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30, 2017

2017-04-30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 (눅5:37~39)

세상에는 크고 작은 싸움과 갈등이 있다. 그 중에서 옛것을 지키려는 부류와 새로운 것을 하려는 부류가 싸운다. 변화를 원하는 부류와 원하지 않는 부류가 싸운다 많이 가진 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력 한다. 변화와 개혁을 위한 강력한 열망을 가지고 & 값지불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면 사회에는 변화가 없다. 변화는 원하지만 값지불을 원치 않으면 그 국가의 사회 시스템에 변화가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안정된 삶을 위해 교회에 찾아오기도 한다ㅏ,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길 원하는데 그분이 예수님이다. (눅12:49)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신 것이다. (마10:34)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화평케만 하고 불안한 인생을 안정시키길 우리는 원한다.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를 주길 원하시기 때문에 그 전에 변화와 개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먼저 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려고 해서가 아니고 내가 은혜 안에 있다면 어떤 사람이더라도 변화, 개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말씀은 원하지만 변화는 원치 않는다. 변화 없는 은혜를 너무 당연시한다. 정말 변화를 원하시나요? 아픈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와주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낳길 원하느냐?"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느냐이다. 신앙 오래 했거나 과거에 큰 은혜를 받았더라도 새로운 변화,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길 바래요.성경에서는 "넌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다. 상한 갈대로 예수님은 먼저 꺽지 않으신다. 내가 새롭게 되길 원하면 하나님은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소망 없는 인생에도 하나님은 그 인생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내가 변화를 원치 않는다면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1. 새 시즌


새 포도주를 담그는 시즌에 됐을 때 새부대가 필요한 것이다. 새부대가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에 다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새롭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는 그 시즌에 따라가야 하는 것ㅇ이다. 우리에게 새 시즌, 새로운 때를 주시명 우리의 인생도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이만큼 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때를 모르는 것이다. 더이상의 변화를 원치않고 내가 그것을 붙집가 산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새 일을 따라갈 수가 없다. 정말 마음이 가난한 사람 또는 겸손한 사람이 우대받는다. (눅1:53)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린자가 되길 바래요.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이고 변화가 없다. 부한 자는 죽으면 예수님 앞에 가져갈게 앖다. 내가 굶주림이 필요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우리 모든 신앙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다. 회사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절대로 정장 입으면 안되다고 하면 이제 그 그준에 따라가는 것은 나의 틀을 깨고 경험과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한번 이 틀이 생기면 깨뜨리는건 너무 어렵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음이 좋으신 분이다. (벧5:6~6) 하나님의 때에 겸손히 따라가기만 해도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2. 새 마음

나 중심의 마음에서 하나님 중심의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뭘 위해 이 일을 하길 원하냐? 뭘 얻길 원하냐고 무러볼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 일을 행할 때 종교인들이 행하지 못했던 것은 자존심 때문인 것이다. 나를 위해 신앙하면 변화가 어렵다. 새사람이 되길 원하면 내 스타일을 없애야 한다. (잠25:4) 아침에는 옷이 깨끗했는데, 저녁에 보면 옷이 더러워져 있고 오래되서 헐거워지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하늘영광, 이세상의 부귀영화도 버릴 수 있는 분인데 우리에게 뭐가 아쉬워서 뺏아가겠습니까?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사 그릇을 준비하길 바래요. 버릴 수 있는 도전과 결단을 가지길 바래요.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에게 주길 원한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신앙하다가 천국에 가면 너무 불편할 것이다.

3. 새 변화

포도주는 변화의 힘이 있다. 예수님 말씀에 묵은 포도주가 의미하는건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새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길 바래요. 더이상 생명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새 포도주를 간구하길 바래요. 내 삶과 신앙에 변화가 없고 형식과 모양만 있다면 변화가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딤후3:5)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견건한 신앙, 힘있는 신앙을 해야 한다.
사울왕은 십수년간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기름부음 등이 없어졌다. 그래서 왕의 자리를 지키기위해 싸웠다. 나의 자리 지키는 신앙하면 안된다. 한주가 변화된 간증, 새롭게 된 것을 나눌 수 있는 신앙을 해야 한다. 새리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세상에 나가가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은혜가 아니라, 지금도 내 생명을 변화시키는 그 변화인 것이다. (시92:10) 우리가 과거에 받은 어떠한 은혜보다 더 강력한 것을 주길 원하신다. 그래서 더영적인,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살길 원하신다. (행10:38) 주님과 함께 함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내가 작고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고 주님의 시즌을 따라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해요. 주님이 하시는 새로운 일에 쓰임받는 신앙 되세요.

Sunday, April 23, 2017

2017-04-23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믿음의 경주를 하라 (히12:1~2)

사람들은 내가 당하는 문제를 크게 보인다. & 내가 사는 시대가 힘든 시대인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힘들었고 편힌 시대는 없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하다고 사람들의 신앙이 어려운건 아니다. 오히려 강하기 때문에 더 강해질 수 있다. 진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조개 안에 이물질이 들어가고 조개가 아프니까 몸에서 분비물이 나오고, 그래서 다듬지 않아도 고운 진주가 나오게 된다. 즉, 아프게 하는 이물질과 싸우기 위해 진주가 되는 것이다. 고난을 싸우기 위해 내 믿음이 좋아지는 것이다. 신앙이 좋길 원하나요? 좋은걸 얻을만한 값지불이 필요하다는 걸 알길 바래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경주를 포기하지 말고 달려가길 바래요. 장거리기 때문에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마치는게 중요하다.

