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8, 2019

2019-04-28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칼을 빼어 마주서신 하나님 (수5:13~15)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소원이 있다. 새롭게 되고 변화를 원하지만, 신앙과 삶에서 성장과 변화, 도약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변화를 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변화하는 방법도 지식으로 있다. 하지만 그 값지불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값지불이 없으면 신앙을 하기는 하지만 변화의 열매가 없거나 아주 더딥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변화의 실제가 없고 더 공허하다. 신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다. & 어떤 이는 과거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지만 거기에 안주한다면 더이상의 변화는 없다. 과거의 놀라운 변화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 우리 인생의 비전이든 사명이든 그 일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큰 일을 하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다. but 하나님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준비되길 원하신다. 세상은 남들보다 앞서고자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세상을 이기는 것보다 나를 변화시키는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변화의 계기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1. 여호수아의 질문 Joshua's Question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을 받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이다. 가나안 민족 중에는 골리앗과 같은 아낙자손도 있다. 하나님은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시는데, 군대대장의 모습으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이 보낸 이 군대대장을 보고 "누구의 편이냐?"고 여호수아는 물어본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대장에게 "너를 축복한다", "너가 이기길 원한다"고 듣길 원한다. but "아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대장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러면 내 편이군요"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은 당연히 내 편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군대대장은 아니다, 아군도 적군도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군대대장이니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여호수아 편이라고 생각한다. but 하나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러는데 왜 이러십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이다. 하나님은 한국의 편일까요? 일본 편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이시다. so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내 편이 되어주세요"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내 편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야 한다.

2. 여호수아의 하나님 God of Joshua


여호수아가 만난 하나님은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칼을 빼어 마주서심 Stands in front with a draw sword


하나님의 천사가 가서 전쟁을 끝내시려나보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이 칼은 가나안을 위해 들고 계신게 아니다. 여호수아를 향해 칼을 들고 마주서고 계신다. 여호수아는 가아안은 정복하기 전에 먼저 여호수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개혁과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심판하실 죄의 분량이 찰 때까지 400년을 기다리고, 그 때가 왔다. but 하나님은 단지 육적인 전쟁 뿐만 아니라 영적인 전쟁도 이기길 원하신다. 그 땅에 있는 죄와 어둠의 세력을 심판할만큼 여호수아가 거룩하고 정결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겉으로는 성공하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영적인 승리가 아닐 수 있다. 겉으로는 이기지만 뒤로는 지게 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의 세력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시대에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자기 유익만 취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다. (눅19:45~46)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집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유익만 취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개혁을 칼날을 빼든게 아니고, 성전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부패를 탓하기 전에 우리 안으로부터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도구처럼 쓰지 않으신다. 재능과 능력, 은사만 쓰시지 않는다.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자로 부르셔서 우리의 인격을 쓰신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정결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직진하는 성질이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실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똑같이 은혜를 받기는 받는데 어떤 사람이 받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다른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 앞에 여호수아라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모세를 준비시키신다. 이것을 모르면 좋은 일만 하길 원하고, 훈련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 편에서는 준비된 한 사람이 중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길 바래요. 하나님이 만약 마음이 급하셔서 빨리 일을 끝내고자 했다면 여호수아 전에 모세를 통해 이미 일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40년을 기다리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길 원하시는데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칼날 앞에 서길 바래요. (히4:12) 예배 가운데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길 바래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 하실 때 말씀에 검을 들고 나에게 마주서고 계실 때 나의 마음의 문을 열어서 내 인생에 새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나오길 바래요. 내 인생이 개혁되고 변화되는 과정이 없다면 나에게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 개인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새 일을 행하신다. so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내 삶에 인격이 될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한다.

