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30, 2018

2018-09-30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라 (약4:6)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예배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열정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고, 나도 열정의 사람이 되고싶어한다. 헌신적인 사람을 보면 나도 헌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이뤄가면 부럽고 나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 좋은 것들이다. but 이것들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아돌프히틀러라는 사람이 있다. 독일사람들의 마음 속에 애국심을 불어넣었다. & 거대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넣어줬다. but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인종청소, 유럽을 전쟁터로 만드는 등의 비극적인 일이 되었다. 열정이라 할지라도 과연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 예수님의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살려고 하면 이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내 의지만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내 힘과 능력으로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so 나의 연약함, 한계를 깊이 깨닫는 사람일수록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1. 은혜의 하나님 God of grace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카리스는 은혜라는 뜻이다. 호의, 친절, 감사, 선물 등의 뜻이 있다. 자격없는 사람에게 호의, 친절, 조건없이 선물을 주기도 한다. & 주인이 종에게 베푸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착한 죄인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의 손은 육안으로 보면 깨끗해보이지만, 보이지는 않지만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손 안에 약 6만마리 이상의 세균이 있다. 물론 좋은 세균도 있겠지만, 손 씻은 후 2시간만 지나면 세균이 100배가 늘어나 있다고 한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세균이 번식하고 있다. 이와같이 죄인은 내 기준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도 받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내가 죄인임을 부정하고 죄 없다고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자 노력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는 은혜를 주셔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엡2:8~9)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선물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낮춰야 한다.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당연하듯이 나올 수 없다. 말씀을 들을 때는 내가 다 아는 것 같다. so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거나 말씀을 들을 자격이나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말씀이 안들린다. 다 아는 말씀인데, 내 삶에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그 사람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도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신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은혜 받는 것 같은데, 그 은혜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너무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 삶에 과격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길 바래요. 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에 집중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오지 않는다. 교만한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미워하고 질투하시는 것이다.세상을 사랑하는 거슬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 교만한 자를 물리치심 Opposes the Proud


하나님이 대적하신다는 의미한다. 교만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다르다. 교만은 남보다 우월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기 보다 나를 더 의지하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잠3:34)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시는 이 일이 나에게는 너무 못마땅해보인다.
때로 교만하다는 것은 직분과도 관련이 있다. 사단은 천사장의 직분을 받았지만 하나님처럼 자신도 영광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타락하게 된 것이다. so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을 징조인 것이다. 교만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 &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한다. 바리새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다들 들어서 "나는 그렇지 않을꺼야"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바리새인들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요9:39, 41) 영적인 맹인이라고 인정했다면 하나님 앞에 잘못이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가 소경이라고 했고,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셨다. & 예수님이 말씀을 전해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교만함으로 판단할 때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죄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면 죄가 인정되고 수치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인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이 죄인의 비극인 것이다. 나의 모습을 모르니 내가 교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뛰어난 지혜로 전략을 낼 수도 있고, 부지런할 수도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쉽고 간단한 하나님의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의 교만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아주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영적인 문제가 뭔지 모르니 계속 실패하는 것으로 신앙을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는 무기력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충분히 크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정작 은혜를 없는 것이다. 정말 애통하게 여겨야 한다. 은혜는 내 지혜와 열정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다. 신앙은 쉽고 간단한 것이다. 말 그대로 은혜로 하는 것이다. (눅18:13~14) 세리는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신앙하는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부디 그럴지라도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세리는 되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깨닫고 상하고 애통한 심정으로 나온 세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높여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내가 은혜가 있다고 자랑하면 사단에게 틈을 주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고전10:12)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다른사람보다 의롭고 높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어렵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은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겸손하시다. & 죄인인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섬겨주셨다. 우리는 죄인이면서 예수님의 섬김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 (이사야53:3) 에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하셨다. 왜 우리가 겸손하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안해서고 아니라, 우리가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낮은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구해야 할 것이다.

