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31, 2019

2019-03-31 (CS데이, 정의호목사님) 네 이름이 있느냐 (눅16:19~26)

사람에게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나쁜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한 일이 생각나고, 유명한 이름을 가진 조상을 가진 후손은 그것이 자랑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조상 중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후손들은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와같이 자기 이름을 잘 지켜야 자기 인생이 지켜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는 좋은 인생을 살지만, 죽으면 비참한 인생을 살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는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 뿐만 아니라 영과 혼도 있다. 육체로 아무리 잘 살아도 영혼이 어떻게 되느냐도 중요하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깨닫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인생이 다 가기 전에 어케 살아야 하는지 가이드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만족한 삶 살길 바래요. 말씀을 통해 인생이 새롭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래요.

1. 이 땅에서의 삶 Life on the earth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호화롭게 살았다.

1) 유명한 부자 A famous rich man


이 부자가 부자가 되기 까지는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인생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남들은 나갈때나 입는 옷을 집에서도 입고, 행사 때나 먹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이 부자와 남들이 이것을 성공과 행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이 부자를 부러워 했을 것이다.

2) 가난한 거지 A poor begger


이 거지는 먹을게 없어서 부잣집 앞에 누워있었다. 부잣집 개가 와서 핥았다고 했다. 더러운 몸에 더러운 것을 먹으며 무시받으며 살았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빛일수도 있고, 사업하다 망했을 수도 있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 받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육체적인 모습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but 우리 인생은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죽은 후에도 새로운 인생이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한번 살다 죽을것이라는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다.

2. 죽은 이후의 삶  Liffe after death


거지도 한번 죽고, 부자도 한번 죽는다. 이것은 육체가 죽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죽지 않는다.

1) 부자의 영혼  Soul of the rich man


부자가 죽을 때 화려한 무덤에 묻혔을 것이고, 비석에도 그가 한 위대한 공적을 적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부자처럼 살려고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다. 육체는 호화로운 모습으로 장례를 마쳤지만, 장례를 마친 순간 그의 영혼은 뜨거운 불못에 들어가게 됐다. 그가 모든 것에 성공했을지라도 자기 영혼을 위해 살지 않고 알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그는 죽은 후에 영원한 삶을 믿지 않았고 무시하며 살았다. 이것이 자기 인생에 영원하고 치명적인 실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삶을 살았다. 이것이 영혼을 지옥에 던지는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2) 거지의 영혼 Soul of the begger


부자가 먹다 버린 찌꺼기 음식에 거지의 삶이 달린 인생이었다. 거지가 불행한 것은 먹을게 없고 가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고 살기위해 사는 거지의 삶은 더 불행한 것이다. 거지 나사로도 이렇게 살았으면 불행한 삶이었을 것이다. 단지 한끼 먹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면 불행했고, 이 성경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거지는 영혼을 위해 살았다. 이 거지는 비록 거지지만 이 땅에 삶이 아니라 이후의 삶을 위해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 거지가 죽을 때는 장례식도 없이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 실패한 인생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할 일도 못하고 초라하게 살다가 초라한 인생으로 초라하게 죽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은 부자가 죽었을 때는 온 사람들에게 부고장을 돌리며 초청했을 것인데, 거지가 죽을 때는 어느 한명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알았다고 했다.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의 품에 모시게 했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초라한 죽음이지만, 하늘에서는 엄청난 큰 환영의 장례식이었다. 거지 한명이 죽었는데 하늘에서는 왜 이리 크게 했을까요? 세상에서는 무명했지만, 하늘에서는 유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누가나 한번은 죽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죽는 것에 focus를 맞춘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히9:27) 죽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이후 있을 심판이 더 크고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 유명했던 부자의 이름은 없지만, 거지의 이름은 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유명했겠지만, 하늘에서는 부자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지는 세상에서는 무명했겠지만, 하늘에서는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내 이름이 어디 있느냐가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해서 훈장에 이름이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범죄를 지어서 범죄인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계20:15) 부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어서 성경에 이름이 없는 것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불못에 던져지는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길 바래요. 생명책은 하나님의 족보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족보에 이름을 넣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만 하나님의 족보인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면 이 이름은 지옥의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신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불못에 떨어지지 않는데, 내가 죄를 안 짓는다고 해서 안 지을 수 있는게 아니다. (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어려운게 아니고 매우 쉽고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 아들을 십자가에 피흘리게 하셨다. so 이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셨다.