2) 발에서 신을 벗으라 Take off your sandals


신을 벗는 것은 종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을 나의 인생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내 사명이고 내 비전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도 "그래 너의 비전이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내 인생과 내 비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생과 하나님의 비전이다. 사업, 가정도 하나님의 사업, 하나님의 가정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가정의 가장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자녀에게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가 번 물질이라고, 내 몸뚱이리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익숙한 것들, 습관이 있다면 이것을 버리길 바래요. 새로운 차원의 변화가 있길 원하신다면 이것을 바꿔보길 바래요. 내 인생에 병이 생기면 새로운 식단 등 변화를 결단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에게 익숙한 방법,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결단이 있길 바래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하신다. (삼상2:30b) 다윗이 스스로 왕이 되길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목숨걸고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삶을 존중하신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도 낮게 보신다. 여호수아는 전쟁에 나가서 이기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생을 사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일을 하라고 하시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방법으로 정직하게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꾀와 지혜로 하는 사람이 더 잘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살길 바래요. 말씀대로 여리고성을 돌기만 하지만, 말씀대로 할 때 그 두꺼운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but 그 후 아주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는 크게 패배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는 사람의 죄 때문이다. 여리고성에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취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이 두렵다. 세상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하나님 안에서 순금과 같이 단련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세상은 감당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비춰보시고 새로운 기회가 되길 바래요.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에 대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시간을 관리한다. 우리의 삶에 변화게 되는 실제적인 삶이 되길 바래요. (엡4:13) 나를 개혁하고 내 삶을 개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개혁하는데 쓰임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결단이나 변화가 없다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내 삶을 사건을 통해 개혁하기 이전에 말씀을 통해 변화시키는 것이다. 말씀 앞에 개혁하는 편에 서길 바래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추는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지금의 삶에 안주와 만족하지 말길 바래요.

Sunday, April 21, 2019

2019-04-21 (부활절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부활신앙으로 살라 (고전15:31~34)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만 했다면 다른 종교와 같을 것이다. 죽음에서 모든게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이를 통해 죄를 인한 사망을 이기신 증표이기도 하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다시 사망권세가 주장하지 못하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보장에 부활신앙이고, 믿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승리이다. 죄로 인한 사망을 이기는 것이 부활의 역할이다. (롬6:8~9)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죽은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신앙을 하지 않는다. 십자가 없는 신앙인 것이다. 맨날 십자가만 지고 죽을까요? 다시 죽지 않고 사망이 우리에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종이호랑이 같은 신앙을 하게 된다. 절기를 지키는 부활절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의 부활절이 되길 바래요. 이게 예배와 신앙의 목적인 것이다. 부활신앙을 하게 되면 사망의 권세가 내 삶에 두려움 등을 주지 못할 것을 믿길 바래요. 부활신앙을 하면 어떤 세상 문제와 어려움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어떤 문제도 두려움이 없다. 안다고 주어지는게 아니다. 부활 때문에 죽는 것인데, 부활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헛된 죽음이다. 오늘 이 단계를 벗어나서 땅의 문제에 메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신앙 하길 바래요. 부활은 우리 삶에 최후 승리이다. 부활의 신앙은 최종 열매로 승리의 표이기 떄문에 부활의 신앙까지 올라가길 바래요. 바울의 신앙을 통해 부활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몇가지만 보길 원합니다.

1, 부활 신앙의 삶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신앙이기도 한데, 부활 신앙이기도 한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날마다 죽겠어요? 십자가의 신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서 매일 남들과 싸운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결국 남을 죽이는 신앙을 하게 된다. 가정에서 내가 살려고 하면 온 가족이 죽고, 내가 죽으려고 하면 온 가족이 살게 되는 것이다. 영혼을 도울 때 성경적으로 싸울 때 내가 이기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영혼은 떠나게 된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뭡니까? 영적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의 변화, 인격, 감사가 있습니까? 오히려 남을 시비하고 질투하고 온갖 악한 것이 역사한다. 이것이 남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부활 시 있을 새로운 삶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고전15:42~44) 내가 썩을 것으로 심으면(죽으면)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기 때문에 썩을 것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것 하나 못끊기 때문에 죽어지지 못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부활이 있겠어요? 썩어질 것에는 죽어져야 한다. 부활만 바라니 맨날 허상만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는게 없는데 부활로 살아날 것이 어디 있겠어요? 결혼 안한 여자가 임신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누구나 십자가에 죽는 것은 힘들다. 예수님도 힘들다. but 예수님은 살아날 것을 아셨다. 내가 살아온 스타일 버리기 힘들죠? 힘드니까 힘든 것이다.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 수 있다.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세상 썩을 것을 위해 죽는 것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일년에 한번 씩 죽는다고 하지 않고, 날마다 죽는다고 하셨다. 매 순간마다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시기하는 생각 등 매 순간 죽어질 것을 위해 죽는다. 죽어지는 것이 없는데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까? 혈기있는 내가 혈기에 죽지 않으면 결국 피해를 주게 된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능력이나 기쁨, 자유함이 있겠어요? 자기 안에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의 부스러기에서 나오는 열매들이다. 내 안에 성령이 주는 열매와 성품으로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십자가에 죽이지 않는 것은 죄를 보호하고 죄를 옹호하고 죄를 키우는 삶인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 없는 곳에는 무기력해지고 아무것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이 되길 바래요. 신앙은 실제여야 한다. 말씀을 받으면 열매가 맺어져야 신앙이지, 열매가 없으면 속는 것이다. 신앙을 종교놀이로 하면 안된다. 작년보다 올해 뭐가 바꼈는지, 고질적으로 넘어지는 죄가 무엇인지 날마다 체크하고 죽어져야 한다.