1. 버리라


믿음으로 경주를 하고자 한다면 세상에 의지하고 가진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믿음의 경주를 잘하길 원한다면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못버리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이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 것을 빼앗기기 위해 다투고 싸우고 경쟁한다. 믿음이 있다면 버릴 수 있길 바래요.
달리기 위해서는 가벼워야 한다. 어느 달리기 선수가 경기에서 준비를 못해서 등산화를 신고 가면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완주도 어려울 것이다.

1) 모든 무거운 것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필요없는 것은 내려놓으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무겁게 해주는 것 중에 나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높아지는 것이다. 많이 갖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세상을 많이 알수록 걱정도 늘어난다. & 세상에서 많이 보고 듣는 소식 때문에 오히려 두렵다. 보고 듣는것 때문에 기도, 찬양, 예배 때 집중이 안된다. 이 세상은 보고 듣는 것으로 내 마음을 빼앗아간다. 컵에 물이 다 채워져 있으면 더이상 새 물을 채울 수 없다. 내 마음에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면 더이상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
어려서 받은 상처도 버려야 하는데, 버리려 하지 않는다. 버려야 되는데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 너무 어려서부터 들었던 말이 진리의 말이 아닌데, 잘 버리지 못한다. 주님 앞에 내려놓길 바래요. 내 힘과 지혜로 해결하고자 하는데 안됩니까? 예수님은 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합니다. 염려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길 바래요. 인생 전체를 던지길 바래요. 그러면 주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내 문제를 맡기고 그냥 따라가면 된다.

2) 얽매이기 쉬운 죄


얽매인다는 것은 덫 또는 철조망 등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은 전통, 경험, 인권 등의 이름으로 죄를 합법화 한다. 하지만 죄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해서 죄가 아니라는 문화와 철학이 있다.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사단이다. 이 죄는 우리를 덫과 같이 얽매인다. 우리가 죄를 억지로 짖는게 아니고 내가 좋아서 유혹이 되고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시험이 올때 유혹을 이기는게 중요하다. (마6:13) 시험, 유혹은 누구에게나 온다. 하지만 유혹이 올 때 이기길 바래요. 유혹이 오면 피해야 한다. 술이 유혹이 되는 사람이라면 술자리를 피해야 한다. 죄가 유혹이 올 때 피해야 하는데, 그 환경을 내 삶에 계속 남겨두고 우리는 계속 둔다. 그것을 과감하게 끊으시길 바래요. 사단은 우리를 유혹할 때 유혹이 될만한 것, 약점, 약한 부분으로 유혹한다. 나의 강한 부분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넘어진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안짓는게 중요하지만 누구나 죄를 안지을 수 없다. 그러면 누구나 털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길 바래요. 내가 그보다 더 악한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나의 죄를 들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나오길 바래요.
죄의 속성은 작게 시작해서 우리의 영혼을 점점 결박한다. 나에게 있는 얽매기 쉬운 죄가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신앙할게 아니라, 그것을 내려놓으시길 바래요. 믿음으로 신앙하려고 결단할 때 그것을 유혹할 약한게 있다면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와서 자유해지길 바래요.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길 바래요.

2. 바라보라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1) 믿음의 증인들


세상사람들을 바라보면 믿음을 빼앗긴다.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증인들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빈자리 없이 허다한 경기장의 관중석에 빽빽히 믿음의 선배들이 앉아서 우리를 응원한다. 증인들은 법정에서 증언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정에 섰을 때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증언을 해줄 것이다. 우리를 다 지켜보고 있다. 우리 한사람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단은 반대로 말한다. 나 혼자 힘든 외로운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를 조롱하고 정죄하는 원수의 소리만 들린다. 사단의 무기는 두려움이다. 두려운 가운데 어떤 일을 결정하면 안된다.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결정하면 믿음의 경기를 할 수 없다. (왕상19:4) 믿음을 지킬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을 지켰는데, 주여 이제는 저를 거둬가옵소서 라고 죽음의 영에 잡혔다. 누구를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믿음없는 사람, 세상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나만 이길을 가는게 아니다. (딤후2:3) 바울이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마지막에 쓴게 디모데서인데, 여기서 믿음의 길,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예수를 믿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가족이 희생한다.
100년 전 복음을 위해 조선에 온 사람은 적어도 의사 이상이었고, 20~30대 젊은이였다. 기본적으로 자녀들도 희생 또는 이후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면서 복음을 전한다. 내가 누구의 말을 들을지 보고 있나요?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래요. 주님께 나올 때 우리를 짓누르는 사단의 세력에서 자유를 얻길 바래요. &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을 응원하길 바래요.