Sunday, March 24, 2019

2019-03-24 (주일예배, 김용식전도사님)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3:17)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의 의미와 사명이 있다. 어떤 사람도 예외는 없이 목적과 사명이 있다. 그것을 내가 깨닫게 될때 내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내가 이 땅에 와서 그냥 돌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누구인지 깨닫게 될 때 내 인생에 근본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전도사님도 일대일 선배 목자에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깨닫게 되고, 목사님과 창세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인생에 사명을 깨닫게 된 후부터 인생이 변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이 반드시 이 땅에 태어난 목적과 사명을 깨닫게 될 때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창조의 원본 소스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인문학, 사람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만이 우리 인생의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만이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촌 노부였지만, 하나님을 만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그의 인생은 놀라운 인생으로 변호되었다. so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인격적으로 깨닫고 있는지가 내 인생에 근본적인 본질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고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는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본질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면 신앙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있어도 그것은 신앙을 더 안좋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얼마나 잘 알고 있고 성품을 많이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본문은 스바냐 선지자이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직계 후손이고,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사역했다. 스바냐는 자신이 기득권을 가지고 남유다가 어떻게 되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바냐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짓고 하나님 앞에 달려갔던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말씀이 임했다. 스바냐는 이런 타락의 시대가 끝나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의 역사를 이뤄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인신제사를 드리고 무당이 득세하던 이 시대와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를 잘 되게 하시고 기뻐 하실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을 선포했다.

1. 하나님의 존재


본문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잘 설명하는 구절이다.

1) 너의 가운데 계심 Dwells amidst you


하나님이 계신것 같지 않은 흑암과 암흑이 가득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의 한 복판에 계신 분이다. 우리는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막막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안계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내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집값이 오르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가고 돈 잘 벌리고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한탄한다. 우리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의 변두리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건 못 되건 사회가 악하던 선하던 우리의 삶에 한복판에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삶에 중심에 계신다고 믿는 것이 시장에 중심이다.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라는 책에서 청년들은 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인 이신론이라고 정의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존재하는 것은 믿지만, 더이상 역사하지는 않으시고 내 삶에 영향은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오늘날의 신앙은 심리치료 정도의 존재로 유능한 집사요, 유명한 심리치료자 정도로 하나님을 미국 청년들은 보는 것이다.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시는 분 정도로 따라오고, 내 삶에 간섭은 하지 않으시도록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청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한번 바라봐야 한다. 신앙을 말씀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나도 오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힘들때 도와주시기만 하면 되고, 내 삶에 간섭하지 않으시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103:19) 하나님은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고, 나의 삶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2)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Mighty to save


구원은 좁고 위험한 곳에서 좋고 넓고 안전한 평야로 이동시킨다는 의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절망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안전지대로 이동시키신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능하다는 개념이 없다. 내가 하고싶은 것을 다 하는게 전능함이라고 생각한다. 오해이다. (창17:1) 아브라함이 자녀를 못낳아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24년이 지나도 아들 하나 주지 않으시면서 나타나셔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하나님이시다. 전능함이라는 개념이 내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함이다. 전혀 실수 없이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완벽함이고 온전함이고 전능함이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항상 나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기쁨 Joy of God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정말 이렇구나를 깨달을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1) 기쁨을 이기지 못함 Takes great delight in you


우리는 환경적인 요소 때문에 기뻐한다. 좋은 것을 얻고 잘 될때 우리는 기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쁨이 주체가 되지 않고 기쁘다고 말씀하실까요? 무엇이 하나님을 기뻐하실까? (17)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은 나의 인생을 보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도 나 자신을 기뻐하지 않고 나 자신의 연약함으로 실망하지만, 그런 나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이 주체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분노가 주체하지 않는 경우는 다 있지만, 기쁨이 주체되지 않는 경우는 많은 것 같다. 나로 인해 기쁨이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돌아가길 바래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뻐하셨다. (창1:31)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다. 스바냐가 사역한 남유다가 타락하고 흑암이 덮은 이 때지만 스바냐 선지자가 "너는 하나님의 기쁨이야"라고 선포했다.

2) 잠잠히 사랑 Silences you with his love


잠잠히라는 것은 조용하다는 뜻도 있지만, 깊이라는 뜻도 있다. 즉, 깊고 곰곰히 사랑한다는 뜻이다.(왕상7:14) 솔로몬 왕 때에 히람은 놋 전문가이기 때문에 놋 관련 모든 것을 만들었는데 최고의 기술자가 놋을 한땀한땀 놋을 끄집에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잠잠히라는 의미와 이 의미가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장인이다. 하나님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한사람 한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다루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 중의 걸작으로 만들어가고 계신다.