2. 부활을 믿지 않는 삶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사람과 똑같은 삶을 산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지 않으려고 한다.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는 것이다. (32) 어차피 하는 인생 십자가 없는 교회 가서 십자가 없는 신앙을 하는 것이다.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자는 YOLO족이 많이 있다. 십자가에 값지불하는 것은 멀리하는 기독교라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들의 마음에는 뭔가 공허함이 있고,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이 없다. 십자가를 피하면 육신은 만족스럽지만, 만족스러운 만큼 고통과 채워지지 않는 것, 짜증이 있다. 욜로족이 겉으로는 즐겁게 사는 것 같은데 영혼은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고통으로 산다. 게임을 해서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좋은 삶을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먹는 즐거움이 내일까지 안간다. 내일 해야할 것을 계속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부활이 주는 참신앙과 사랑의 은혜는 썩지 않다. 오늘 받은 기쁨이 내일도 가고 일주일 후도 가고 죽을 때까지 가는 것이다. 썩을 것의 기쁨은 기쁜 일을 할때나 환경이 허락할 때만 기쁘다. 하지만 영원한 기쁨과 부활신앙은 내가 어디 있든 환경이 어떻든지 기쁘다. 어제 좋았는데 왜 오늘 이런 행동이 나올까? 썩어졌기 때문이다.

3. 바울의 권면


1) 속지말라


왜 신앙을 지혜없이 그렇게 사냐고 한다. 자기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죄와 사망이 역사한다. 마지막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믿는 사람만 부활하는게 아니다. (요5:28~29)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지만,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한다. 내가 천국, 지옥을 부정한다고 천국과 지옥이 없어지는게 아니다. 지옥에서 죽으면 괜찮을텐데, 지옥에서는 죽지 않는다. 이것이 재앙이다. 지금 십자가를 피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혜로운게 아니다. 지금 고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길 바래요. 믿음의 사람과 함께 공통체에 있는 것에 감사하길 바래요.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다.

2)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가기 때문에 속이는 자가 있다. 깨어서 속지 않을 책임은 나에게 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그렇게 산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를 메고 고난 받는 것이 미련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나" 신앙으로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깨어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악한 시대에 죄를 안 짓는 것은 쉽지 않다. 죄에 대해서는 죄와 함께 죽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죽으려고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자기가 살려고 하니까 남을, 공동체를 죽이게 된다. 내 안에 주님의 부활의 능력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한 가정이 남편, 아내 자녀 모두 그냥 그런 가정은 왜 그럴까요?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 상급을 쌓아야 한다. 상급 쌓기 위해서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 가정을 세우고 다른 영혼을 세우고 영혼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상급이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고 답답한 것 밖에 없죠? 마지막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십자가의 신앙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부활신앙을 가질 때 십자가 신앙을 할 수 있다. 혈기를 심고 썩어지면 온유한 마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죽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부활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죄가 있는 그 곳에 자기가 죽는 삶을 결단해보세요. 그러면 바로 부활의 생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의 문제가 풀어질 때 풀리는 것이다. 매일 죽는 사람에게 매일 새롭게 되는 신앙을 경험하길 바래요. 지난달보다는 이번달 뭔가 새로워지는 게 있어야 생명력 있는 신앙이 될 수 있죠. 적어도 지난달보다는 이번달 새롭게 되는 비결이 뭘까요? 지난달에 죽지 못한 것이 이번달에 십자가에 죽는 만큼 이번달에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으로 십자가에 죽으면 부활로 변화될 수 있다. 실제적인 능력으로 신앙이 나타나길 바래요.