3.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심 Gives Grace to the Humble


내 안에 교만한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선을 믿는다면 우리는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나의 외모나 인상, 재능 등을 내가 노력해서 얻은게 아니다. 똑같이 노력하는데 더 잘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하는게 아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고전15:10) 바울이 깨달은 것은 바울은 나의 힘과 지혜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예수님의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요5:19b)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여주시 않으시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남들이 볼때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았고, 남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는 것은 예수님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결단과 방향이 있었다. 겸손은 내가 의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보호 아려 거하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거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노력해서 겸손해지는게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을 만날 때 엎드린 것이고, 사도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낮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겸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낮추신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길 바래요.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기 위해서 나를 낮추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훈련을 하시고 은혜 주기위해 나를 광야로 보내시기도 한다. 이것을 깨달았던 베드로는 (벧전4:1) 하나님 앞에 고난받고 육체를 낮추는 것이 갑옷이라고 고백한다. 죄 앞에 거하면서 계속 형통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두려운 것이다. 형통한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계속 죄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손을 거두신다. 그 전에 돌이키는 것이 은혜인 것이다. so 때론 의인에게 고난이 많이 있다.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훈련이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축복인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엄청난 일을 해야만 하나님께 칭찬받고 상급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이다.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길 바래요. (마11:29~30)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 마음에 쉼이 없는 것은 내가 성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마음이 높은 곳에 있으니 마음에 짐을 지고 마음에 평안함이 없는 것이다. 겸손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 때 낮아지길 바래요. 심령이 낮은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분별력, 지혜가 필요하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영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정작 최선을 다한게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길 바래요.

(약4:10) 주 안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가 높이신다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의 때가 될 때 은혜 주시고 우리를 높이실 줄 믿습니다. 이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인내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은 복인 것이다.

Sunday, September 23, 2018

2018-09-23 (추수감사예배, 정의호목사님)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136:1~3)

우리는 추석 주일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일년에 한번 씩 교회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살길 원하지만,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환경, 여건이 좋아서만 행복한게 아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 좋은 가정과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서 풍족한 삶을 살지만 짜증과 분노가 많은 삶, 기쁨도 없는 삶을 살고 풍족한 것은 오직 물질생활 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의 입에서는 부정, 불평, 불만의 말만 나온다. 그 사람은 물질, 지식이 부족한게 아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와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열악한 가정에서 열악하게 살면서도 기쁘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감사하며 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형평에서도 감사와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영적인 능력이다. 감사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사람의 인격의 문제이고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이다. 신앙인격이 따라가지 않고 믿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삶이 따라가지 못하다. 이런 사람은 주로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데,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상대방보다 자기 중심, 자기 상황만 이해받으려고 하고, 남의 형편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신앙인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감사보다는 받으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앙 스타일은 하나님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이런 것을 당연시 하고 마땅히 여긴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태도이다. & 하나님이 아직 주지 않으신 것을 두고 불평하는 모습이 대부분의 사람의 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추수감사예배를 통해 알길 원하신다. 오늘 말씀에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하신다. 이것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부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감사이다. 감사는 우리 신앙에 기본적인 자세이다. 받은 것에 감사하지 않으면서 계속 요구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우상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신앙을 다시 한번 나 중심,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길 바래요. 시편 136편은 긴 구절인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나열하고 있다.

1. 선하신 하나님 God who is good


선하신 하나님을 감사하라고 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 한분만 선하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선한 기준을 자신이 정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편견적이고 사람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옳으면 선하고 아니면 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잘못된 것 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하다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안좋은 일이 생기면 그 교회, 셀은 안좋은 교회, 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선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선한 삶을 살겠어요? & 선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선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so 영적 상태가 좋지 않으면 선하신 하나님의 일도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좋은 일이 일어나도 상처받는 일이 있는 것은 자신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선하다는 것을 믿길 바래요. 내가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자기주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오해하고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고 주어지는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 한가지 뿐이다. 이것이 가장 강한 신앙이고, 이것이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다. (살5:18) 감사하는데 그 전제가 "범사에"이다. 범사는 모든 일(all circumstances)이다. 그러면 모든 일에 실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합력하기 전에는 잘못되고 선하지 않고 최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퍼즐이 다 맞춰지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이것은 나중 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지, 사람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게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 영광이 되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믿으며 살면 된다. 