3)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심 Rejoices over you with shouts of joy


무엇이 하나님을 이렇게 하셨을까요? (17)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면서 기쁨의 큰 소리를 외치신다는 것이다. 내 존재가 다른 사람의 큰 기쁨이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하다. "여보? 당신은 내 삶의 기쁨이야."라고 들으면 너무 기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스바냐3:15)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형벌이 제거되고 사탄, 원수, 마귀들이 쫒겨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는 날 하나님이 이것을 너무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죄와 형벌이 사라지는 날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시고 기뻐하신다. (행3:19 - 개역한글) 우리가 회개하고 죄 없이 함을 받은 날은 하나님이 기쁨이 있는 유쾌한 날이라고 선포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관심이 너무 많으시다. 오늘 본문은 짧긴 하지만, "너"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너무 관심이 많으시다. 이런 하나님을 믿길 바래요. 이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 (스바냐3:16)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더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기가 죽어서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부터 손 늘어뜨리지 말길 바래요. 이번 한주 모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서 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주간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경험하고 기쁨이 회복되는 은혜의 한주간이 될 줄 믿습니다.

Sunday, March 17, 2019

2019-03-17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막2:13~17)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이성과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100%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 내가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나를 쓰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들보다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들보다 뛰어난데도 안쓰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안쓰시면 그만이다. 성경에서 모세가 있는데 모세는 에굽 왕자였다. 인생 최고의 전성기가 40세였고, 그가 가진 지식, 무예 등으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엇는데, 미디안광야로 보내서 양치는 일로 40년을 보내게 하셨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80세에 부르셔서 백성을 에굽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에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내가 너무 강해서 쓰지 못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을 거절하시고, 나의 죄를 깊이 깨닫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니만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죄인이었던 한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신다. 우리 인생도 말씀에 나오는 한 사람과 같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돕고 섬기는 한 사람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1. 죄인을 알고 계심 Knows the Sinner


(13) 예수님이 다시 바닷가로 나가서 가르치셨다고 한다. 이 바닷가는 가버나움을 말한다. 북쪽 갈릴리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시게 되었다.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기도 하셨다. 이 지역에 예수님의 소문이 나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자리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는 것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해결받지 못한 문제, 질병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흥분과 기대감이 있었다. but 여기에 낄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관에 앉아있었던 세리 마태였다. 유대식 이름은 레위이고, 로마식 이름은 마태이다. 동네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지역 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다. so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어져 있다. 오늘 예수님이 세관을 지나가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갈급하고 주려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이 알고 계신다. so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발버둥 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사냥꾼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리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세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선택해서 죄를 짓기는 했지만,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세리라는 직업으로 열심히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없고, 노력해서 재산을 모아도 오히려 손가락질 당했던 것이다. 착한 세리라는 것은 모순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남보다 죄를 덜 지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세리는 세리다. 나의 인생에 만족과 기쁨이 없거나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만족이 없는 것을 그가 살면 살수록 알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죄로 단절을 받고 있었다. 전통, 명예, 신앙을 중요시 여겼던 그 당시에 집안에 세리가 있다는 것은 수치였다. 아마 세리는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낙인찍혔을 것이다. 죄로 신음학 있던 한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2.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 Calls to a NewLife


예수님이 이 사람을 초청하신다.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어떤 말입니까? 죄로부터 떠나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으로 인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알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는데, 앞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에수님의 제자로 새 삶으로 부르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리 마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부터 만족, 위로를 얻고 성공과 돈과 세상을 쫏았다. but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영적인 암덩어리들, 어듬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but 역설적인 것은 내 안에 죄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야만 되는 죄와 어둠의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덮어두고 나의 인생에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내 안에 어둠의 세력이 더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와 사랑, 은혜를 먼저 경험해야 한다. 이것을 경험하면 먼저는 나를 보는 눈이 바뀐다. 이런 예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예수님 앞에 나오기 바래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제자로써 주어지는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길 바래요. 우리가 이런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죄인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그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사람, 죄로 인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도우신다. 나의 인간적인 능력과 성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인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은혜를 회복할수록 또다른 죄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고 완벽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서 실수 많고 문제 투성이인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이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나의 성실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의 공동체,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은 다르다. 새 인생을 살게 된 죄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불렀을 때 세리의 집에서 만찬이 일어난다. 그 당시 세리 집에서 만찬이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정도에서 머물지 않고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보고 황당하게 생각할 사람은 다름아닌 다른 제자들일 것이다. 그 전에 비난을 받을 때는 무식하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이제는 세리도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인데 은혜를 받고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경험하고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더이상 나를 주장하고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남들보다 더 착하고 성실하고 더 뛰어나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사람은 다른 죄인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내 안에 정말 깊은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놀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이다.

