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9, 2017

2017-10-29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착각하는 신앙 (마태복음 21:28~32)

너무 긴장하면 나무가 사람처럼 보이고, 돌이 아이처럼 보인다. 이것을 착각이라고 한다. 착각은 자유이다. 말릴 수 없다. 나쁜 사람인데 자신은 자신을 착하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착각은 스스로 속는 것이다. 생명을 다하는 신앙에 착각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신앙은 가장 전통적이고 좋은 신앙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앙하는데, 어느날 하나님이 "화 있을진저", "악한 종"이라고 듣는 경우이다. 자신은 칭찬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경우이다.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천국에 0순위로 갈 수 있을 것으라고 착각했다. but 예수님이 오셔서 "화 있을 진저"라고 하셨다. 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님이 틀렸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더 큰 죄를 지었다. 속는 것은 대상이 없다. 지혜 있는 자도 속고 지혜 없는 자도 속는다. 기도 중에 억제할 수 없는 죄가 토설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고 충격도 클 것이다. 오히려 깨닫게 할 수 있는게 은혜이다. 누가 알려줄까요? 어떻게 노력해서 알 수 있나요? 죄인의 특징은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다. 기도 하다가, 예배 드리다가 죄가 깨달아지는 것은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래요. 한순간에 자신이 심각한 죄인임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속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속지 않아야 하고, 그러려면 우리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이 안전하다. 신앙에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고 우리 신앙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길 바래요.

1. 두 아들 (Two sons)


대제사장과 장로 등 종교인들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했다. (28) 

1) 맏아들


맏아들에게는 아버지 밭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고, 말은 가서 일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놓고 딴데 가서 놀았다. 이건 하나님의 일을 먼저 맡은 대제사장, 서기관들을 가리켜서 이야기 한 것이다. 지식을 많이 가지고 리더로 신앙하면 신앙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자기 지식으로 가르치는게 올은걸로 착가한다. but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지적했다. (마23:3) 이게 선생된 자,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아멘만 크게 하고 밖에서는 그렇게 살고 행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가르친 신앙을 가정에서, 자녀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배우자, 직장에서 그렇게 행하고 말씀대로 사는지 확인해보세요. 사람들의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나중에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성경공부하면 아는게 많아지고, 교회에서 훈련 받으면 많은 일을 하지만 그게 맏아들의 문제이다. 그렇데가 아멘까지 안하면 안되는 거다.

2) 둘째 아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가보니 양심에 걸림이 생겼다. 첫째아들은 하겠다고 해놓고 불순종하고 그것에 양심의 걸림이 없었다. 둘째는 불순종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뒤늦게나마 일터에 나가서 일을 한 것이다. 둘째를 세리와 창녀들을 말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첫째 아들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은 반면에 둘째는 죄를 안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이다. 맏아들은 둘째 아들이 오히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 (The criteria for entering the kingdom of God)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31)에 핵심이 있다. 이 말 자체는 대제사장, 장로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말이자 자기들에게는 치욕적인 말이다. 세리와 창녀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들어간다는 말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죄인의 대명사이고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종교적인 행위, 율법을 따라 사는 자신들보다 먼저 들어간다는 것에 치욕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가 많은 착한 일을 했냐, 죄를 적게 지었냐가 아니다. 선, 악의 기준으로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만 갈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을 안했다고 한게 아니다. 그들의 행위는 인정했지만 한가지, 하나님의 뜻대로 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자주 하신다. 모래 위의 집도 행위가 반석위에 지은 집도 행위이지만 그 아래 반석이냐 모래이냐를 따진다. 반석 위에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방법으로 지었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뜻으로 지은 것이지만, 모래는 순종하지 않은 방법으로 지은 것을 말한다. (마7:21~23) 이게 하나님나라의 기준이다. 주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한가지 문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는데 이게 바로 불법인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엄청난 일을 해놓고서 심판 받는 것이다. so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다. & 하나님이 하라는 것만 해야하고, 하나님의 때에 해야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데 내가 안하는 것도 불법이다. &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방법대로 해야한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우린 죄인인데, 죄인이 뭘 그렇게 잘할 것이 있나요? 죄 없으시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볼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 하신 것을 행하시고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지 보여주시는 표본이요 완전하신 분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을 본으로 봐야 한다. (요7:6, 9) 예수님은 완전하신데 "너희 때는 늘 준비됐지만 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는 예수님도 희생해야 한다. 3년동안 예수님은 자기부인하면서 사셨다. 가나의혼인잔체에서 예수님이 인간적인 좋은 것, 정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좋아했을지 몰라더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이다. 불법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32) 그들이 요단강으로 와서 봤단 말이예요.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한다. (눅7:30)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뿐 시람은 죄를 짓고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아.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첫번째 착각이다. (눅15:7) 죄인 되는게 그러헤 힘듭니까? 우리는 성경을 떠나면 안된다. 과거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더라도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을 주실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만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신앙 되는 것을 명심하길 바래요.