2) 하늘의 상급


믿음으로 달려갈 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왜 낙담하나요? 지금 당장 이땅에서 거두지 못할 때 실망한다. 우리에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히11:6)  우리 가운데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나를 알고계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세상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지만 왜 열매가 없냐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일, 하나님을 위해 살 때 상급이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이것을 바라봐야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상이 없는 사람은 이 땅에서 모두 영광받은 것이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신앙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상급이다. (히11:24~26) 모세는 하나님 나라에 보화를 알고 실제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왕궁에서 누릴 것보다 천국에서의 삶을 믿고 바라본 것이다. &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다. 이것이 보여야 실제적으로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부럽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무엇보다 영광스런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믿길 바래요. (딤후4:8) 이것이 믿어지길 바래요. 이런 믿음이 없어서 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길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영광스런 삶을 볼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쓴 모습을 바라보길 바래요.

3) 인내하라


인내라는 것은 소극적인게 아니고 안주하는게 아니다. 사건과 고난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인내할 수 있다. 나의 믿음을 흔드는 고난을 만나면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달라고 구하길 바래요. 신앙은 소극적인 인생이 아니다. 세상의 이론,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삶을 흉내낼 수도 없다. 이런 싸움에 있어서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믿음의 성장과 진보가 있길 바래요. 옛날에 받은 은혜만 말한다면 뒤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안주하고 퇴보하고 있는 우리에게 성장을 주시는 것이다. 세상사람과 싸우지 말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와 싸워서 돌파하길 바래요. 그래서 새로운 믿음을 구하길 바래요. (삼하3:1)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과거의 믿음보다 오늘의 믿음이 더 좋고, 오늘보다 내일의 믿음이 더 좋다. 믿음은 퇴보하는 것이다. 과거의 믿음에 안주하는 사람은 믿음이 퇴보하는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달려가길 바래요.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시작은 화려하지만,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사람이 먼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역전하는 하나님의 믿음을 받길 바래요. 세상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우리로 하여금 머물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갈수 있도록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바랍니다. (요일5:4)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세상에 끌려가지 말고 안주하지 않길 바래요.

Sunday, April 16, 2017

2017-04-16 (부활주일예배, 강국정목사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라 (막16:1~11)

부활절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교회 주변을 보면 벗꽃과 개나리꽃이 예쁘게 활짝 폈습니다. 이런 시기에 마음을 확 풀고 열길 바래요. 부활의 영광에도 마음을 활짝 열길 바래요.
부활의 뜻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 비난, 조롱 등을 다 감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드리는 예배가 부활절 예배이다. 이런 고난에 동참한 우리 가운데 부활할 때 함께 부활하고, 예수님이 보좌에 앉을 때 그 옆에 같이 있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 십자가의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질 때 부활의 영광을 감당할 때 부활이 내게 임할 줄 믿습니다. 바로 우리가 죽어질 때 십자가에서 고난주간을 통해 죽어진 예수님을 동참할 때 정과 욕심이 죽어지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의 생명은 없는 것이지만, 죽어졌다면 부활의 영광이 임할 것임을 믿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고 부활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망권세도 없는 것이다. 부활절 예배 이후부터 천국가기 전까지 육신은 이 땅에 있지만 부활의 능력을 선포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첫 증인이 되기를 선포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증거할때 이왕이면 첫 증인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1. 무덤을 찾은 사람들 (`1~8)


예수님을 무덤까지 따라온 사람들은 제자나 이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 여인들 (1~8)


막달라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매(예수님의 이모)였다. 힘쎈 성인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아니고 여인들이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죄사함을 받은 여인들만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까지 따라가서 부활을 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눅7:47)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적게 받은 사람이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따라가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갈 것 같지만, 사실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향품을 사다가 두었다가 무덤에 찾아가서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미리 향품을 사둔 것이다. & 오후나 정오가 아니고 해 돋을 때 제일 먼저 무덤에 간 것이다. 얼마나 향품을 발라드리고 싶으면 미리 사뒀다가 일찍이 무덤에 갔을까요. 이런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면 예수님의 부활을 첫 증인이 될 줄 믿습니다. 율법적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서 준비한다면 예배가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봐야겠다고 하면서 가는데, 무덤의 돌문은 어떻게 할까 하면서 교제하면서 눈을 들어보니 벌써 무덤문을 막고 있는 큰 돌이 열려져 있던 것이다.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난 것이다. (마28:2) 우리는 큰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만나러 가면 앞에 어떤 장애물이라도 옮겨질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 주위에 진치고 있음을 믿으시길 바래요. 하나님의 생명싸개로 보호하시고 예비하심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직장의 큰 돌이 막혀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나가시면 이미 옮겨놓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될 것을 사모하시면 놀라운 증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 (7)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전해듣고 곧바로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고,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갔다. 천국을 침노하는 마음으로 먼저 들어가세요.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다. & 나중에 요한도 들어가서 봤는데 두 제자의 행동이 안타깝다. (요20:10) 부활의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장면을 목격했으며서 집으로 돌아간건 너무 안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 같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증언을 하지 않았을까요? "기쁨의 교회 성도들이 온 동네 다니면서 부활을 증언하니라"고 성경을 고치고 싶지 않으세요? 예수님을 이론과 지식으로 알때 바리새인과 같이 냉소적으로 예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다. 부활생명을 얻은 사람은 죽을 것 같은 상황을 만나도 그것을 통해 십자가를 만나고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을 보는게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길 바래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문제때문에 목숨을 주시고 죽으셨다. 이 값지불을 통해 부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 이뤄놓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길 바래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2. 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9~11)