3. 결단을 요구하심 Requires a Decision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집에 가서 생각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때 돌이키고 결단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들릴 때 결단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머뭇거리면 안된다. 마태는 지금까지 철저히 자신을 위해 살았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알지만 그냥 내가 원하는대로 한다. 예수님이 부르기 전까지는 원하는대로 세리로써 육신의 본성대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세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 자리에서 결단하고 일어났다. 새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 속에 영적인 갈망이 있고 변화되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갚지불할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를 원하지만 결단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 준비된 사람은 변명이나 망설이지 않는다. 바로 이 세리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제자인 마태였던 것이다. 성경에 레위라는 이름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사람이고 구별된 사람이 레위인이다. 부모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레위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이런 의미와 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세상, 돈의 종이 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았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나의 정체성,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다. 에수님이 주제를 주실 때 결단하고 일어났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말씀을 주실 때 결단하고 일어나시길 바래요. 지금까지 이 사람의 인생의 목표가 잘못 됐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이 부르실 때 즉시 결단했다는 것은 내 삶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치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겠다는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시간이 흘러가는대로 흘러가며 살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길 바래요. 말씀으로 기회를 주실 때 이것을 붙잡길 바래요.

한명의 세리가 회복되고 돌아올 때 놀라운 잔치가 벌여진다. 오늘 이 사건이야말로 천국에서 경험하게 될 잔치라는 상징적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만나주지 않으신다. 우리 안에 죄로 인해 고민하고 해결을 원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그것을 원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찾고 계신다. 결단의 기회를 붙잡길 바래요.

Friday, March 15, 2019

2019-03-15 (금요철야, 김민성전도사님)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느니라 (막5:22~23, 35~42)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죽었다고 치부하여 깊은 사망의 무덤 가운데 두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선포합니다.
오늘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거라사 지역에 가셔서 군대귀신을 쫒아내신다. 오늘 권세를 가진 회당장이 많은 바리새인들이 엎신여기고 볼품없는 예수님께 나올 이유가 전혀 없는데 자기 신분을 다 덮어두고 예수님께 나온 것은 자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야이로의 딸이 잠시 후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모든 신분을 포기하면서까지 나아가서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요구했다. so 예수님이 같이 따나 가섰는데, 하필이면 열두해 동안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나타났다. 야이로 편에서는 여인을 치유하고 예수님과 교제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천천히 가신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은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이다. 나는 내일이 죽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나의 그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신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병 낫게 해주는 분 정도로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병 낫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생활을 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다양하게 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자녀가 잘 되게 하기 위해, 현실적인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사망을 이길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자기 일에 촛점이 맞춰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죽음의 문제에 예외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근데 내 안에 죽음에 대한 권세가 있으면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야이로를 자녀가 병으로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죽음의 문제를 이기기 위해 너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게 된 이유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권세를 가지길 바래요.

1. 죽음이 다스리는 곳


우리가 사망의 권세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지 말씀을 통해 보길 원합니다.

1)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의 집에서 슬픈 소식을 가지고 온다. "주인님, 딸이 이제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뭔가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죽었다고 했다. (35)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라는 말은 인간적으로는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사실은 사망의 세력이 역사할 때 나오는 말이다. 기대를 하고 왔는데 딸이 죽었기 때문에 천하의 예수님이 온다 하더라도 더이상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망의 세력이 역사할 때 우리 안에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까지는 사망에 대해서 이런 반응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잘못된 반응이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정작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 문제를 위해서 오셨는데 내 안에 사망의 세력이 역사하면 예수님을 바깥으로 몰아내게 된다. 그 결과 20년, 30년, 40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지만 사망의 그늘 안에 있으면 여전히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예수님을 그 곳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더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다.

2) 떠들며 울며 통곡함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갔을 때 (38) 떠들며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내 안에 무엇이 역사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내 안에 나타나는 반응들은 자연스러운 반응들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나타내주는 반응이다. so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편에 속해서 계속 떠들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한번도 생명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빌4:4) 똑같은 상황 가운데 사도바울은 죽을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내 안에 생명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길 바래요.