Friday, October 27, 2017

2017-10-27 (금요철야, 손인규목사님) 은혜의 기회를 붙잡으라 (열왕기하13:10~20)

하나님이 공평하시고 선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복과 은혜를 주시길 원하신다. 좋은걸 주길 원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받을만한 그릇이 안되거나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그것이 내것이 되지 않는다. 받아들일 만한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받아야 한다. 은혜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복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복없는 사람은 좋은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그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so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이 착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아멘으로 기뻐하시면 취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미워하고 악하게 보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복 받기 어렵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 우리가 살아있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내 인생에 변화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반응할 때 우리 인생에 더 놀라운 인생의 기회를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하스왕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악을 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이해할 수 없다. 말씀 앞에 나갈 때 도전과 변화가 있는 놀라운 시간 되길 축복합니다.

1. 요아스가 받은 은혜


요아스라는 북이스라엘왕은 한건 없는데 받은건 많다.

1) 이스라엘 왕


유다의 왕이었던 요아스는 성전을 회복한 왕이었는데, 오늘 본문에 북이스라엘왕 요아스는 악한 왕이었다.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는 왕의 직분을 받은 은혜를 받았다. 요아스가 선한 일을 하거나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게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 but 요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쌓는 죄를 지은 것이다. 나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는게 아니고 내게 주신 것을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favor가 있다. 우리가 받은 특별한 은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인 줄 믿습니다. (벧전2:9)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인생으로 부르셨다고 한다.

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활동하던 그 시기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요아스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주변에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이 없다면 매우 불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아스는 자신을 훈련시켜주고 알려줄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가 있다는 것이다. 요아스는 하나님의 생각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사는 엘리사가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 믿음으로 살고 싶은데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나님께 변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14) 이 내용을 볼 때 요아스가 엘리사를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전쟁이 많은 시대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병거, 마병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시기였다. but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병거와 마병이라고 했다.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엘리사를 보고 있었다. 전쟁을 할 때만 엘리사를 찾겠다는 것이고, 평소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고 위급하고 전쟁을 해야할 때 비로소 엘리사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냥 도움을 받을 존재로 생각했지,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받은 사명은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쓰시는 나라가 되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but 문제는 엘리사 혼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요아스가 같은 마음으로 믿음으로 화합해야 하는데, 그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다. 요아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생각해봐야 한다. 앞구절을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 요아스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요아스는 자기 주위에 세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을 신하로 삼았을 것이다. 엘리사는 좋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요아스는 자기 기준으로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했을 것이다.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신앙은 하지만 나의 연약한 부분을 훈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훈련하려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훈련받길 원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값지불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훈련받고 변화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붙잡길 바래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 특권이 무엇인지 물어볼 것이다. 기억하고 빼앗기지 않게 지키길 바래요.

3) 오래 참으심


왕이되고 나서 아주 짧게 인생을 마친 왕이 있다. 하지만 요아스의 경우 하나님께 악한 것만 했는데 15년이나 살았다. 하나님은 악하다고 해서 바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새로운 기회를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죄가 있다고 바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따지거나 원망할 수 없다. (롬2:4)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시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면 사단이 우리가 죄를 끊지 못하도록 감정과 환경을 통해 더 많은 어려움을 줍니다. 이것을 통해 승리하길 바래요.