Sunday, April 14, 2019

2019-04-14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마지막 때의 행동기준 (마24:15~22)

대처요령을 잘 익혀두고 교육을 받으면 위기 때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모를 경우 위기에 처하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지식이 인격화 되기 위해서는 한번에 되지 않고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이 되어야 몸에 체질화가 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을 한다고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 직장이나 가정에 가면 본능대로 옛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격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는 지식과 행동이 같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so 아는 말씀을 매주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말씀으로 실제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훈련을 받고, 다음주, 다다음주에 반복해서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는 지식이 마지막 때에 실제화가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전에 들었던 말씀이 인격화와 능력이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실패한 신앙이다. 다 아는 지식, 신앙을 계속 반복해서 해야하는 이유는 내 인격적으로 나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고 다 되지 않기는 하지만, 아는게 중요한 이유는 내 삶을 체크하는 것을 통해 말씀이 내 인격화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실제화가 되는 신앙 하길 바래요.

1. 마지막 때의 징조 


(15)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은 갑자기 그 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수천년 전에 선지자를 통해 알려주셨다. 아는 것을 실제 적용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600년 전 다니엘 선지자가 한 말씀을 인용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단11:31)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성소에 세워지는 것이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것이 마지막 때는 훼손되고 망령되게 일어나는 일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가증한 사람이 거룩한 교회나 강단을 더럽힌다면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런 일을 하도록 냅둘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 때 영적 전투에 실패하면 하나님의 가장 가증한 것이 들어와서 짖밟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이 훼손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600년 뿐만 아니라 6000년이 지나도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시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세상 관점에서 시대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다. 성경 말씀과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바른 대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그 시대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분별력 있는 눈을 가지길 바래요.

2. 마지막 때 행동원칙


아는 것에 머물면 안되고 반복 훈련을 해야한다. 평생동안 아는 말씀,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들음으로 내 삶에 체질화, 생활화가 되어야 한다.

1) 산으로 도망하라


(16) 유대인에게 산은 거룩한 장소의 상징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은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하루일과를 끝내시고 기도하러 가시는 곳이 산이고, 산상수훈 말씀도 산에서 하셨다. 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평소에 믿음이나 신앙이 준비되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살 길을 알려준다고 사는게 아니다. 롯 시대에도 살려면 산으로 피하라고 해도 농담으로 듣고 피하지 않아서 결국 모두 죽었다. 떠날 때 떠나는 사람은 피해를 보지 않는데, 떠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 so 악인과 함께 있는 자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잠22:3) 피할 곳은 피해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과는 피할 길을 주실 때 피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시59:16) 주님만이 나의 요새이시며 환난날에 피난처임을 믿길 바래요. 이것을 지식으로 안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평안한 지금 이 때에 그 피난처 되는 말씀을 연습해야 한다. 의인들에게는 피할 기회를 주는데, 지금 피할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이유가 있을텐데 내가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거나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있다면 피할 연습을 하길 바래요. 계속 그 장소나 사람과 있다면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2)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


(17) 지붕 위는 교제도 하고 기도도 하는 장소이다. 마지막 때 환란이 있을 때에는 지붕 위에서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즉시 산으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말이 쉽지 상황이 닥치면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 명예, 물질을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한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미리 하시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집 안에 귀중품을 건지기 위해 불길 안으로 뛰어들고 죽는 경우가 많다. 원숭이들은 바나나 하나 포기하지 못해서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롯의 아내도 환란 가운데 도망가는데 뒤 돌아보면 죽는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두고온 물질이 아까워서 뒤돌아 봤다. 주님을 위해 물질 포기하는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이어야 마지막 때에 뒤 돌아보지 말라고 할 때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신앙은 그 때 큰 화를 당하는 것이다. 롯의 아내는 물질을 이기지 못해서 뒤돌아봐서 결국 소금기둥이 되었다. 편안의 때에 세상것 끊는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마지막 때에 쉽지 않다. 신앙을 부단하게 연습할 수 있길 바래요.