이 세상에서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다. 잠깐 살나난 사람이 있긴 한데, 나중에는 다시 죽는 것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까지 사시는 분은 예수님 한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길 바래요. 예수님은 부활 후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실 때 목동에게 알리셨고, (막16:9) 부활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때에 막달라마리아의 모습이 어땠을까요? 귀신 들리면 주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또한 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둠의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어둠의 세력(음란, 혈기 등)들이 일곱귀신 들린자와 크게 다를것이 없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새것이 되었고, 모든 악한 것이 떠나가는 것이고 이런 마리에에게 먼저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고전15:19)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놀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는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세상 모든 혼적인 만족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런 것들이 모두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게 이생 뿐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문제를 통해 예수님 부활에 동참하길 바래요. &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길 바래요.

(요11:25~2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다고 하신다. 죽게된 것은 당연히 살아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말씀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막달라마리아가 귀신들린 것을 쫒은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래요.

Friday, April 14, 2017

2017-04-14 (금요예배, 송경훈강도사) 그의 죽으심을 본받자! (빌3:7~11)

우리는 흔히 롤모델이라고 한다. 좋은 장점을 살려서 나에게 적용해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이다. 어느 영역이든 길을 개척하고 자신의 분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 영역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본받길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믿음이 좋거나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존경스럽다. 기도가 언제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몇시간을 앉아있는데도 깜깜하고 어두운 터널 안에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반면 말씀에 확신을 주실 때가 있다. 이럴때는 기도가 너무 재미있다. 신앙이 이런 것 같다. 동기부여가 되고 흥미로우면 신앙이 어려운게 아니고 재미있어진다. 그것은 내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가치있게 여기는게 무엇인지 보면 그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겸손한 인격 앞에 닮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 가장 완벽한 롤모델은 예수님이다. 우리같은 연약한 인간이 가장 완벽한 예수님을 따라 산다면 고난을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을 통해 나는 죽고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자고 바울이 권면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김


바울이 자신에게 있었던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알게되면서이다. (7) 바울은 유대인이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출신이었다. 그것을 최고로 여기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게 될때 그의 인생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이제는 더이상 그것에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중심을 가지고 산다. & 그것을 흩어놓거나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주식을 하지만 주식은 그 회사가 존재하고 있을 때에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회사가 망하면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가 귀중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휴지조각처럼 된다. (벧후3:18)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를 알아갈 때 우리 삶에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급이 있다. 그 급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진다. 오디오 매니아들은 비싼 스피커에 비싼 앰프를 사서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을 듣는 이유는 일반 스피커로는 안 들리는 음이 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듣다보면 싸구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듣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을 들으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이 들지만, 한차원 높은 것을 듣게 되면 이전 것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8) 예수님의 가치가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도바울이 표현한 잃어버리다는 표현 중에는 손해보다는 의미가 있다. 바울이 지금까지 쌓아뒀던 명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포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가 얻은 것은 그리스도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바꿀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13:46) 내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얻으시길 바래요. 그러려면 내 안에 기득권,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더이상 포기하거나 하기 어려운 것이다. 구지 손해를 보면서 까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내 것을 움켜쥐고 손해보려고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기 쉽지 않다. 내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인 것이다. 진주장사가 값진 진주임을 알아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얻었듯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얻음


자신의 유익했던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은 것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 또다른 하나를 포기할 때 버릴 것과 얻을 것의 가치를 비교해봐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8) 세상에서 스마트한 사람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겠지만,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다. 배설물은 똥이나 쓰래기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삶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신앙을 하면서 내 영혼을 구원하는 것 외에 뭐가 더 중요하겠냐? 돌아설 것은 돌아서고 버릴 것은 버려야 새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십자가의 부활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의 부활을 원했던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에서 핵심이다. 예수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죽어야 다시 사는 것이다. 내것을 포기하고 손해보려 하지 않냐? 죽어지기 싫어서 강한 것을 보인다. 하지만 그게 진짜 강한 것이냐?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형벌의 댓가인 십자가를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이 강한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고 원통해서 절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어지는 것을 통해 부활이라는 영광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고난을 원했던 것은 그 후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본 것이다. 사람들은 고난이 있으면 빚겨가고 싶지, 고난 받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고난은 원치 않으면서 영광만 바라본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예수님의 영광에 절대로 참여할 수 없다. 예수님도 고난을 감당하셨다. 근데 예수님은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고, 부활의 영광만 보여줄 충분한 능력이 있는 분이다.