2. 엘리사를 통한 마지막 기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요아스왕이 그냥 넘겨버리고 지나쳐 버리셨다. & 엘리사를 통해 마지막 기회를 주신다.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 믿음의 행동을 하도록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다. 지금이라도 말씀에 순종한다면 이스라엘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데 순종하지 않는 요아스를 볼 때 엘리사는 분이 나고 안타까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구하시는데,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는데 요아스가 취하지 못한 것이다. 요아스가 지금까지 믿음없이 한 것처럼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셔도 가볍게 여기고 지나친 것이다. 아마 요아스는 자기 생각에서 합리화 해서 생각했을지는 모릅니다. 요아스는 아마 하나님의 선지자가 활동하는 시대가 아닌 시대 살았던 왕보다 요아스왕은 사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악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대해사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눅12:48)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이 있길 바래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할 줄 믿습니다. 배운게 있다면 실제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섬겨야 하는지 보고 듣고 배우고 난 후에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복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복이 있는데, 내가 싸워서 전쟁하고 승리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변화의 기회를 주실 때 말씀을 붙잡고 변화되길 바래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말씀을 흘려보내고 지나치고 다음에 들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실 복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않고 흘려보낸다면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엘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새로운 일을 하길 바라시는데 요아스는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어떤 신앙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가 믿음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화합하길 원하십니다. (히4:1~2)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 하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결단하고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대로 이뤄질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우리가 물론 주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방해가 있고 고난이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보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안된다. 사명을 이루고자 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지 않을 것 때문에 불평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나와 결산하고 따지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믿음으로 반응해서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충분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음으로 순종하고 반응 하기만 하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회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더 좋은 인생으로 쓰임받은 삶 살길 바래요.

Sunday, October 22, 2017

2017-10-22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물 위를 걷는 믿음 (마태복음 14:22~32)

내가 신앙을 하다보면 내가 언제 믿음이 있는지 보일까요? 사건을 만나면 볼 수 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갖길 바래요.

1. 믿음을 훈련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허기진 사람들을 돌려보내길 원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며 믿음을 보였다. 이후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를 타고 보내신다. 제자들의 계획이라면 몇시간 후면 육지로 가서 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배를 아무리 저어도 도착을 안했다. 해가 뜨기 전인 사경에 바람과 싸우며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오지 않으셨다. 두려움으로 있을 때 물 위로 오던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파도를 잠잠케하는 믿음을 제자들이 보이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늘도 안전한거, 호수를 남들보다 빨리 건너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을 훈련하기 위해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2. 물 위를 걷는 베드로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봤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 믿음으로 바라봄

예수님은 물 위로 걷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무엇을 보길 원하시는지 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런 변화 없이 나의 남은 인생이 지나가길 원하지 않으신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길 바래요. 내가 지금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지금 내가 기대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믿음은 내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능력이다.(히11:1) 나에게 이것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이뤄질 것을 바라보는 증거가 될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오해할 수도 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시려는 담력훈련을 시키시는게 아닌가 하는 오해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지길 원하신다. 영적 세상의 논리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건이 나의 믿음을 빼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온 세상만물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우리 믿음을 흔들고 계신다. 믿음이 없으면 내 안에 작은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무너진다. 다른 제자들은 배를 붙잡고 있는 생존형 믿음이다.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 가지시길 바래요. 세상에 집중하면 우리 안에 믿음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다. 하나님이 나를 원하시는 차원의 돌파가 있길 바래요.

2) 예수님의 말씀을 구함

믿음이 들어왔다고 바로 물 위를 간게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구했다.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 주님이 말씀하면 내 인생이 이뤄질 것을 믿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소망없는 우리 인생의 한계와 결박을 끊는 능력이 있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이다. (히11:3)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이뤄졌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믿음이 없이 물 위로 걷는 흉내만 내며 물에 빠진다면 비웃음만 살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보면 웃음만 살 것이다. (롬10:17)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라는 말씀을 듣고 물 위를 걸었다.

