결단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 준비된 사람은 변명이나 망설이지 않는다. 바로 이 세리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제자인 마태였던 것이다. 성경에 레위라는 이름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사람이고 구별된 사람이 레위인이다. 부모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레위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이런 의미와 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세상, 돈의 종이 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았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나의 정체성,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다. 에수님이 주제를 주실 때 결단하고 일어났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말씀을 주실 때 결단하고 일어나시길 바래요. 지금까지 이 사람의 인생의 목표가 잘못 됐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이 부르실 때 즉시 결단했다는 것은 내 삶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치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겠다는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시간이 흘러가는대로 흘러가며 살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길 바래요. 말씀으로 기회를 주실 때 이것을 붙잡길 바래요.

한명의 세리가 회복되고 돌아올 때 놀라운 잔치가 벌여진다. 오늘 이 사건이야말로 천국에서 경험하게 될 잔치라는 상징적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만나주지 않으신다. 우리 안에 죄로 인해 고민하고 해결을 원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그것을 원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찾고 계신다. 결단의 기회를 붙잡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