1) 그의 죽으심을 본받음

사람은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 그런데 누구든지 좋은것만 본받고싶어 하지, 나쁜 것을 본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게 끝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에는 능력과 생명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많은 사역이 있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부활이 핵심 사역인 것이다. 믿는 우리의 삶도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살아야 한다.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갈5:24)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육체와 정욕, 탐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 예수님을 얻은 것이다. & 그분의 죽으심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11)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 그 전에 십자가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2) 부활에 이름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는 우선 십자가의 값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어져야 한다. (막14:34~35) 이것이 십자가에서 내가 짊어져야 할 값지불인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지 잘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십자가가 없어도 얼마든지 신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없는 것은 능력이 안되는 것이다. 부활의영광을 맛보기 전에 십자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신앙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영광을 원한다면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생각해봐야 하고 짊어져야 할 것이다. 내 앞에 십자가가 힘들고 여럽더라도 포기하면 부활의 영광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자 능력이다.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신앙 되길 바래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단. 그래서 우리도 마땅이 그러한 길을 살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두셨다. 십자가로 인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살길 바래요.

Sunday, April 9, 2017

2017-04-09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생명을 얻는 천국의 원리 (요12:24~25)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잘 알고 둘러봐도 우리의 눈은 무엇을 다 볼수 있지 않고 알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착시현상으로 옳게 보이지 않기도 한다. 젓가락을 물에 넣으면 휘어보인다. 신앙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아는것 같지만 알지 못하는게 많다. 예수님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23) 우리 편에서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고난인 십자가가 돌아오는데 예수님은 반대로 표현한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다. 로마시대에 십자가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형벌이다. 우리는 십자가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껴야 할 줄 믿습니다. 신앙적인 행위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고난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은 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는 방법이다. 오늘 말씀이 부담이 아니라 소망의 말씀이길 원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사55:8~9)처럼 말씀하신다. 우리와 하나님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있을 줄 믿습니다.
"진실로"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아멘"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이것이 깨달아져서 생명의 길을 가길 원해요.

1. 한 알의 밀의 원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1) 생명을 주기 위해


한알의 밀이 필요한 이유는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씨앗 한톨로부터 시작한다.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이유가 한알의 씨앗을 위해서다. 한 알의 밀알로 오신 이유는 이 땅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들에게도 영적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종교행위로는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이 더러운게 아니고 사람의 손이 더러운 것이다. (롬3:10) 죄인인 나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더럽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는 의롭지 않고 죄인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도록 보일 필요가 없다. 내가 부패한 사람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앙을 하는 것이다. (렘2:13)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하나님을 싫어한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 직장, 안정된 삶, 여가 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 없이도 이것들을 얻으면 만족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이 없다. 이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한 것 같은데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롬5:17) 죄와 사망의 세력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고 죄가 왕노릇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과 천국의 문을 열어준 것을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왕의 자녀로 생명을 누리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 예수님의 생명을 붙잡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낮아짐


저절로 구원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가셨는데, 예수님은 한알의 밀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의 죄를 가져 가시는데 단지 한알의 밀이라고 하신다. 작은 것에 비유하신다.  (마13:31~32) 천국이 얼마나 크고 이 세상 어떤 것보다 큰데, 마지 착고 작은 겨자씨 한 알이라고 비유하신다. 천국은 마치 작고 작은 겨자씨로 시작된다. 예수님이 정말 작은 존재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 낮게 오셨다고 해서 낮은 분이 아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해서 낮아진다고 해서 우리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있어보이려고 허세있게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존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예수님이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지, 예수님 자신을 한알의 밀로 비유하셨다. 내 인생이 가치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나 한사람을 위해 한알의 밀이 되어주셨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땅에 심겨져야 한다. 예를들면 우리가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우리가 일년에 한번 휴가를 가는데, 어느 누구도 지금보다 더 열악한 환경, 나쁜 곳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곳에 오실 때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죄인들 마저 예수님을 무시할 정도로 낮은 곳으로 오셨다.

3) 죽어짐


밀알은 쌀이나 보리보다 더 단단하다. 밀알 안에 있는 생명이 나타나려면 껍질이 없어지는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값지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요1:29)  예수님의 피로만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을 것을 고백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피하시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셨다면 어땠을까요?  Royal Family로 사시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다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생명의 값지불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오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우리의 불순종 거짓, 정직하지 못함 등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위해 단지 육체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으 의도 무너졌다. 십자가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조금도 변호하거나 변론하지 않으셨다. (이사야53:7)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억울한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자신을 변론하지 않으시고, 채찍질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있었지만 내려오지 않으셨다. 몸에 가시가 조금 박히면 조금 아프지만, 내 가슴에 못 박히는 상처는 우리를 오랜 시간을 아프게 한다. 죄가 없으신 순결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밟히고 조롱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셨다. 예수님 때문이라도 체면 깍히는 것이 너무 괴롭다. 안낮아지기 위해 신앙할 때가 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자신이 만드신 사람들로 인해 인격이 짓밟히고 손가락질 당하고 죽으셨다. 또한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을 모두 버렸다.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멋있는 모습으로 오신게 아니라, 한알의 밀알이 되셔서 땅바닥에 떨어져서 몸과 마음의 깊은 죽음을 경험하셨다.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죽어지지 않으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아셨다. 열매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정하신 천국의 원리가 이세상이 주지 못하는 열매가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우리가 죽어지지 않으면 열매가 없는 것이다.