3) 믿음의 도구가 됨

예수님은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시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냐고 물어봤다. 예수님이 책망하며 말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물을 걸었을 것이다.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실패인 것이다. 믿음의 훈련을 받고 나니 폭풍이 잠잠해졌다. 훈련이 끝나니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반응하여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을 중심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실제적인 도전을 하며 믿음의 삶을 살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3년동안 그냥 보내신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보게하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하신 것이다. (히12:2)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인공 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잘 지어야겠다는 단순한 것만 생각하시는게 아니고 그 후에 있을 구원과 새로운 인생을 이미 바라보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을 수 있는 믿음 갖길 바래요. 믿음이라는 것은 도전적인 것이다.

2017년 한해가 거의 지나갔다. 지금 나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원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생존의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삶을 살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길 바래요. & 되어질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바래요. 작년과 같은 믿음, 똑같은 사람을 바라보지 마세요. 예수님과 같이 물 위를 걷는 믿음의 삶을 도전하길 바래요.

Sunday, October 15, 2017

2017-10-15 (CS데이, 정의호목사님) 잃어버린 삶을 회복하라 (눅19:1~10)

사람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목적이 있는데, 가장 큰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전력투구하며 산다. 돈에 행복을 찾으면 돈버는데 전력투구 할 것이며, 공부, 학위도 마찬가지이다. 정작 그것을 성취하고 누리는 사람은 성취하고 누리는 순간부터 불행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이다. 그 시대에는 금이 돌처럼 흔했고, 궁전은 금으로 칠해져있지만 전도서(솔로몬이 지음)에 보면 인생은 헛되고 헛되도다고 했다. 인간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존재이다. 좋은 집, 좋은 일터, 좋은 자동차를 가져도 공허한데, 왜 그러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온전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것을 많이 채우면 채울수록 인생은 더욱 공허하다. 아까운 세월을 다 지난간 후에야 후회하고 낙심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특별하디.

1.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삭개오

예수님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이번 삭개오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가장 처량한 직업이 세리였다. 아주 못된 직업이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런 직업을 택하면 안됐다. 삭개오는 키도 작고 변변치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출세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나쁜짓(세리)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일제시대에도 동일했다. 그가 수십년 동안 살면서 세리장이 됐고 사람들의 멸시, 고독, 외로움의 끝에 있었다. 주변 가족, 친구, 친지를 잃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사는 동안에 혹독한 삶을 살았다. 이건 은혜의 때이다.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워서 그렇지 그때야 제대로된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딱 한번, 자기 인생을 깨어칠 때이다. 왜 우리 인생ㅇ CNN에서조차 보도된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들은척 만천 했을텐데. 세상에 어느 종교인도 세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 예수님을 만난 소원이 들어온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소원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자 할 때 이런 방해들은 항상 있다. 돌파하는 자가 예수님을 만난다. 어떻게든 만나고자 하는 소원이 강해야 만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포기하지 않는다.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체토이 강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강한 자가 만난다.

2. 삭개오를 만나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찾고자 할 때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래요. 준비된 자의 특징이다. 준비된 자는 예수님이 불러주시면 바로 반응한다. 부자인 자기 소유를 반을 주고, 억지로 빼앗은 경우 네갑절로 값겠다고 했다. 회개이다.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인생이 변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조건 복만 받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죄를 회개개하는 사람에게 (9)와 같이 선포했다. (요1:12~13)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죽어도 영원히 산다는 것을 믿길 바래요.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지만, 죄를 지어서 마귀에 속한 것이다. (눅5:32) 내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없지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이 시간에 예수님은 그럼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인생을 생각해보길 바래요.

