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7, 2019

2019-04-07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끝까지 견디는 신앙 (마24:13~14)

죽고사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 천국은 다른데가 아닌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천국도, 지옥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이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잠4:23) 가정, 직장, 지식 등 지켜야 할 것들이 많지만, 성경은 그 중에서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마음 하나 잘못 씀으로써 생명을 잃기도 한다. 불평, 부정적인 생각으로 화를 내거나 하면 마음에 불안, 근심, 낙심 등이 찾아온다. 화를 내고 기분 나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기분 나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자기 마음을 긍정적, 좋은 생각을 갖기로 마음을 먹으면 평강과 기쁨으로 마음을 잡을 수 있다.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분노로부터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다. 행복은 상황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은 자기 생각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온다. 생각은 하나님 말씀을 받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단이 나를 공격하는 도구이기도 한다. (롬8:6) 생각이 내 운명을 결정하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즉, 남이나 사회의 책임이 아니고 내 책임인 것이다.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사단이 합법적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망의 실제이다. 모든 긍정적인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사단으로부터 온다. (잠16:32) 내가 성을 많이 빼앗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혈기와 분노를 이기는 능력이 다른 능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사람 앞에 인정받는 많은 일을 하고 사람이 칭찬하는 많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안에 혈기, 악한 생각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 생명을 잃게 되고,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보다 큰 자기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영적전투 최고의 승리이다. 마지막 때는 환란, 핍박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풍랑이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이 때 물 위를 걷는 믿음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마지막 때에 이른 환란 풍파를 이길 원리를 나누길 원해요. 어떤 사건에도 마음을 지킴으로 생명을 지키는 신앙 하길 바래요.

1. "그러나" 신앙 Faith of "But"


"그러나"로 오늘 구절이 시작한다. 예수님은 접속사 하나까지도 의미있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신앙의 반대는 "때문에" 신앙이다. 풍랑이 일기 때문에 내가 빠져 죽는다고 하면 죽는거고, 풍랑이 일지만 그러나 나는 이기겠다고 하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신앙인 것이다. 하지만 "때문에" 신앙은 어떤 이유 때문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생명을 잃는 것이다. 죽기로 각오하지 않으면 이런 신앙을 지키기 쉽지 않다. 어떤 환란이 오더라도 "그러나" 내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환란 "때문에" 믿음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엘리아 시대와 같이 끝까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7,000명만이 남는 신앙을 하는 것이다. 걸러지는 일, 믿음을 정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다. 환란, 핍박이 없으면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있다. 그러나 환란, 핍박이 한번 일어나면 믿음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남는 것이다. 신앙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어지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도 뱀이 정당한 이유를 들이댔고, 당당하고 정당하게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한 것이 어렵더라도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이유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그랬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용서하라"는 말씀에는 타협이 없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어떤 변명과 핑계꺼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말씀에도 마찬가지이다. 상황에 따라 봐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먹으면 자기 죄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 그사람 때문에 내 신앙이 죽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사단은 항상 "때문에"라는 합당한 이유와 이론을 제시한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러나" 나는 신앙을, 내 마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이다.
삭개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갔지만, 2가지의 "때문에"가 있었다.  키가 작기 때문에, 그리고 군중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음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마음 없이 군중으로 온 사람을 예수님은 보지 않지만,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을 예수님은 보신다. 많은 사람은 여기서 당락이 결정된다. 마음 먹는거 힘든게 아니다. 그냥 마음 먹으면 된다. 영적전투는 상황과 상황이 아니다. 키 작은 것과 싸우는게 영적전투가 아니다. 영적전투는 "그러나"와 "때문에"의 싸움이다. "그러나"를 택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인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기로 마음 먹어보세요.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보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평범한 어부였다. 그런데 물고기가 안잡혔다. 밤새도록 던졌었는데 안잡힌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던져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던졌고 예수님이 던지라고 한 거기도 던지고 했기 "때문에" 안던질 수 있었다. 베드로가 자신의 이론으로 던져도 안잡힐 것이라는 생각으로 던지지 않았다면 그 인생이 그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던졌을 때 예수님의 생명이 임했던 것이다.
항상 사건이 있을 때 이 두 마음이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사건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안에 두 마음의 싸움에서 어떤 상황이 있을지라도 마음을 지키길 바래요.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 가운데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죽을 인생이 될지, 산 인생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기 앞에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것을 선택하고 마음을 지키면 승리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수록 마음을 지키면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모든 환경을 승리하길 바래요.

2. "끝까지" 신앙 Faith of "to the end"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 앞에 가는 마지막 그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신앙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인내"기 필요하다. 신앙을 아무리 잘 해도 인내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만이 구원받을 믿음이고,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할 믿음이다. (눅8:15) 인내로 결실한다고 하신다. 즉,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인내"하는 사람이 결실을 맺는다. 중간까지 견딘 사람은 구원이 없다. 어렵다고 그만 두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 (행14:22) 구원은 환란이 있다고 해서 이기는것도 아니고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이 뭔가요?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죽을 지경에서 구원을 받고 죽는게 낮지, 구원을 포기하고 사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계2:10) 마지막 때에 고난과 환란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so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고난과 시험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잘 살다가 셀에서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 떠나게 되는 그런 세속적, 인본적인 신앙을 하면 안된다. 약해보이나 끝까지 견디는 것이 강한 신앙이다. 어려움이 많이 있는 사람이 있다. 아내, 남편 등으로 인해 훈련받는 사람은 언제까지 해야하는가 생각할 것이다. 끝까지, 주님 올 때까지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를 잘 다니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 까지 끝까지 지키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훈련받는 이유는 마지막 때 환란풍파의 때에 끝까지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금 훈련을 받는 것이다.

3. "그제야" 신앙 Faith of "then"


복음을 듣는 방법을 통해 구원받게 하신다. "그제야" 신앙은 마지막 때가 있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선교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이 불필요한 것을 주시겠어요? 환란핍박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증언하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핍박이다. 복음의 첫 시발점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함으로써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이었다. so 예루살렘 안에서 자기들끼지 전도하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겠어요? 스데반 순교사건이라는 핍박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을 가게 된 것이다. 핍박이 있어야 "그제야" 밖으로 나간다. 바울이 유럽전도를 하게 된 것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감옥에서 고난 후에야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핍박이 아니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계층에게는 핍박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급박한 구원을 위해서는 핍박을 통해서 구원을 선포하신다.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신앙은 주님이 언제나 올까요? 가족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제야" 신앙을 해야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위해서는 가정복음화가 되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되겠지 하면 안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서 썩어져야만이 복음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환란과 핍박이 있어야 한알의 밀알이 떡여져서 썩어지는 것이다. 죽지않는 신앙에는 새로운 생명도 없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마지막 때에 종말론적인 신앙을 해야 "그제야" 죽음을 각오하고 핍박을 각오할 때 가정, 직장, 사회가 변화된다. 마지막 때는 적당한 것이 아니라, 급박한 구원을 위한 "그제야" 신앙을 해야한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마음을 가지길 바래요. 왜 어렵냐면 내 마음으 어려운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내가 먹은 마음대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마음을 반대로 먹어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변화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불행한 쪽으로 마음 먹지 마세요. 모든 상황이 나를 어렵게 할지라도 "행복한 것"을 선택하고 마음을 지키면 천국을 지키는 것이다. 마지막 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승리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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