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죄인을 알고 계심 Knows the Sinner
(13) 예수님이 다시 바닷가로 나가서 가르치셨다고 한다. 이 바닷가는 가버나움을 말한다. 북쪽 갈릴리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시게 되었다.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기도 하셨다. 이 지역에 예수님의 소문이 나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자리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는 것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해결받지 못한 문제, 질병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흥분과 기대감이 있었다. but 여기에 낄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관에 앉아있었던 세리 마태였다. 유대식 이름은 레위이고, 로마식 이름은 마태이다. 동네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지역 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다. so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어져 있다. 오늘 예수님이 세관을 지나가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갈급하고 주려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이 알고 계신다. so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발버둥 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사냥꾼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리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세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선택해서 죄를 짓기는 했지만,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세리라는 직업으로 열심히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없고, 노력해서 재산을 모아도 오히려 손가락질 당했던 것이다. 착한 세리라는 것은 모순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남보다 죄를 덜 지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세리는 세리다. 나의 인생에 만족과 기쁨이 없거나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만족이 없는 것을 그가 살면 살수록 알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죄로 단절을 받고 있었다. 전통, 명예, 신앙을 중요시 여겼던 그 당시에 집안에 세리가 있다는 것은 수치였다. 아마 세리는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낙인찍혔을 것이다. 죄로 신음학 있던 한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2.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 Calls to a NewLife
예수님이 이 사람을 초청하신다.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어떤 말입니까? 죄로부터 떠나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으로 인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알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는데, 앞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에수님의 제자로 새 삶으로 부르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리 마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부터 만족, 위로를 얻고 성공과 돈과 세상을 쫏았다. but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영적인 암덩어리들, 어듬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but 역설적인 것은 내 안에 죄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야만 되는 죄와 어둠의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덮어두고 나의 인생에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내 안에 어둠의 세력이 더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와 사랑, 은혜를 먼저 경험해야 한다. 이것을 경험하면 먼저는 나를 보는 눈이 바뀐다. 이런 예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예수님 앞에 나오기 바래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제자로써 주어지는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길 바래요. 우리가 이런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죄인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그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사람, 죄로 인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도우신다. 나의 인간적인 능력과 성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인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은혜를 회복할수록 또다른 죄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고 완벽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서 실수 많고 문제 투성이인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이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나의 성실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의 공동체,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은 다르다. 새 인생을 살게 된 죄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불렀을 때 세리의 집에서 만찬이 일어난다. 그 당시 세리 집에서 만찬이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정도에서 머물지 않고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보고 황당하게 생각할 사람은 다름아닌 다른 제자들일 것이다. 그 전에 비난을 받을 때는 무식하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이제는 세리도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인데 은혜를 받고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경험하고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더이상 나를 주장하고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남들보다 더 착하고 성실하고 더 뛰어나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사람은 다른 죄인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내 안에 정말 깊은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놀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이다.
3. 결단을 요구하심 Requires a Decision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집에 가서 생각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때 돌이키고 결단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들릴 때 결단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머뭇거리면 안된다. 마태는 지금까지 철저히 자신을 위해 살았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알지만 그냥 내가 원하는대로 한다. 예수님이 부르기 전까지는 원하는대로 세리로써 육신의 본성대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세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 자리에서 결단하고 일어났다. 새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 속에 영적인 갈망이 있고 변화되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갚지불할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를 원하지만 결단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 준비된 사람은 변명이나 망설이지 않는다. 바로 이 세리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제자인 마태였던 것이다. 성경에 레위라는 이름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사람이고 구별된 사람이 레위인이다. 부모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레위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이런 의미와 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세상, 돈의 종이 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았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나의 정체성,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다. 에수님이 주제를 주실 때 결단하고 일어났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말씀을 주실 때 결단하고 일어나시길 바래요. 지금까지 이 사람의 인생의 목표가 잘못 됐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이 부르실 때 즉시 결단했다는 것은 내 삶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치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겠다는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시간이 흘러가는대로 흘러가며 살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길 바래요. 말씀으로 기회를 주실 때 이것을 붙잡길 바래요.
한명의 세리가 회복되고 돌아올 때 놀라운 잔치가 벌여진다. 오늘 이 사건이야말로 천국에서 경험하게 될 잔치라는 상징적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만나주지 않으신다. 우리 안에 죄로 인해 고민하고 해결을 원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그것을 원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찾고 계신다. 결단의 기회를 붙잡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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