2.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자세와 명령


내가 이것을 알 때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해결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문제를 취하시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과 생각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내 안에 사망의 그늘이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붙들면 내 안에 사망의 세력일 이길 수 있다.

1)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했던 첫번째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사망을 이기신 분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망을 깨뜨리신 유일하신 분이다. 사망의 강력한 세력 앞에 포로되어 있는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려고 해도 하실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 하시는 일에 대적하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사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야이로의 집에 들어갈 때 3명만 데리고 간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갔다. (37) 우리 편에서는 12명을 다 데리고 가는게 가장 효과적이다. 왜 그러실까요? 사람의 일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게 효과적이지만, 강력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제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데리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데리고 가면 부정적인 말들을 하고 울고 불고 할 것이다. 그러면 두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리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선택의 폭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몇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시는게 아니다. 어떤 여지도 두지 않고 한가지만 택하는데 믿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세력은 우리보다 더 강력하다. 이 세력이 우리 안에 있을 때는 굉장히 강하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자체에 나의 몸을 묶지 않으면 죽음의 세력은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틈을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할 때가 많다. 내 안에 하나님이 강한 쓴뿌리들, 상처를 뽑아낼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나나요? 내 상처가 올라오면 목자가 싫고 사망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내 마음을 묶지 않으면 언제든지 넘어지는 것이 사망의 권세이다. 하나님은 사망을 끊어낼 강력한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변화되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묶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실 때 이 말씀이 우리는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을 묶어야 한다. 나의 정과 육을 십자가와 말씀에 못 박아야 한다.

2)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39) 예수님이 잔다고 하는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내 딸이 죽은게 아니고 잔다고 말씀 하시면 나도 그렇게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할 때 자는 것인데, 죽은 것의 명부에 넣어둔 것이 너무 많다. 오늘 하나님은 이것을 회복하길 원하신다. 다시 생명이 들어갈 때 다시 산자가 되는 것을 선포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처럼 여겨졌던 것들을 살리길 바래요.

3. 소녀를 살리시는 예수님


잔다는 하나님의말씀을 야이로가 붙들 때 이후는 예수님께서 하신다. 내가 흔들리지 않고 이 말씀 안에 거하면 그 이후는 예수님께서 하신다.

1)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감


죽임이 있는 현장으로 예수님은 들어가신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고 울고 통곡하고 애통해하고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비우는 사망이 역사하는 곳에 예수님은 직면하고 들어가신다. 예수님은 그곳을 피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방에 들어오셨는데 결혼, 취업 등에만 기도하고 들어주길 원한다. 예수님 내 안에 있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사망의 그늘을 예수님의 생명의 빛으로 쫒아내 주시도록 구해야 하는 것이다. (요10:1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대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왜 생명이 없습니까? 이런 애통함이 있어야 예수님께서 오신 본질인 내 안에 사망을 깨뜨려 주신다. 내 안에 생명이 없다면 이것때문에 애통해 하길 바래요. 오늘 기도할 때 내 안에 사망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인 생명이 풍성하게 일어나길 바래요.

2) 말씀을 선포하심


죽음의 깊이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상관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흙과 생기로 지어졌다. 흙만 있고 생기는 없는 상태가 죽은 것이다. 죄로 인해 나의 생기가 죽었을 때 나는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망을 깨뜨리는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생명의 말씀이 영으로 나의 심령에 들리면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요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그 때가 예수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도 동일한 방법으로 살리신다. (요11:43~44)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던 그 때에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41)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다. 오늘 말씀이 영으로 들리는 은혜가 있길 바래요.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서 생명을 살리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자꾸 부족하고 했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면 듣기만 하면 내 인생이 바뀌게 되고 죽었던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말씀이 회복하길 원해요. 내 안에 사망의 문제라고 할지라도 내 안에 문제가 영으로 들릴 때 말씀을 붙들 때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오셨다. 사망이 역사하는 곳은 사랑이 식어진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사랑이 식어진다. &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한다. 이미 죽었다고 해서 내 안에 쌓아둔 것이 너무 많다. 죽은게 아니라 잔다는 말씀이 내게 선포되길 바래요. 죽은 뼈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으로 선포될 때 죽은 뼈들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대로 살아나는 것이 생명의 능력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날 것을 선포합니다.