2. 재생산의 원리


예수님을 영접하길 바래요. 내 주변이 나를 통해 변화되거나 생명이 나타나는 역사가 없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이 사람이 내 안에 있는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열매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고후4:10)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게 될 때 우리를 통해 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내가 죽어지기까지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나의 자랑이 되고 내 의가 되고 내 영광이 되는 것이다. 나의 자존심, 나의 체면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원리는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의 원리는 반대이다. (고후4:12) 바울은 분명하게 사망이 내 안에 역사하는 것을 통해 생명이 역사하는 것을 고백한다. 내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낮아지지 못하는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원리, 한알의 밀알의 원리, 재생산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한알의 밀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하는 것을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많이 벌어야 하지만, 천국은 나를 위해 아껴두고, 주님을 위해 죽지 않은 채 천국에 가면 어떻겠습니까? 공사장에서 일하는데 손이 어린아이처럼 곱다면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낮아지기 싫어하고 혈기부리고 나를 위해 아끼고 아겼다면 어떻겠습니까? 나를 위해 깨어진 주님 앞에 주님을 위해 한번도 깨어진 적이 없는 내가 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죽은 적도 없고 한알의 밀이 되지 못한 것은 많이 부끄러울 것이고, 후회스러울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더 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지지 않아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한알의 밀이 되어서 오셨다. 사람들에게 밟히시고 깨어지시고 죽으셨다. 이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하길 바래요. 내가 받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내가 낮아지고 죽어짐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나눠주는 한알의 밀이 되길 바래요.

Friday, April 7, 2017

2017-04-07 (금요예배, 김민성전도사님) 얍복강의 기도 (창332:22~31)

우리가 삶을 살때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된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강하게 되기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기도를 하게 되는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나,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기도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이렇게 강하게 기도해야 우리가 강한 자를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기도하러 올때는 거지 나사로처럼 오지만, 나갈때는 슈퍼맨처럼 강하게 되서 나가려고 여기 풀철야에 온다. 예수님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기도를 보여주신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를 어떻게 했을까요? (마26:39)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하고 인간의 구원과 관계 있어서 영적전투가 가장 치열한 이 상황에서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자신의 강한 것이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는 것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던 것처럼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문제를 만났을 때마다 기도를 하는데, 내가 강해지지 않는 것을 알고는 지치고 기도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데 자고 힘이 없다. 기도해도 강해질 가능성이 없어서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고 약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신이 사는게 아니고 죽는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자녀로 부르셨다면 환경을 만들어서라도 우리가 죽어지는 기도의 자리로 데리고 오신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자신이 죽어지고 포기되어지고 하는 기도를 경험해본 사람은 그 안에 얼마나 놀라운 비밀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오늘은 자신이 강해지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약해지고 포기되어지는 기도를 보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을 택하시고 기도에 담궈져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그 안에 살아서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1. 언약의 하나님


1) 야곱을 부르시다


야곱이라는 말의 뜻도 형의 뒷굽치를 잡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의 특징이나 그 안에 뭐가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멋지게 보이는 첫째 애서를 택하는게 아니고 사고를 가장 많이 칠것 같은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다. 기도의 대상으로 신뢰가고 믿을만한 사람을 택한게 아니고 도망갈 가능성이 많은 야곱을 택해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맺은 언약은 세상의 그것과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계약을 맺을 때부터 손해볼 준비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계약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우리는 언제나 계약을 파기하고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야곱은 형이 나간동안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주실 축복을 뺏았다. 그 전에는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었다. 형을 속여서 축복을 다 가져간 것이다. 형이 그것을 알고 야곱을 죽일 생각을 한다. (창27:41) 800km 밖에 있는 라반의 집으로 피신을 보냈다. (창28:15) 하나님이 이 사람과 계약하면 하실 이이 굉장히 많아진다. 어딜 가든지 지켜줘야 하고, 돌아올 때까지 또 지켜줘야 한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다 이루실 때까지 몇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손해볼 약속을 하신 것이다.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나오게 하기 위해 인내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 야곱을 훈련하시다

너의 삶에 관여해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신 후에 기도의 자리로 반드시 부르겠다는 의미이다. (창27:43~44) 하나님의 훈련의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실 때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홍해를 건넌 후에는 홍해를 닫으셨다. 이 말은 다시는 뒤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을 보니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너의 삶에 관여하겠다는 의미이다. 왜 내가 계획하지 않은 곳에 보내셔서 나를 이렇게 만드시냐고 막 불평한다. 야곱의 경우도 어머니가 며칠 후에 돌아올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결국 라반 아래서 20년을 훈련하고 돌아간다. 내가 불평하면 불평의 황제를 붙여준다. 내가 소심하면 더 소심한 사람들을 셀에 붙여줘서 내가 아니면 셀이 안돌아가게 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다. 야곱은 무려 14년을 일해서 딸 하나를 취한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강한 것을 죽이기 위해서 이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 가운데 나를 부르는 것은 그냥 부르는게 아니고 내 인생에 관여하시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한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못버티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관여하신다.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말씀을 귀하게 여긴다. 이전에는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심령이 가난해지니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창31:3) 얼마나 마음이 가난했으면 800km를 다시 돌아가겠냐? 20년 동안 야곱의 마음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느 강한 것보다 더 강한 것이다. 언약 가운데 택한 사람을 얍복강으로 인도하기 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나오게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20년 하루를 버텼더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2. 직면의 하나님