2.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God the most high of gods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 소, 뱀, 파리, 코끼리 등을 신으로 섬긴다. 파리를 신으로 섬기면 그 인생이 행복하겠어요? 많은 신들 중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은혜 중에 은혜라고 감사하길 바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단, 헛된 종교에 빠져서 인생, 물질을 허비하고 망치는 사람이 어라나 많습니까? 그러지 않는 것을 얼마나 감사인가요? 종교는 아무 낙이 없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 하나님 말씀으로 영혼이 변화되고 주일이기 때문에 예배드리는게 아니고 하나님 만나는 설레임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감사하길 바래요. 교회 와서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을 얻고 인생이 바뀌는 것이 하나님 은혜라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신앙이 메마르고 종교화가 된다. 그러면 결국 교회 붙어있지 않는다. 감사에 적은 받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이다. so 많이 받기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은 매우 궁색하고 초라하다. 오히려 받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인생이 된다. but 주고 베푸는 자는 하나님은 더 주고 감사하는 자에게 더 주신다. (행20:35)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받는자에게 복이 있는 원리가 아니고, 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 원리이다.
그러면 받는 것을 다 포기해야 할까? 아니다. 받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3. 주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Lord the most hgh of lords


세상에는 우리를 다스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인되신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의 주인은 죄였다. 죄가 우리를 다스렸었다. but 죄에 다스림 받지 않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다스리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사람들의 주인이 얼마나 많나요. 지금 우리를 누가 다스리는지를 봐야 한다. 사단이 말한 말 한마디에 인생에 올무가 걸린다. 한주간동안 우리 인생을 뭐가 끌어가나요?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게 아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은혜를 은혜고, 내가 끌려다는 것은 다른 인생을 산다. 많은 신들, 다른 신들, 다른 주인에게 끌려다닌다. TV, 인터넷, 사람 등에 끌려다니는게 아니고,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 아침 묵상 말씀, 기도에 끌려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
외국을 가면 특별히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기도할 장소가 없는 것이다. 집회에서 기도하라고 할 때도 기도할 때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교회에 기도할 수 있는 기도실이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기도할 곳이 없어서 답답한 삶을 산다. 기도할 장소가 없어서 기도 못하는 사람은 기도할 장소를 줘도 기도를 안하게 된다. 힘들다면서 기도는 안해요. 그러면서 어렵데요. 얼마나 걍퍅한 마음, 감사가 없는 마음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어려움을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당연하고 마땅히 여기는 것이다. 이런 귀족과 같은 신앙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슨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세상 죄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조금만 있으면 불평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 내 죄를건드리는거에 불평이 생기고 죄를 끊을까봐 불평이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의 기본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율법적인 일은 잘해도, 은혜에 기반한 행동은 못한다. 은혜 없이 초라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풍성할 수 없다. 삶은 더 빈곤하고 초라하다. 자기 욕심을 좆는 것이다. 가룟유다는 누가나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재정을 맏았고, 예수님 바로 옆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모두 봤지만 정작 그는 변화가 없었다. 유다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결국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so 우리는 받는다고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는게 아니다. 못받아서 불행한 인생이 되는게 아니고, 받아도 감사하지 못해서 그의 인생은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감사하지 못할 때는 사단이 주는 완고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나님의 원리는 주는 자보다 받는 자가 더 복이 있는 것이다. 내 생활방식을 체크해보세요. 감사의 패턴이 얼마나 있는가? 긍정적인 말, 감사의 말이 얼마나 있는지? 패턴이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든다. 가난하다고 불평하고, 부자라고 행복한게 아니다.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받는 삶에서 주는 삶으로 바꿔야 하고, 불평의 스타일에서 감사의 스타일로 바껴야 한다. 그러면 구하지 않는 것도 받는 삶이 된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삶의 패턴이 어떤가를 보시고, 나도 모르게 가정으로부터 삶의 패턴이 감사없이 인색하면서 부정적인 말이 먼나 나오는가를 보길 바래요. 마음의 태도부터 바꾸면 이것이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좋은 말씀을 듣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물론 좋은 말씀이 내 인생을 바꾸지만, 그 말씀을 듣는 태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내 태도가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이 말씀 이후로는 항상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받은 것보다는 더 많이 감사하길 바래요.

Sunday, September 16, 2018

2018-09-16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믿음의 댓가를 지불하라 (히11:23~26)

시대나 문화에 따라서 같은 단어라도 의미가 다르다. 에녹목사님 집에 갔는데 물이 귀해서 우물을 깊이 파서 먹는 것을 봤다. 식당에서도 물을 사서 먹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식당에 가서 "물좀 먹어도 될까요?"라고 해서 면박을 받는 일은 없다. 아프리카는 땅을 판다고 해서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물인지도 알지 못해서 병에 걸리기도 한다. 같은 단어도 시대나 문화, 배경에 따라 다른 것이다. 오늘 보고자 하는 말은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사람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이해햐고 생각한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사건을 만났을 때 그 믿음이 드러난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실제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믿음은 갚지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만큼 댓가를 지불할 때 그 믿음이 실제가 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눅14:28~30) 우리의 믿음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때 믿음이 시작된 것이다. & 그 믿음을 선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믿음이 열매를 맺으려면 갚지불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성장하고 믿음이 열매 맺길 원하시나요? 나에게 주신 믿음만큼 갚지불을 하길 바래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믿음이 성취되고 하나님 나라에 전진하는 도전을 하길 바래요.