Sunday, March 10, 2019

2019-03-10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 (마24:11~12)

세상이 각박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살기 어렵다고 각박한건 아니다. 농촌보다 더 먹고살기 좋은 서울이 시골보다 더 살기 각박한 것이다. 사람이 지혜가 발달하며 과학, 문화, 산업이 발달하고 육신을 누릴 것은 많고 편해지지만, 사람의 본성과 심령 등은 더 피폐해진다. & 관계가 사무적으로 된다. 전화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상대방을 보면서 교제하고 인격과 인격을 나누고 감정을 읽으면서 서로 인격을 대하는 관계를 가졌었다. 그 후 전화가 나오게 되면서 얼굴을 보지 않고도 기계를 통해서 말만 전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단지 말이라는 언어만 교환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더 발달해서 상대방의 감정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좋은지 등은 모르는 문자만 오가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아예 ㅋㅋ, ㅇㅇ과 같은 부호로 오가는 시대이다. 자신의 감정을 감출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선호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적인 관계이다. so 서로간에 인격적인 관계성 가운데 이뤄지는 관계이다.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파괴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어렵다. 지금 시대는 인격이 배제된 것을 편하게 생각하는 시대이다. 기계는 인격이나 관계가 부딪힐 염려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더 편하고 기계를 선호하게 된다. so 점점 사람이 아닌 기계를 쓰게 된다. & 사람은 점점 생산성으로 평가를 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로봇보다 못한 시대가 되고 로봇에게 인간이 퇴출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며 살아가는 인간이 자초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디어 없이는 못사는 시대가 됐지만, 이런 미디어와 전자기기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자기 지혜로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시대가 된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so 사람의 인격이 파괴됨으로써 인간이 기계화와 비인격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를 잘 분별해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시대에 따라 살면 시대에 함몰되면서 살게 된다. 이 시대를 거슬러 살지 않으면 시대에 희생자의 삶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갈 것이 아니라 거슬러 살 수 있는 영권이 있는 사람만이 마지막 때를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1. 거짓 선지자의 미혹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설명하실 때 "많다"는 말을 많이 쓰셨다. 많다는 말이 무서운 말이다. 마지막 때에 미혹되고 넘어기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청함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받은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이 미혹되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는 항상 의의 역꾼으로,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다.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거짓선지자들이 일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이 글을 쓰면 유명해진다. 유명한 사람이 강의를 하면 유명한 강의가 된다. 유명한 사람이 동성애에 대해서 말하면 그것이 영향력이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을 하면 인간적인 사람들은 수긍한다. so 사단은 인간적인 사람을 배후에 선다. 낙태 문제도 산모와 미혼모의 권리로 말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호응한다. & 이것을 반대하면 무자비하고 사랑이 없다고 한다. 문제는 마지막 때에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짓을 퍼뜨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짓에 미혹되는 것이다. (벧후2:1) 이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들은 믿음의 공동체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잘 미혹할 수 있다. 교회에 선포되는 말씀과 다른 이론을 말하는 것이 거짓선지자들이 말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동성애는 성경에 나왔지만 교회 안에 어디에도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이 있다. & 같은 교회 안이 나뉘고 분란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교단 안에서 무엇때문에 신앙을 하겠어요? 마지막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 반대편에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교단도 동성애 때문에 무너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많다"는 것이다. 뱀이 하와에게 완전한 거짓말을 한 것처럼, 지금 시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는 시대이다. 말씀은 많고 신앙서적은 많고, 인터넷에 메시지가 넘쳐나지만 정작 하나님 말씀을 들기는 쉽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아모스8:11~12)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낸다고 하셨다. 마지막 때는 추수의 때이다. 알곡과 죽정이를 가르는 시대이다. 말씀의 기근을 보내서 고르는 시대이다. 말씀이 풍성할 때야 앉거나 잠자거나 누워서도 들을 수 있지만, 말씀의 기근이 온 시대에는 아무리 말씀을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다. 마지막 시대는 두 부류로 나눠진다. 한부류는 하나님 말씀이 갈급해서 말씀을 듣고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부류는 거짓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도 진리의 말씀인지 분별이 안되는 부류이다. 내가 무슨 말씀이 들리고, 무슨 말씀이 안들리는지 분별해야 한다. 거짓선지자가 거짓 메시지를 전하면 안들을꺼 같죠? 거짓선지자의 메시지에 은혜 받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so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은 듣지도 못하면서 세상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딤후4:3~4) 여기서 때는 마지막 때이다. 진리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스승을 드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중요한 메시지는 듣지 못하고, 들리는 것은 허탄한 이아기만 듣게 된다. 우리 안에 죄가 있으면 죄가 하나님 말씀을 못듣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면 내 안에 죄를 끊어야 한다. 진수성찬이 달갑지 않는 이유는 진수성찬을 먹기 전에 군것질로 배를 많이 채웠기 때문이다. 시대를 분별하려면 내 안에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 때를 따르지 않으려면 내가 죄로부터 깨끗해야 한다.