Sunday, October 8, 2017

2017-10-08 (주일예배, 강국정목사님) 메마른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 (열왕기하 3:9, 13~20)

메마른 영혼에 개천을 팔 때 성령이 임할 줄 믿습니다.
명절을 통해 먹고 쉬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세상의 것을 취해도 허무하다. (요7:37, 37) 명절 끝날은 이스라엘의 초막절을 말한다. 지금이 초막절 기간이다. 초막절은 2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것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기억하는 날이다. 실제로 지금도 아파트 베란다에 초막을 지어서 지낸다. 이런 엄청난 날 예배를 하는 날에도 이런 것에도 생수가 흐르지 않으니 나(예수님)에게 오라고 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세상 것을 취하고 마신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다. 예수님께 나올 때 생수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영적전투에 비교한다. 우리 삶에도 생수가 떨어질 때가 있다. 이런 생수가 떨어졌을 때 세상 왕도 해결할 수 없고 나 자신도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이 메마른 골짜기에 생수를 흘러넘치게 하신다고 하셨다.

1. 엘리사를 찾아 온 세 왕들 (9, 13~14)


본문에서 세 왕은 엘리사를 찾아왔다. 이 왕들은 전쟁 중에서나 선지자를 찾는다. 이 세왕 중 이스라엘 왕인 여호람 왕은 엘리사를 찾아올 왕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아합왕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더불어 악한 것을 섬겼다고 했다. 모합왕은 아합왕 때까지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쳤는다, 아합왕이 죽고나서 배반해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래서 모합을 치러 가다가 7일 째 되던 날 식량이 다 떨어졌다. 여호람왕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나보다 할 때 하나님을 섬기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선지자가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 때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여기 있다고 보고했고, 엘리사를 찾아나섰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엘리사를 오라고 한게 아니고, 찾아간 것이다. (약4:6) 하나님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찾아나서는 자에게 함께 하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승리의 비결은 우리가 지식이 많고 가진게 많은 것에 달린게 아니고 겸솜의 갑옷을 입을 때 승리의 비결임을 믿습니다. 겸손함으로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시고 승리를 주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7일을 달려간 그 곳에 어떻게 엘리사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한시의 오차도 없이 그 때 그 시에 엘리사를 보내신 줄 믿습니다. 그 구석구석을 다닐 때 어찌 그 구석에 하나님의 엘리사와 같은 자를 예비했는지 깜짝 놀랄때가 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쪽에 서면 누구를 만나든지 참선지자를 만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사밧왕은 여호와께 물을만한 선지자를 찾았던 것이다. (잠8:17)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것이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기만 하면 만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여호람왕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기 위해서 엘리사를 그곳에 두신 것이다. (13) 당신은 왜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섬긴 바알과 아세라에게 자기 왜 자신에게 왔는지 1차로 믿음의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때 여호람왕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에게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성령의 물을 부어주실 분은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가는 곳마다 영적전투인데 바알과 아세라, 무당을 찾아가서 해결받을 수 있는게 아니고 여호와만이 승리를 주시고 해결해주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여호람 왕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단에 불을 내리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 지금의 난국을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뿐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골짜기에 물이 나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엘리사에게 나온 것이다. 유다왕 여호사밧왕을 보아서 당신의 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여호사밧왕과 같은 믿음의 동역자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와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 전쟁의 전략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래요.

2. 엘리사를 통한 지혜의 말씀 (15~17)


물이 없을 때 샘물을 파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참선지자 엘리사를 찾게 했고, 지혜의 말씀을 엘리사는 받고 선포한 것이다.

1) 거문고 탈자를 불러오라 (15)


전쟁 중에 물이 없는데 양수기를 동원하라든지 땅을 파라는게 아니고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라고 했다. 이 말이 수긍이 되나요? 말씀이 선포되면 순종하는 착한 사람이 되길 바래요. 수긍이 안되지만 왕들은 순종했다. 거문고를 탈 때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임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닿으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어떠한 일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찬양한다. 전쟁에 지고 가축들은 다 죽을 지경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하는 것이다. 모압이 공격할 때 수색대가 앞에 가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찬양대를 앞세운 것이다. 이 때 모압과 암몬의 자손들이 패한 것이다. 죽게 되었을 때 찬양으로 영광올리길 바래요. 그 때 승리가 임하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2)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 (16)


