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15, 2019

2019-03-15 (금요철야, 김민성전도사님)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느니라 (막5:22~23, 35~42)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죽었다고 치부하여 깊은 사망의 무덤 가운데 두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선포합니다.
오늘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거라사 지역에 가셔서 군대귀신을 쫒아내신다. 오늘 권세를 가진 회당장이 많은 바리새인들이 엎신여기고 볼품없는 예수님께 나올 이유가 전혀 없는데 자기 신분을 다 덮어두고 예수님께 나온 것은 자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야이로의 딸이 잠시 후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모든 신분을 포기하면서까지 나아가서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요구했다. so 예수님이 같이 따나 가섰는데, 하필이면 열두해 동안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나타났다. 야이로 편에서는 여인을 치유하고 예수님과 교제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천천히 가신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은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이다. 나는 내일이 죽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나의 그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신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병 낫게 해주는 분 정도로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병 낫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생활을 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다양하게 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자녀가 잘 되게 하기 위해, 현실적인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사망을 이길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자기 일에 촛점이 맞춰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죽음의 문제에 예외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근데 내 안에 죽음에 대한 권세가 있으면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야이로를 자녀가 병으로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죽음의 문제를 이기기 위해 너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게 된 이유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권세를 가지길 바래요.

1. 죽음이 다스리는 곳


우리가 사망의 권세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지 말씀을 통해 보길 원합니다.

1)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의 집에서 슬픈 소식을 가지고 온다. "주인님, 딸이 이제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뭔가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죽었다고 했다. (35)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라는 말은 인간적으로는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사실은 사망의 세력이 역사할 때 나오는 말이다. 기대를 하고 왔는데 딸이 죽었기 때문에 천하의 예수님이 온다 하더라도 더이상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망의 세력이 역사할 때 우리 안에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까지는 사망에 대해서 이런 반응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잘못된 반응이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정작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 문제를 위해서 오셨는데 내 안에 사망의 세력이 역사하면 예수님을 바깥으로 몰아내게 된다. 그 결과 20년, 30년, 40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지만 사망의 그늘 안에 있으면 여전히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예수님을 그 곳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더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다.

2) 떠들며 울며 통곡함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갔을 때 (38) 떠들며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내 안에 무엇이 역사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내 안에 나타나는 반응들은 자연스러운 반응들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나타내주는 반응이다. so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편에 속해서 계속 떠들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한번도 생명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빌4:4) 똑같은 상황 가운데 사도바울은 죽을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내 안에 생명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길 바래요.

2.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자세와 명령


내가 이것을 알 때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해결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문제를 취하시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과 생각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내 안에 사망의 그늘이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붙들면 내 안에 사망의 세력일 이길 수 있다.

1)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했던 첫번째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사망을 이기신 분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망을 깨뜨리신 유일하신 분이다. 사망의 강력한 세력 앞에 포로되어 있는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려고 해도 하실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 하시는 일에 대적하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사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야이로의 집에 들어갈 때 3명만 데리고 간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갔다. (37) 우리 편에서는 12명을 다 데리고 가는게 가장 효과적이다. 왜 그러실까요? 사람의 일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게 효과적이지만, 강력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제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데리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데리고 가면 부정적인 말들을 하고 울고 불고 할 것이다. 그러면 두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리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선택의 폭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몇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시는게 아니다. 어떤 여지도 두지 않고 한가지만 택하는데 믿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세력은 우리보다 더 강력하다. 이 세력이 우리 안에 있을 때는 굉장히 강하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자체에 나의 몸을 묶지 않으면 죽음의 세력은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틈을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할 때가 많다. 내 안에 하나님이 강한 쓴뿌리들, 상처를 뽑아낼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나나요? 내 상처가 올라오면 목자가 싫고 사망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내 마음을 묶지 않으면 언제든지 넘어지는 것이 사망의 권세이다. 하나님은 사망을 끊어낼 강력한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변화되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묶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실 때 이 말씀이 우리는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을 묶어야 한다. 나의 정과 육을 십자가와 말씀에 못 박아야 한다.

2)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39) 예수님이 잔다고 하는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내 딸이 죽은게 아니고 잔다고 말씀 하시면 나도 그렇게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할 때 자는 것인데, 죽은 것의 명부에 넣어둔 것이 너무 많다. 오늘 하나님은 이것을 회복하길 원하신다. 다시 생명이 들어갈 때 다시 산자가 되는 것을 선포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처럼 여겨졌던 것들을 살리길 바래요.

3. 소녀를 살리시는 예수님


잔다는 하나님의말씀을 야이로가 붙들 때 이후는 예수님께서 하신다. 내가 흔들리지 않고 이 말씀 안에 거하면 그 이후는 예수님께서 하신다.

1)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감


죽임이 있는 현장으로 예수님은 들어가신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고 울고 통곡하고 애통해하고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비우는 사망이 역사하는 곳에 예수님은 직면하고 들어가신다. 예수님은 그곳을 피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방에 들어오셨는데 결혼, 취업 등에만 기도하고 들어주길 원한다. 예수님 내 안에 있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사망의 그늘을 예수님의 생명의 빛으로 쫒아내 주시도록 구해야 하는 것이다. (요10:1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대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왜 생명이 없습니까? 이런 애통함이 있어야 예수님께서 오신 본질인 내 안에 사망을 깨뜨려 주신다. 내 안에 생명이 없다면 이것때문에 애통해 하길 바래요. 오늘 기도할 때 내 안에 사망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인 생명이 풍성하게 일어나길 바래요.

2) 말씀을 선포하심


죽음의 깊이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상관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흙과 생기로 지어졌다. 흙만 있고 생기는 없는 상태가 죽은 것이다. 죄로 인해 나의 생기가 죽었을 때 나는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망을 깨뜨리는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생명의 말씀이 영으로 나의 심령에 들리면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요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그 때가 예수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도 동일한 방법으로 살리신다. (요11:43~44)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던 그 때에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41)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다. 오늘 말씀이 영으로 들리는 은혜가 있길 바래요.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서 생명을 살리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자꾸 부족하고 했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면 듣기만 하면 내 인생이 바뀌게 되고 죽었던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말씀이 회복하길 원해요. 내 안에 사망의 문제라고 할지라도 내 안에 문제가 영으로 들릴 때 말씀을 붙들 때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오셨다. 사망이 역사하는 곳은 사랑이 식어진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사랑이 식어진다. &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한다. 이미 죽었다고 해서 내 안에 쌓아둔 것이 너무 많다. 죽은게 아니라 잔다는 말씀이 내게 선포되길 바래요. 죽은 뼈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으로 선포될 때 죽은 뼈들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대로 살아나는 것이 생명의 능력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날 것을 선포합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