2. 불법이 성함


불법이 성한다는 것은 분별이 대세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불법은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하는 내 안에 거짓을 합리화 하기 때문에 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남들과 세상도 다 하는데 라며 내 죄를 정당화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 그 시대에 관습이 진리가 되는 시대이다. 서부 유럽 사회에는 마리아나와 마약이 이미 합법화 된 곳도 있다. 이것을 하면 결국에는 죽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데 합법화가 된 것이라고 하면 누가 했겠어요? 그 시대에 교회가 부패가 되면 죄에 대해서 자유화가 된다. 세상이 우리 죄를 안심을 주기 때문이다. 대학캠퍼스 등애서 문제의식 없이 이성과의 교제 등이 일어나는것이다. 많은 이 시대는 죄와 불법에 대해서 개념이 없다. 하나님의 모델이 안보일 정도로 사단이 다 파괴해벼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준을 찾아야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주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이 음붕의 권세를 이기시는 곳이 되어야 한다.

3. 사랑이 식어감


죄를 지으면 양심이 더럽혀지는 것이다.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짖게 되면 양심이 화인맞아서 양심이 죽게 된다. 죄를 지으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사라이 깨어진다.(딤후3:1~4) 말세는 고통하는 때, 괴로운 시대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주의, 개인주의이다. 자기 주제를 알면 자기 자랑하는 말을 못할텐데 양심이 화인 맞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교만은 사단의 속성이다. 죄를 지으면 사람이 교만해지고 악한 영에 잡히는 것이다. 교만한 자와 같이 있는 것 자첵 고난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권위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계략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도움을 줘도 당연시 여기고 이런 사람과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교회 5년, 10년 다니면서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예수님 마지막 때에 배신한다는 말씀을 많이 한다. 감사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불법이 성함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사랑이 식어간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시대는 이런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말로는 부인해도 남은 해꼬지하고 악한 것 안에는 사랑이 없는 것이다. 왜 개인주의를 선호하겠엉?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인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가 다 필요하다. 내 인격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TV, 인터넷, SNS, 게임 등이다. 이 시대(개인주의)는 외로움의 문제를 탈피하기 위해서 인격을 드러내지 않아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들이 필요로 한 것이다. 지금 시대는 예수님의 사랑을 만난 한사람이 필요하다. so 교회가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십자가로 채워지만, 주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 교회를 찾아 갈 것이다. 이게 마지막 시대에 역설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다. 컴을 통해서도 지식을 전하는 컴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에수님의 십자가가 회복되어야 그것(사랑)을 나눠줄 것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를 대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회개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

Sunday, March 3, 2019

2019-03-03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마지막 때 사람들의 관계 (마24:10)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관계적인 사람이다. 가족, 학교, 직장, 교회 등 어느곳에 있든지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so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는 능력,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다른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쓸데없는 것이다. but 관계의 어려움은 가까운 사람과의 문제가 대부분이다. 가족, 친구, 동역자들끼리 관계의 어려움이 많이 생긴다. 이것은 이상한게 아니고 가까운데더 자주 부딪치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모든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가장 가까운 식구들과 원수가 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마10:21) 끔찍한 일이지만, 가장 어려운 관계는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가족을 때 주로 나타나는데, 믿지 않는 가족이 믿는 가족을 핍박하는 것이다. 이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이슬람에서는 배교하면 사랑하는 가족인 부모, 오빠, 동생이 믿는 사람을 죽인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10) 그때에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기에 더 어려운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잡아주고 고소하고 실족케 된다는 것이다. so 사람을 분별하고 주의하라고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마지막 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신앙 하길 바래요. 