골짜기를 많이 파라고 한다. 이 골짜기에 물을 부어줄거니까 또랑을 파지 말고 개천을 많이 파라고 한 것이다. 전쟁도 급한데 골짜기를 많이 파라고 한다. 믿음으로 개천을 파라고 한 것이다. 그럴 때 놀라운 믿음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히11:1) 이미 실상을 붙잡은 것처럼 믿음으로 파라는 것이다. 비가 오면 막 파는게 아니다. 이런 기이한 일은 2천년 전에만 일어난게 아니고 메마른 직장, 가정, 우리 영혼에 일어나는 것이다. 가족의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개천을 파면 하나님께서 생수를 가득 넘치게 부어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바래요. 말씀에 순종해 전도의 개천을 파라는 것이다. 전도의 개천을 이번 컴에 계속 파길 바래요. 기도의 개천을 계속 파고 선교의 개천을 파라는 것이다. 방글라데시 선교팀도 이슬람의 세력인 곳에서 개천을 판 것이다. 그냥 개천만 파라는 것이다. 개천을 파서 물을 채우라고 하면 쉽지 않다. 하지만 개천을 파고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것이다. 개천을 파기만 하면 메마른 골짜기에 가득하듯이 우리 영혼에 시원하게 채워주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일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큰 일이 아니고 작은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에 비하면 이런 일은 작은 일이라고 한 것이다.
자기가 계속 파내려가면 지치는 것이다. 그 곳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본문 말씀처럼 지혜의 말씀을 주신대로 개천을 파기만 하면 그 메마른 골짜기에 물을 가득 채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길 바래요. 생수의 강물을 채워주신다.

3. 모압도 넘기시는 하나님 (18~20)


너희들 앞길을 막고 너희를 배반한 모압을 초토화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타이밍을 잘 보아야 한다. 개천에 물을 바로 가득하게 하는게 아니고, 모압을 바로 이기겠다고 하신게 아니다. 물을 채우고 모압을 이기게 한 때를 잘 봐야 한다. (20) 아침에 소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다. 번제와 달리 피 없는 제사를 말한다. 전쟁은 항상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아침에 일어나서 소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내가 여호와임을 너희가 알게 함이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러한 일도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소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중심은 다급하고 바쁠 때 전쟁 중에 다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도 주시지만 구하지 않은 은밀한 것도 주신다는 것이다. 물을 채우실 뿐만 아니라 구하지도 않은 모압과의 승리도 주신 것이다. so 우리가 하나님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가면 전쟁에 승리하게 하시고 생수가 넘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가고 있을지라도 아침에 소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듯이 세상의 승리를 우리에게도 주실 것을 선포합니다. 아침에 크리오채플에서 기도하는데 얼마나 기쁨을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기도하는 개천을 파는 곳에 있는 것에 너무 감사했다.

명절 후 주님께 나올 때 생수의 강물을 채워주실 것이다. 공급받은 생수를 통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선포합니다.

Sunday, October 1, 2017

2017-10-01 (추수감사주일 정의호목사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17:11~19)

우리는 추석이 낀 주일을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고 있다. 우리는 주님을 의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없다. 공기, 햇빛, 물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데 그걸 당연시한다. 당연한게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입을것, 먹을것을 주신 것이다. 뉴스의 절반 이상이 나쁜 소식이다. 이런 많은 사건들 사이에 우리는 여기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도, 우연되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시면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받고있는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불평하고 은혜없는 얼굴을 하고 다닐까요? 똑같이 살면서도 당연시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 어떤 표정이 나올까요? 은혜누리는 방법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것이 은혜의 지혜이다. 은혜받은 성도가 은혜를 잊어버리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벧후2:20)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좋은 상황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저버리면 불신자보다 더 나쁘고 악하다. 안티기독교모임의 80%~90%가 이전에 교회 다녔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은혜를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것에 문제가 많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은혜있다는게 영적인 원리이다.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받은 것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 되길 바래요.