1) 문제와 직면케 하다


야곱의 최고의 아킬레스건은 형이다. 형은 언제 나에게 와서 나를 죽일 사람이었다. 형이 400명의 장정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22~23) 야곱은 안죽기 위해서 소유와 아내를 시내를 건너게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은 환경과 장소도 어떤 사람은 그것에 문제가 된다. 문제는 개별적인 것이다. 야곱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해결이 되지 않는다. 야곱이 보낸 종과 아내는 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야곱은 뒤에 숨어서 두려워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얍복강 앞에서는 정확하게 드러난다. 이제는 하나님께 나오라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요동하지 않는데, 나는 요동한다.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문제에 관여하겠다,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는 의미이다. 

2) 자신과 직면케 하다.


혼자 남아있을 때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겸손해진다. 예전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볼 때는 은혜이다. 자신이 강하게 살았을 때는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결코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 때가 은혜인데, "나 아직 안죽었거든. 나 살아있어"라고 한다. 죄인에게 가장 큰 은혜는 내가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럽게 보이고, 내가 약한 것이 자랑으로 여겨질 때이다.

3) 하나님과 직면케 하다


자신에게 선한 것이 나올게 없다고 생각할 때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삶 전체에서 기다리신 순간이 이 순간인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이다. 얍복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냥 푸르다는 의미이다. 보통 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땐 그냥 푸른 강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는 기도의 배수진이 치게 될 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계시는 곳이다. 야곱을 만날 가장 전략적인 곳이다. 내가 해결받을 수 없는 문제가 목을 조여오고 버틸 힘이 없을 때 우리는 그냥 포기해버린다. 근데 왜 포기합니까? 여기가 하나님을 만날 전략적인 장소인 얍복강인데요. 하나님이 20년동안 전략적으로 준비한 그 장소이다. 야곱에게는 여기가 팔부능선이다. 오늘이 바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만날 기도의 배수진을 칠 순간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내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땐데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오늘 기도의 배수진을 칠때이다. 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것이 올라온다. 자신에게는 포기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는 포기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전략적인 순간인 것이다.

3. 기도의 하나님


오늘 야곱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기도의 씨름을 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애통한지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게 기도이다. 그것을 들고 나가서 부르짓을 분이 없다면 애통한 것이다. 애통한 문제를 들고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 것이다. 얍복강에서 강력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님과 씨름하다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을 상대로 기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할까요? (24) 날이 새도록 씨름한다. 씨름한다는 것은 격렬하게 기도한다는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은 이기기 위해 애쓰고 힘들고 용쓴다. 야곱도 날이 새도록 기도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내 문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눈 앞에 나와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야곱의 앞에 자신을 죽이려는 형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기도를 해도 중언부언하지 않고 강력한 영적전투 기도를 하게 된다. (25~26) 얼마나 강렬하게 기도했는지 기도의 절박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허벅지 관절을 치시다


나보다 더 강한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강한 힘을 주시라고 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가장 강한 허벅지 관절을 끊어버리신 것이다. 야곱의 가장 강한 곳을 끊어버리는 응답을 주신다. 우리가 처음 기도할 때는 강함으로 나간다. 강하게 해주십시요 한다. 그러고는 안되니 더 강하게 나가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환두뼈를 치신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기도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겸손히 말하고 기도하는게 좋은 기도를 하고 나오는 것이다. 내 가장 약한 것으로라도 하나님이 하시면 이긴다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강한것이 아니라 내 환두뼈가 꺽이는 것이다. 오늘 밤에 환두뼈가 꺽이는 경험을 해보길 바래요.

3) 이름을 바꾸어 주시다


환두뼈가 꺽인 사람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단지 형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게 아니라 옛 야곱이 죽고 새 야곱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27~28)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사기꾼 같았지만, 강한것이 죽고 더이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는 의미이다. 내가 강해졌다는 의미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사람이 얼마나 힘이 쎄야 하나님을 이기겠냐? 하나님이 야곱에게도 이렇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29~30)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인 것이다. 자신이 싸운 분이 하나니인지 몰랐는데, 싸우고 나서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죽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것을 알게된 것이다. (31) 이제는 내가 강하지 않아도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이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약속 안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된 사람의 특징이다. 가장 중요할 때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자신이 죽는 사람의 특징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리신 것이다.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 살기 위해서이다.

기도는 자신이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살게하는 것이다. 야곱이 인생의 배수진을 친것처럼 우리도 힘들게 했던 것을 하나님꼐 들고나가서 기도의 배수진을 칠 때이다.

