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1, 2017

2017-05-21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목자와 양 (빌2:19~22)

스승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고, 가르침 받는 자를 제자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지식을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관계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관계를 보고자 합니다. 큰 차이는 영혼구원과 신앙훈련이 목적이다.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는 그러기 때문에 스승관계가 아니고 목자와 양의 관계가 더 적절할 것이다. 본서는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쓴 서신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사이에 두 리더에게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바울은 자신의 문제(감옥에 갖힌 문제)보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더 마음에 아팠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아무에게나 맡길수 없었고, 바울을 대신해서 정확히 메시지를 전달할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야 했는데 그게 디모데였다. 바울과 디모데는 인간적으로 보면 잘 맞지 않는 관계였다. 디모데는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는데 아버지는 이방인이었고, 소심하고 겁약하고 두려움이 많고 건강도 좋은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울은 정통 유대인중에 유대인이었고 학벌도 좋고 학식도 많고 성격도 강인하고 억척같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은 답답했을거고, 디모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디모데는 가장 신실한 동역자였다. 많은 사람중에 왜 바울은 디모데를 거기로 보냈을까요? 바울은 디모데가 신실한 동역자가 될수밖에 없는 3가지 키포인트를 말한다.

1. 뜻을 같이 함


디모데는 자신과 듯이 같았다고 한다 (20) 바울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뜻을 같이 할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교회 안에도 마음과 뜻과 생각하는 관점이 같아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헌신과 열정의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모든것이고, 주님을 위한 삶이 최고의 기쁨이요 의미였던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과 같은 마음, 생각을 같이 할수 있는건 쉽지 않은 것이다. 바울과 같은 영성이 있어야 동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디모데만이 바울과 같은 생각, 열정,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여야함을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을 맡길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 인생 자체를 산제물로 드렸다고 말한다. 바울과 같은 좋은 리더를 만나도 자기 영성이 따라가지 못하면 좋은리더가 아닌 부담스러운 리더로 생각이 들수밖에 없다. 같은교회에서 같은 헌신을 해도 목표가 다르면 그 태도가 다르다. 그래서 정작 바울이 맡기고 쓰려고 해도 맡길 사람이 없는 것이다. 동기, 방법, 태도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쓸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그런 신앙 하길 바래요.

2. 예수의 일을 구함


바울은 자기 인생을 드려놓고 주님을 섬긴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신 교회를 위해 사는거지, 자신은 죽는게 낳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자신의 인생을 드린 상태로 주님을 따르는데,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처럼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 (21) 마은아픈 말이다. 자기 일을 따르기 위해 따라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디모데만은 예수님의 일을 위해 따른다는 것이다. (딤후4:3) 바른 교훈이 아니고, 자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르는 교육을 하는 스승을 둔다고 한다. 가려운 귀를 긁어줄 말을 듣길 원한다. 그래서 여러교회 다니고 인터넷에서 이곳저곳 다니며 말씀 듣는 것이다. 배운 것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가려운 귀를 긁기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러니 영적으로 침체되고, 침체되니 더 찾게 된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끝없는 가려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딤후4:16) 자기 일을 위해 바울을 따른 것이지, 바울의 복음을 위해 따른게 아니라는게 드러났고, 디모데만은 바울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디모데의 속사람과 영이 바울과 같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청결한 양심으로 예수님을 따랐다고 고백한다. 디모데에게도 이런 순수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딤후1:3~5) 바울은 감옥에 있을때도 디모데를 생각하고 걱정한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 모두 떠났는데 디모데만은 따나지 않았고, 이는 디모데 안에 거짓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던 것이다. 디모데 속에는 변함없이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지식과 열심으로 할수있는게 아니고, 순결함이 없으면 나중에 다 드러난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때 모두가 다 떠났듯이 바울도 감옥에 갇힐 때 모두 떠났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있는데, 인자는 몸둘데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자신을 떠나면서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의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 마지막 때는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다. 주님만이 아신다. 주님의 일보다 자기 일을 구하는게 더 큰 것이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인정받길 원하는 것이다. 자기 영광이 없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동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하고 있지만 무엇을 구하는 신앙을 하는지가 마지막 내 신앙을 결정한다. 지금 열심히 하고 헌신한다고 끝까지 간다는 보장이 없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신앙, 영광을 위한 신앙만이 마지막까지 남을 신앙일 것이다.

3. 아비와 자녀의 관계


아버지로 따랐다. (22) 예수님도 훈련을 하셨지만, 바울도 훈련하는 사람이다. 두란노에서는 몇년동안 훈련을 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훈련받은 사람이다. 바울은 모든 사도 중에서 가장 낮은 사도라고 하지만 가장 많은 고난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 삶을 주님께 맡긴 사람만에 이런 삶을 살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이었다. 이런 바울에게 같이 있는게 너무 힘든 것이다. 돌 맞아야지, 매 맞아야지 너무 힘들다. 충성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훈련 받는건 다른 개념이다. 사람들은 모두 훈련 잘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종은 못하면서 주님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충성과 훈련은 다른 문제다. 자기부인 못하는 일, 자기 영광이 있는 일에 충성은 다 한다. 하지만 자기부인이 필요하거나 순종이 필요한 일에는 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걸 훈련받아야 한다. 사랑과 충성,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훈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훈련은 어렵고 힘들다. 그 훈련이 어렵기만 할 때는 끝까지 훈련받기 힘들다. 훈련이 훈련하는 자를 신뢰할 때는 훈련이 값지다는 생각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격적인 관계성 안에서 훈련이 되어야 한다. 훈련은 관계성이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성을 위한 훈련을 한 것이다. 훈련을 받은 다음에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일하는 관계가 아니고 "믿음 안에서 참 아비와 아들"의 관계가 된 것이다. 훈련이 되지 않은채 일만 한 사람은 관계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관계성 없는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밖에 되지 않는다. (고전4:15)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힘들다고 끊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교회 안에는 주님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  생명을 다해서 헌신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건을 만난 후에 미련없이 떠난 사람도 너무 많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아서 그런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단물은 빨아먹으면서 훈련받기는 싫어해서 인격적인 관계가 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보고싶었던 사람이 디모데였다. 마지막까지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딤후4:9~10) 죽음을 앞두고 바울이 디모데를 간절히 보고싶었다. 인간적인 자기 일을 구한 사람은 모두 바울을 떠났고 마지막에 디모데만 남았다. 남는 신앙을 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훈련을 받는 신앙을 해야 한다. 은혜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받는 것이다. 은혜는 훈련받을 능력이 필요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받는 것이다. 속사람이 훈련받는 신앙을 할 때 속사람이 끝까지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일만스승을 쫒는 신앙이 아닌, 영적인 아비를 따르는 관계성신앙이 되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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