3)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


(18) 밭에 일하러 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두고 일하러 간다. 마지막 때에 일하다가 환란이 생기면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때도 빈 몸으로 너의 목숨을 위해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겉옷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지금도 내 생명을 위해 살지 않고 좋은 겉옷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어케 결정적일 때 겉옷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편안한 때 인격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4) 어려운 상황을 피하도록 기도하라


(19) 하나님의 마지막 때에 내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so 지금 연습을 해야한다. 아직도 주일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 있죠? 주일이 되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신앙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주일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자기에게 속한 자기 책임이다. 셀모임 하나 잘 참석하기 위해서도 야근, 약속이 없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름수련회 때 꼭 가야할 사람이 가지 못할 상황이 생기는데, 이런 일이 수련회 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창세기 강의, 교회생활가이드 등도 피치못할 상황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타당한 일이겠어요? 피할 길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만나고 고난이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고난주간 기도로 승리할 수 있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길 바래요. 중요한 일이 생기면 사단이 방행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3.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배려


마지막 때는 창세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노아나 롯 때의 심판과 마지막 때의 심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계속 일곱 심판과 같이 그렇게 되면 믿는 사람이라도 피하기 힘들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환란이 계속되면 택한 자 까지도 구원받기 어려운 것을 아시고 택한 자를 위해서 배려해주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가 정말 문제가 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지막 때가 너무 힘든 사람이다. so 마지막 때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들을 미리 주신다. 지금 그런 고통이 없는 사람은 마지막 때의 고통에 대한 개념이 없을것 아니예요? 믿음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시면 그 고난이 괴롭지 않겠지요? 우리는 하나님 믿죠? 고난을 주시지만 감당할 고난만 주시는 것을 믿고, 끝까지 견디면 피할 길을 주시는 것도 믿을 때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막 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기는 신앙을 감당하길 바래요.

Sunday, April 7, 2019

2019-04-07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끝까지 견디는 신앙 (마24:13~14)

죽고사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 천국은 다른데가 아닌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천국도, 지옥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이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잠4:23) 가정, 직장, 지식 등 지켜야 할 것들이 많지만, 성경은 그 중에서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마음 하나 잘못 씀으로써 생명을 잃기도 한다. 불평, 부정적인 생각으로 화를 내거나 하면 마음에 불안, 근심, 낙심 등이 찾아온다. 화를 내고 기분 나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기분 나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자기 마음을 긍정적, 좋은 생각을 갖기로 마음을 먹으면 평강과 기쁨으로 마음을 잡을 수 있다.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분노로부터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다. 행복은 상황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은 자기 생각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온다. 생각은 하나님 말씀을 받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단이 나를 공격하는 도구이기도 한다. (롬8:6) 생각이 내 운명을 결정하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즉, 남이나 사회의 책임이 아니고 내 책임인 것이다.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사단이 합법적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망의 실제이다. 모든 긍정적인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사단으로부터 온다. (잠16:32) 내가 성을 많이 빼앗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혈기와 분노를 이기는 능력이 다른 능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사람 앞에 인정받는 많은 일을 하고 사람이 칭찬하는 많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안에 혈기, 악한 생각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 생명을 잃게 되고,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보다 큰 자기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영적전투 최고의 승리이다. 마지막 때는 환란, 핍박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풍랑이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이 때 물 위를 걷는 믿음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마지막 때에 이른 환란 풍파를 이길 원리를 나누길 원해요. 어떤 사건에도 마음을 지킴으로 생명을 지키는 신앙 하길 바래요.

1. "그러나" 신앙 Faith of "But"


