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죄문제, 용서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인간의 뿌리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 중 하나가 용서의 문제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 것은 그 사람에게 빛을 지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빚은 갚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관계가 좋을 수도 없고 회복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 후에는 사람은 고소를 하고 법정에 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비유로 말씀 하신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풍습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을 광장으로 모두를 불러서 그 사람에 대해 한사람씩 말을 한다. 좋았던 것, 나빴던 것, 칭찬, 비난 등 어떤 말이든 한다. 그러면 그 죄인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양심이 살아나면서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면서 흐느껴 운다고 한다. 그러면 마을사람들이 그 사람을 안아주고 축복해주면서 축제를 그 자리에서 한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 영혼이 영원히 감옥에 가둬지게 되는 것이다. 내 죄문제, 남의 죄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해결받고. 신앙의 자유함을 받길 바래요.
1. 용서의 개념
우리 자녀나 가족이 죄를 지으면 몇번이나 용서합니까? 베드로는 큰 마음을 먹고 일곱번까지만 하면 충분하냐고 질문 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고, 랍비의 교훈을 듣고, 유대인의 풍습을 안다. 랍비들은 3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용서하지 말라고 한다. 베드로는 3번에 추가로 7번까지 하면 되냐고 한 것이다. 랍비들보다는 훌륭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생각을 깨뜨렸다. 일곱번에 일흔번까지 하라는 것은 490번까지 하라는게 아니고,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곱번에 대한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는 말씀인 것이다. 끝까지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이다. 3번을 용서하면 결국 4번째의 죄가 내 인생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무한히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눅17:3~4) 회개에 대한 용서는 한계가 없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인 것이다. 사람은 어떤 죄는 용서하고, 어떤 죄는 안되는 사람마다의 기준이 있다. 그게 한계이다. 그러면 용서할 수 없는 기준을 만나면 상처받고 더이상은 해결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용서에는 한계가 있으면 안된다. 예수님은 모든 죄를 완전하게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손양원목사님은 공산주의와 부딪칠 때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 청년에 의해 두 아들이 순교당했다. 그 죄인이 경찰서에 있을 때 손양원목사님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탄원했고, 그 범인을 양아들로 삼아서 40여년을 함께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면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살아내는 사람만이 이런 사랑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만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고, 그 사랑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마6:14:15)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의 한계를 철회해야 할 이유가 된다. 내 마음 가운데 나만 가져있는 용서의 기준과 한계를 내려놓길 바래요. 그래야 하나님도 내 죄의 용서의 제한을 내려놓으신다.
2. 용서의 결산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용서의 문제를 천국에서의 영원한 문제로 연결해서 말씀 하신다. 이 땅에서의 죄와 용서의 문제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적 삶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1) 불쌍히 여김 받은 종
결산 종이를 보니 이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주인에게 갚을 수 없는 1만달란트의 빚을 가지고 있다. 당시 1만달란트는 천문학적인 돈이다. 이스라엘이 1년에 로마에 바친 세금이 800달란트였다. 나라 차원에서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다. (25) 아내와 자식과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갚으라고 했다. 이게 유대법이었다. (26)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갚을 능력은 없지만 최대한 해서 갚겠다고 한 것이다. 이 사람은 주인의 자비만 바랄 뿐이었다.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인의 자비의 결과로 빚을 탕감받은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해결받을 수 없는 것을 해결받는 꿈같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만약 이 종이 주인에게 빚이 없다고 잡아떼고 배째라고 하면 해결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갚겠다고 한 것에 주인이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다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은혜 받은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이후 어떤 삶을 사는가를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2) 불쌍히 여기지 않은 종
은혜를 받았으면서 은혜 없이 살고 배반하는 사람의 삶이다.
a. 긍휼을 베풀지 않음
은혜 받고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만나자 마자 멱살을 잡았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엎드려서 간구하고 갚겠다고 했다. 100데나리온은 1만달란트에 비해 아주 별거 아닌 돈이다. 자신은 1만달란트를 탕감 받았는데, 그 엄청난 감격, 기쁨이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꼐 엄청난 탕감을 받았는데, 자신은 자신에게 지은 죄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은혜 받는 것은 어려워도, 은혜 쏟는 것은 순식간이다. 작은 100데나리온 때문에 엄청난 탕감 받은 기쁨을 순식간에 잃어버린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이 사람은 1만데나리온 탕감받은 것만 생각하면 평생 기쁨과 자유함을 받으면서 살 수 있는 것인데,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함으로 불행과 고통으로 사는 것이다. 이 종은 자신은 엄청난 은혜를 받았으면서 결국 동정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옥으로 가뒀다. 그 옥은 사실 자신이 들어가야 할 옥이었다. 오직 은혜를 잊은 사람이 사는 방법은 옳고 그름이지, 자비는 없다. 불평, 원망은 한 순간 은혜를 쏟는 능력이 있다. 인생을 바꾸는 은혜를 받으면서 순식간에 그 은혜를 쏟는 것이다. 받은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면 이전보다 나쁜 상태가 된다. 내가 받은 것보다 남에게 더 큰걸 베풀고 섬겨야 한다.
b. 긍휼을 빼앗김
그 광경을 동료들이 보고도 너무 딱했던 것이다. (31) 동료들이 주인에게 찾아가서 알렸다. 우리가 하는 일을 주위사람들은 다 보고 있다. 동역자, 리더가 본다. 보는 사람의 마음은 탄식하고 상하고 근심되게 한다. 그 마음이 모두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다. 나무들이 탄식하는 것도 하나니은 다 들으시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들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근심이 되면 안된다. 주위사람, 가족, 동역자, 리더들의 근심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저러면 안되는데 하면 그건 하나님이 들으신다. 그러나 마음이 닫혀있고 완고하면 자신만 하나님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이 사실은 주인에게 말하니 주인은 그 종을 다시 불러서 그 종을 (32) "악한 종"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 입에서 악하다는 말이 나오면 그의 인생은 좋지 않은 인생이 되는 것이다. 주인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반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악한 자"라고 한다. 주인은 그가 빌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서 빚을 탕감해 줬는데, 니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면 니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은혜를 유지하고 배반하는 죄를 안짓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기도 많이 해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게 안다. 내가 여기 있었던 것은 나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섬겼던 그 사람들로 인한 것이다. 한 사람이 여기 있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섬김과 용서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은 1만달란트 갚을때까지 옥졸에게 넘긴 것이다. 옥졸은 고문하면서 가두는 곳이다. 자비가 없는 자에게는 자비 없는 형벌이 있는 것이다. (약2:13) 긍휼이 없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부터 자유하길 원한다면 내 형제가 메여있는 것을 자유케 해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주기 때문이다. (35) 땅에서 용서할 것은 용서해서 하늘에 메이는 것 없이 자유한 삶 살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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