Sunday, April 2, 2017

2017-04-02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하나님께 응답하라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주부라면 가족을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하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좋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음식을 만드는 재료가 좋아야 한다. 맛있는 김치찌개를 만들려면 김치가 맛있으면 된다. 무엇이 그것을 하느냐, 누가 그것을 하느냐고 중요하다. 하나님이 하실 때도 재료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영적으로 충만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따라갈 수 있느냐이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못따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하길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준비가 될 수 있는 재료로 준비된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이 나를 쓸 수 있게 내가 준비되어야 한다. 나, 부모님을 탓할게 아니다. 아무런 능력도 나타낼 재료가 없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재료를 찾아가는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일할 수 있도록 우리가 좋은 재료가 되어서 하나님께 응답하시길 바래요.

1.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라


어떻게 손님을 대접하느냐가 유대인의 문화이다. 구약에도 보면 아브라함이 손님을 잘 대접했는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다. 이런 중요한 잔치에서 손님을 대접할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나님은 이런 사건을 통해 역사하신다. 우리 인생에서도 내가 대비할 수 없는 문제, 내 능력 밖의 문제가 생긴다. 건강, 물질, 자녀, 인간관계, 주변 환경 등 나를 벗어나는 문제들이 생긴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 자책, 낙담하는건 도움이 안된다. 사건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알고계신다. &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신다. 문제가 없으면 내 능력으로 할 수 있으니 기도도 안하고 하나님도 찾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 문제인데, 기도도 안되고 문제에 눌려서 두려움과 문제에 사로잡힌다. 예배에 올 수는 있지만 근심, 걱정에 눌려서 찬양도 안되고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안생긴다. 패배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세상이 주는 불신앙에 잡힌 것이다. 오늘 마리아는 문제의 사건 앞에서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믿음 없게 나온게 아니다. 어려운 문제를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와야 한다. 나의 문제에만 메여있는 사람은 내 자신도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리아는 남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그냥 스쳐지나가는 문제 앞에서 메여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깨어있어서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고 반응하시길 바래요. 오늘 마리아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동역을 할 수 있던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반응하는지를 봐야 한다. 육신에 잡힌 사람은 세상의 것에 반응하다. 새벽에 아내나 아기가 깨워도 안일어나는데, 친구가 깨우면 차를 가지고 지방으로까지도 내려간다. 우선순위를 바꿔가면서도 반응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반응하길 바래요. 매주 말씀을 들으면 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반응이 없다면 내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설명하고 행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꺼예요. 물을 떠오세요. 그리고 중요한건데 물이 포도주가 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연회장으로 가져도 주면 물이 포도주가 될겁니다."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고 행하시면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바리새인은 열심히 신앙을 하지만 열매가 없는 초라한 신앙을 한다. 그들은 열심히 신앙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있을 진저라고 하신다.

2.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라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때를 따라 한다. (4) 마리아가 요청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해야지 열매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우리는 능력이 임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길 원한다. 하나님의 때가 됐든지 안됐든지 우리는 한다. 이것이 유혹이다.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때에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따라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기다린게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서 기다리신다. 내 생각, 내 때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길 바래요. 지금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역상12:32) 잇사갈 자손은 하나님의 때에 시세를 안 것이다. 그래서 사울에게서 떠나서 다윗에게 간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원하시는지 안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금식하며 기도하길 원하시는가? 내가 뭘 하길 원하시는지 분별하길 바래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길 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오해와 갈등이 있다. 하나님이 사울왕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가왕을 죽이라고 하지만 사울은 살려둔다. 백성들에게 좋은 왕으로 보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뜻이 아니었다. 내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 불신앙을 하게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영상을 보면 작가의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안에 자동차, 꽃, 공주만 보인다. 하나님의 때와 뜻을 분별하고 반응하는 신앙 하길 바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영으로 듣고 순종할만한 영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어렵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 때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냐고 여인은 말했다. 그 때 예수님은 기뻐하시며 고쳐줬다. 우리 의를 꺽고 십자가에 순종할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5)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포기한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믿음의 때를 놓치지 말고 붙잡길 바래요.

3. 하나님의 방법에 응답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셨다.  (8) 하인들이 한 것은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물을 얼마나 채워야 하고 왜 채워야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포도주가 없어서 난리가 났는데 오직 물항아리 안에 물을 채우는 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인과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지혜롭거나 마음이 부한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하인을 통해 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 일하셨다. 하나님 앞에 약한 자게 되길 바래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신다. 예수님은 오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창조적인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없는것을 가지고 일하지 않으신다.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신다. 나에게 없는 것을 통해서 일하지 않으신다. 내 자신을 보면 내가 연약해보인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것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에 하인들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비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신다. 순종한 하인들만 포도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고 안 것이다. 처녀의 몸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 모든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미련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일에 반응하고 쓰임받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흐름과 유행에 휩쓸려가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비밀을 알고 하나님의 일에 반응하는 인생이 되길 바래요. (5) 우리들 가운데 동일하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붙잡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내 계획과 방법이 맞지 않더라도 순종해서 쓰임받는 인생 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