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열정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고, 나도 열정의 사람이 되고싶어한다. 헌신적인 사람을 보면 나도 헌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이뤄가면 부럽고 나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 좋은 것들이다. but 이것들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아돌프히틀러라는 사람이 있다. 독일사람들의 마음 속에 애국심을 불어넣었다. & 거대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넣어줬다. but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인종청소, 유럽을 전쟁터로 만드는 등의 비극적인 일이 되었다. 열정이라 할지라도 과연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 예수님의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살려고 하면 이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내 의지만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내 힘과 능력으로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so 나의 연약함, 한계를 깊이 깨닫는 사람일수록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1. 은혜의 하나님 God of grace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카리스는 은혜라는 뜻이다. 호의, 친절, 감사, 선물 등의 뜻이 있다. 자격없는 사람에게 호의, 친절, 조건없이 선물을 주기도 한다. & 주인이 종에게 베푸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착한 죄인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의 손은 육안으로 보면 깨끗해보이지만, 보이지는 않지만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손 안에 약 6만마리 이상의 세균이 있다. 물론 좋은 세균도 있겠지만, 손 씻은 후 2시간만 지나면 세균이 100배가 늘어나 있다고 한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세균이 번식하고 있다. 이와같이 죄인은 내 기준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도 받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내가 죄인임을 부정하고 죄 없다고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자 노력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는 은혜를 주셔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엡2:8~9)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선물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낮춰야 한다.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당연하듯이 나올 수 없다. 말씀을 들을 때는 내가 다 아는 것 같다. so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거나 말씀을 들을 자격이나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말씀이 안들린다. 다 아는 말씀인데, 내 삶에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그 사람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도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신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은혜 받는 것 같은데, 그 은혜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너무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 삶에 과격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길 바래요. 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에 집중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오지 않는다. 교만한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미워하고 질투하시는 것이다.세상을 사랑하는 거슬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 교만한 자를 물리치심 Opposes the Proud
하나님이 대적하신다는 의미한다. 교만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다르다. 교만은 남보다 우월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기 보다 나를 더 의지하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잠3:34)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시는 이 일이 나에게는 너무 못마땅해보인다.
때로 교만하다는 것은 직분과도 관련이 있다. 사단은 천사장의 직분을 받았지만 하나님처럼 자신도 영광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타락하게 된 것이다. so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을 징조인 것이다. 교만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 &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한다. 바리새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다들 들어서 "나는 그렇지 않을꺼야"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바리새인들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요9:39, 41) 영적인 맹인이라고 인정했다면 하나님 앞에 잘못이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가 소경이라고 했고,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셨다. & 예수님이 말씀을 전해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교만함으로 판단할 때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죄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면 죄가 인정되고 수치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인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이 죄인의 비극인 것이다. 나의 모습을 모르니 내가 교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뛰어난 지혜로 전략을 낼 수도 있고, 부지런할 수도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쉽고 간단한 하나님의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의 교만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아주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영적인 문제가 뭔지 모르니 계속 실패하는 것으로 신앙을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는 무기력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충분히 크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정작 은혜를 없는 것이다. 정말 애통하게 여겨야 한다. 은혜는 내 지혜와 열정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다. 신앙은 쉽고 간단한 것이다. 말 그대로 은혜로 하는 것이다. (눅18:13~14) 세리는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신앙하는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부디 그럴지라도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세리는 되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깨닫고 상하고 애통한 심정으로 나온 세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높여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내가 은혜가 있다고 자랑하면 사단에게 틈을 주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고전10:12)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다른사람보다 의롭고 높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어렵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은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겸손하시다. & 죄인인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섬겨주셨다. 우리는 죄인이면서 예수님의 섬김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 (이사야53:3) 에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하셨다. 왜 우리가 겸손하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안해서고 아니라, 우리가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낮은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구해야 할 것이다.
3.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심 Gives Grace to the Humble
내 안에 교만한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선을 믿는다면 우리는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나의 외모나 인상, 재능 등을 내가 노력해서 얻은게 아니다. 똑같이 노력하는데 더 잘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하는게 아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고전15:10) 바울이 깨달은 것은 바울은 나의 힘과 지혜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예수님의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요5:19b)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여주시 않으시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남들이 볼때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았고, 남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는 것은 예수님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결단과 방향이 있었다. 겸손은 내가 의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보호 아려 거하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거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노력해서 겸손해지는게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을 만날 때 엎드린 것이고, 사도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낮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겸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낮추신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길 바래요.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기 위해서 나를 낮추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훈련을 하시고 은혜 주기위해 나를 광야로 보내시기도 한다. 이것을 깨달았던 베드로는 (벧전4:1) 하나님 앞에 고난받고 육체를 낮추는 것이 갑옷이라고 고백한다. 죄 앞에 거하면서 계속 형통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두려운 것이다. 형통한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계속 죄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손을 거두신다. 그 전에 돌이키는 것이 은혜인 것이다. so 때론 의인에게 고난이 많이 있다.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훈련이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축복인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엄청난 일을 해야만 하나님께 칭찬받고 상급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이다.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길 바래요. (마11:29~30)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 마음에 쉼이 없는 것은 내가 성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마음이 높은 곳에 있으니 마음에 짐을 지고 마음에 평안함이 없는 것이다. 겸손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 때 낮아지길 바래요. 심령이 낮은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분별력, 지혜가 필요하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영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정작 최선을 다한게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길 바래요.
(약4:10) 주 안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가 높이신다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의 때가 될 때 은혜 주시고 우리를 높이실 줄 믿습니다. 이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인내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은 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