1. 실족함 Turn away from faith


실족케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실족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믿음을 실족케 하는 거짓선지자 등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의 특징 중 하나는 이런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특정 사람이 아니고 대다수의 많은 사람이 실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실족하는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 사람이라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평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 잘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모두가 다 그정도면 천국가는 것은 별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평안할 때 믿음은 장담할 수 없다. 조금 어려움이 있으면 지푸라기 같은 작은 것에도 믿음을 배반할 정도면 그 신앙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so 교회로 청함받은 것 자체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셨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택함 받는 것이 중요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십자가 짐을 택함 받는 사람은 적다고 하셨다. (마13:21) 잠시 견디는 신앙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 사람들이 주로 말씀 들을 때 시험에 든다. 어떤 사람은 말씀 듣고 은혜 받고 인생이 변화되지만, 같은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넘어지는 것이다. 잠시 주어진 환란에 넘어지면 그동안 해온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한때의 은혜, 직분,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마지막 때에 견디는 믿음과 신앙이 중요한 것이다. 한때의 믿음은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평안할 때에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신앙을 해야지, 교회만 다니는 신앙을 하면 넘어지기 쉽다. 마지막 때에 우리의 신앙을 그대로 받는게 아니고, 불에 넣어서 남는 것만 받으신다. (고전3:12~13) 우린 이 때를 생각해야지,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된다. 지금 내 신앙이 불시험을 통과하는 신앙인지, 불에 타버리는 신앙인지는 내 선택에 달려있다. 십자가에 내 죄가 죽어지는 십자가의 신앙만이 육체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so  우리도 불에 타지 않는 신앙은 내 죄가 죽어지는 고난받는 신앙만이 마지막 때에 불을 통과하는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받을 고난은 육체를 즐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다. 나무멍에를 피하면 그 후에 쇠멍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훈련없는 사람의 특징은 죄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훈련 안받는 사람의 특징은 죄문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욥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욥23:10) 욥은 자신의 고난이 너무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이다. & 주님 앞에 순금과 같이 나올 것을 알기에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고난 있는 것이 꼭 나쁜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죄의 지기들을 모두 제거해서 순금같은 믿음이 되어서 마지막 때에 타지 않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안다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벧전1:7) 우리의 믿음이 어느정도로 연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현재 주어지는 고난을 잘 감당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잘 감당하는 실제적인 준비이다. 마지막 때를 위해 내 죄를 위해 날마다 죽는 믿음의 훈련을 감당하길 바래요.

2. 서로 잡아줌 Betray each other


잡아준다는 의미는 히브리어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잡아주는 상황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집에 알곡만 있는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가라지도 마지막 때까지 뽑지 말라고 하셨다. 마지막 때에는 가라지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예수님을 누가 잡아주는 일을 했습니까? 외부에 불량배나 강도가 예수님을 잡은게 아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넘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리더나 목회자를 가장 잘 아는 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가룟유다는 마귀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기적과 변화를 봐왔으면서도 자신은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사야26:10) 악인들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가 쏟아짐에도 그 가운데에서도 불의를 행한다는 것이다. 다 웃는데 웃지 않는 사람은 무섭다. 다 은혜 받는데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좋은 은혜의 섬김도 받고 많은 도움도 받으면서도 아무 변화도 없고 그 사랑을 배우지도 않고 그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에굽의 바로왕은 모세에게 행한 많은 기적을 봤지만, 마음은 강퍅했다. 이는 심판받을 징조이다. 이런 가룟유다를 보고 예수님은 그가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을 뻔했다고 하셨다. (시41:9) 가장 믿고 신뢰하고 좋은 것을 다 나눈 친구 조차도 나를 대적하고 내 발꿈치를 들었다고 했는데, 이런 것이 마지막 때에는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마지막 때에는 믿음을 배반하고 떠나는 사람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 내 안에 미혹의 영이 있으면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도 미혹되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잘 따라가고 남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이다. 믿음의 반석도 예수님 안에 서는 신앙 되길 바래요.

3. 서로 미워함 Hate each other

서로 미워하고 나누는 것이 사단의 속성이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내 안에 악한 영을 따라서 하나님의 영과 대적하는 일을 하게 된다. 마지막 때에는 이런 일이 심각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고 반면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을 미워한다. 반면에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밉고, 악한 자에 속한 사람이 좋아진다. 이는 영적 상태에 따라서 결정되게 된다. 자기 자신이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잠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 받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과 불편하고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는 자기의 영적 상태인 것이다. 까닥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기 영혼의 영적 상태가 결국 자신의 영혼을 결정한다. 결국 마지막 때는 무섭고 두려운 세상이 된다. 서로 죽이고 배반하고 이간질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그런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 (롬8:35~37) 우리가 마지막 때에 모든 민족으로부터 미움 받고 환란과 핍박이 있겠지만, 믿는 우리는 겨우 이기는게 아니고 넉넉히 이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게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주어지는 시간을 아끼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시간 보내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