"그러나"로 오늘 구절이 시작한다. 예수님은 접속사 하나까지도 의미있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신앙의 반대는 "때문에" 신앙이다. 풍랑이 일기 때문에 내가 빠져 죽는다고 하면 죽는거고, 풍랑이 일지만 그러나 나는 이기겠다고 하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신앙인 것이다. 하지만 "때문에" 신앙은 어떤 이유 때문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생명을 잃는 것이다. 죽기로 각오하지 않으면 이런 신앙을 지키기 쉽지 않다. 어떤 환란이 오더라도 "그러나" 내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환란 "때문에" 믿음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엘리아 시대와 같이 끝까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7,000명만이 남는 신앙을 하는 것이다. 걸러지는 일, 믿음을 정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다. 환란, 핍박이 없으면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있다. 그러나 환란, 핍박이 한번 일어나면 믿음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남는 것이다. 신앙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어지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도 뱀이 정당한 이유를 들이댔고, 당당하고 정당하게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한 것이 어렵더라도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이유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그랬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용서하라"는 말씀에는 타협이 없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어떤 변명과 핑계꺼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말씀에도 마찬가지이다. 상황에 따라 봐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먹으면 자기 죄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 그사람 때문에 내 신앙이 죽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사단은 항상 "때문에"라는 합당한 이유와 이론을 제시한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러나" 나는 신앙을, 내 마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이다.
삭개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갔지만, 2가지의 "때문에"가 있었다.  키가 작기 때문에, 그리고 군중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음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마음 없이 군중으로 온 사람을 예수님은 보지 않지만,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을 예수님은 보신다. 많은 사람은 여기서 당락이 결정된다. 마음 먹는거 힘든게 아니다. 그냥 마음 먹으면 된다. 영적전투는 상황과 상황이 아니다. 키 작은 것과 싸우는게 영적전투가 아니다. 영적전투는 "그러나"와 "때문에"의 싸움이다. "그러나"를 택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인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기로 마음 먹어보세요.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보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평범한 어부였다. 그런데 물고기가 안잡혔다. 밤새도록 던졌었는데 안잡힌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던져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던졌고 예수님이 던지라고 한 거기도 던지고 했기 "때문에" 안던질 수 있었다. 베드로가 자신의 이론으로 던져도 안잡힐 것이라는 생각으로 던지지 않았다면 그 인생이 그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던졌을 때 예수님의 생명이 임했던 것이다.
항상 사건이 있을 때 이 두 마음이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사건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안에 두 마음의 싸움에서 어떤 상황이 있을지라도 마음을 지키길 바래요.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 가운데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죽을 인생이 될지, 산 인생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기 앞에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것을 선택하고 마음을 지키면 승리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수록 마음을 지키면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모든 환경을 승리하길 바래요.

2. "끝까지" 신앙 Faith of "to the end"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 앞에 가는 마지막 그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신앙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인내"기 필요하다. 신앙을 아무리 잘 해도 인내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만이 구원받을 믿음이고,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할 믿음이다. (눅8:15) 인내로 결실한다고 하신다. 즉,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인내"하는 사람이 결실을 맺는다. 중간까지 견딘 사람은 구원이 없다. 어렵다고 그만 두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 (행14:22) 구원은 환란이 있다고 해서 이기는것도 아니고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이 뭔가요?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죽을 지경에서 구원을 받고 죽는게 낮지, 구원을 포기하고 사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계2:10) 마지막 때에 고난과 환란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so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고난과 시험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잘 살다가 셀에서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 떠나게 되는 그런 세속적, 인본적인 신앙을 하면 안된다. 약해보이나 끝까지 견디는 것이 강한 신앙이다. 어려움이 많이 있는 사람이 있다. 아내, 남편 등으로 인해 훈련받는 사람은 언제까지 해야하는가 생각할 것이다. 끝까지, 주님 올 때까지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를 잘 다니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 까지 끝까지 지키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훈련받는 이유는 마지막 때 환란풍파의 때에 끝까지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금 훈련을 받는 것이다.

3. "그제야" 신앙 Faith of "then"


복음을 듣는 방법을 통해 구원받게 하신다. "그제야" 신앙은 마지막 때가 있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선교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이 불필요한 것을 주시겠어요? 환란핍박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증언하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핍박이다. 복음의 첫 시발점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함으로써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이었다. so 예루살렘 안에서 자기들끼지 전도하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겠어요? 스데반 순교사건이라는 핍박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을 가게 된 것이다. 핍박이 있어야 "그제야" 밖으로 나간다. 바울이 유럽전도를 하게 된 것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감옥에서 고난 후에야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핍박이 아니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계층에게는 핍박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급박한 구원을 위해서는 핍박을 통해서 구원을 선포하신다.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신앙은 주님이 언제나 올까요? 가족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제야" 신앙을 해야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위해서는 가정복음화가 되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되겠지 하면 안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서 썩어져야만이 복음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환란과 핍박이 있어야 한알의 밀알이 떡여져서 썩어지는 것이다. 죽지않는 신앙에는 새로운 생명도 없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마지막 때에 종말론적인 신앙을 해야 "그제야" 죽음을 각오하고 핍박을 각오할 때 가정, 직장, 사회가 변화된다. 마지막 때는 적당한 것이 아니라, 급박한 구원을 위한 "그제야" 신앙을 해야한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마음을 가지길 바래요. 왜 어렵냐면 내 마음으 어려운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내가 먹은 마음대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마음을 반대로 먹어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변화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불행한 쪽으로 마음 먹지 마세요. 모든 상황이 나를 어렵게 할지라도 "행복한 것"을 선택하고 마음을 지키면 천국을 지키는 것이다. 마지막 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승리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