1.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


그 마을은 나병환자들이 모여사는 촌이 있었는데, 나병환자아기 때문에 멀리 서서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가족이라도 다른 사람과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죄는 거룩한 것과 분리되는 것이다. 절박함이 그 사람의 목소리에서 나타난다. 예수 선생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부르짓었다. 누구나 기도할 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까? 나의 의가 살아있으면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은 자존심 상한 말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이 부르짓는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이 깨달아지는건 큰 축복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보시고 "가서 너희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아도 제사장에게 나았다는 확인증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서 보이라고 한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나은 상태가 아니다. 이런때는 가면 안된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 10명은 믿음으로 제사장에게 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가는 도중에 고쳐주신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믿고 가는 도중에 그 믿음을 보고 고치시는 것이다. 순종이 먼저이다. 아무런 값지불 없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깨끗히 나았다.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런 은혜를 기억하길 바래요. 은혜는 당연한 것, 마땅히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의 은혜임을 믿길 바래요. & 은혜받으면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가 없으면 이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


나은 후 1명은 가던 길을 돌아서서 하나님께 영광돌렸다. 나머지 9명은 은혜만 받고 그냥 갔다. 영광돌린 1명은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돌아왔다. 자기를 고쳐주시고 은혜주신 주인을 찾아서 다시 돌아왔다. & 예수님 발아래서 발을 붙잡고 감사해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 1명은 이방인(사마리아인)이었고, 그냥 간 9명은 유대인이었다. 물론 모두 기뻤지만 예수님 마음은 착찹했다. (17) 그 아홉명은 어디 가있느냐고 하신 것이다. 그 9명은 너무 기뻤지만 그 표현 대상이 달랐다. 예수님은 10명 모두 나병을 고쳐주시는 것에 끝나지 않은 것이다. 고치신 후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셨다.  병 고치신게 끝난게 아니다. 나머지 9명은 병 고친게 끝난게 아니다. 치유에 마무리를 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18) 이방인을 강조했다. 사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아서 안돌아와도 되는데, 꼭 돌아와야 하는 유대인 9명은 어디 갔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돌아와서 감사를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괘씸한 사람이 은혜를 베풀었는데 배반하는 사람이다. 그 아홉명은 가족에게, 친구에게 온갖 사방에 가서 병 나았다고 자랑하며 다닐 것이다. 영광을 다 자기가 취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병만 고쳐주시는 것에서 끝내지 않으신다. 나병은 죄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병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격리시킨다. 나병이 나았다는 것은 죄가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기도할 때는 생명을 다해서 기도하다가 병이 나으면 하나님을 떠나거나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는 9명의 유대인들은 그 은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더 나아가서 사마리아인은 고쳐줄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을 것이다.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 9명의 나병환자들은 자신의 나병 때문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이 기쁨이고 감사함임을 생각하면 더 감사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임을 믿고 반대로 해보세요. 나에게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그것조차 선하게 사용하시는 분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다. (19)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셨다. 고침받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도 믿음이라고 하셨다. & 그 믿음이 구원이라고 하셨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많이 나온다. 그 중에 유지하고 지킨다는 의미도 있다. 한번 은혜받았다고 해서 그 은혜가 유지되는게 아니다. 즉, 고침 받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계속되는 치유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그것을 유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지가 쉬운게 아니다. 한번 은혜 받고 병이 나았다고 저절로 유지되는게 아니다. 하나님 은혜를 배반하는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요5:14) 나은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다시 죄를 지으면 더 심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은 영적인 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감사에 인색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추수감사예배는 농사짓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해동안 나에게 주신 건강, 직장, 가정, 태어나게 한, 결혼, 자녀, 교회에 있게된것들이 저절로 된거라고 생각하나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시 여기는 것을 고치기 위해서 예배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부끄러운 모습이다. 내가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게 맞는거 같지만 그건 유대인의 생각이다. 수없이 떠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붙어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명절을 통해 감사로 풍성한 한주 보내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