1. 두려움을 이기라 (23) Overcome fear

믿음의 갚지불은 두려움을 이가는 것이다. (23) 모세라고 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자녀를 위한 부모의 갚지불이었다. 이당시 에굽왕 바로가 히브리인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지라고 했다. 히브리인은 하나님 자녀라는 정체성이 너무 분명해서 에굽문화에 흡수도 안되고, 인구가 늘어나서 두려워 했던 것이다. 즉, 에굽인들은 히브리인들이 두려워서 남자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진 것이다. but 모세의 부모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이 아이를 통해 일을 하시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녀를 통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새로운 나라를 통한 믿음을 주신 것이다. 먼저는 부모에게 믿음의 갚지불이 있었다. 가장 높은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이 명령을 거스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왕보다 더 높으신 진정한 왕이 있다는 것을 믿었고,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갚지불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려고 하면 세상으로 부터 오는 두려움이 있지만,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면 그에 따른 고난이 생기는 것이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이 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여기를 벗어나는 것은 너무 어렵다. 나의 인생에 변화를 꿈꾸는 것은 너무 어렵다. 어제의 신앙이나 오늘의 신앙의 변화를 생각하지 못한다. 갇혀있는 것인데, 믿음의 변화가 있어야 여기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부모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한 것이다. 노예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고, 이 자녀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겠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자 할 때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데서 오는 두려움인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에 따라 살고자 할 때 사단은 우리를 위협한다. 두려움의 세력을 돌파하길 바래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지 못하게하는 두려움의 세력을 이긴 상태인 것이다.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소망인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싸워서 이기길 바래요. 다윗 역시 두려움과 싸워서 이겼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고 조롱하지만 어느 누구도 두려움때문에 싸울 엄도두 못냈다. but 다윗은 믿음으로 나가서 두려움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때 승리하고, 인생 가운데 돌파가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이 없거나 약한 사람은 실제가 없고 변화가 없다. 믿음으로 승리할 때 우리 인생에 돌파와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2. 더 좋은 것을 위해 거절하라 (24, 25)

좋은 것을 거절하고, 더 좋은 것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내가 좋게 여기는 것을 거절하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말씀 하신다. 지금 내가 기득권으로 쥐고 있는 것, 유익을 거절을 말한다. 에굽에서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면서 에굽을 개혁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어떻게 쓰임 받았을까요? 우선 에굽에서 받고있던 유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한 것은 어렸을 때 거절한게 아니고, 점점 왕의 자리에 다가올 때 포기한 것이다. 좋은 것을 취하는게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금 내가 좋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댓가를 요구한다. 모세는 왕자라 칭함받는 것을 거저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것을 모세는 거절하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 so 읻음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믿음인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내가 무엇을 좋아하냐느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나의 믿음인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면 내가 그것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비싼 명품은 누구나 구경할 수 있지만 그만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나올 때 아까워서 눈물을 흘리며 나오는 사람은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니까 이만한 비용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인생, 특별한 인생을 살길 원한다면 믿음에 대해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값비싼 믿음의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기뻐하길 바래요.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 물질 건강으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믿음의 갚지불인 것이다. 오늘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은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모세는 내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다. 나를 위한 안락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과 마음인 히브리인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내 수준에서 내가 하고싶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이다. 나의 한계를 초월해서 내가 기대하는 삶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 역시 지금까지의 열매없는 삶을 떠나서 믿음의 댓가를 지불한 것이다. 희생할 때 열매가 있는 것이다. 믿음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믿음이 들어오면 내 눈이 바뀌고 생각과 감정이 바뀐다. & 내가 기쁨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룩한 소원을 주신다. (빌2: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길 바래요.

3. 고난을 상급으로 여기라 (26)

믿음으로 행할 때 십자가가 있다. 사람들로부터는 조롱과 멸시와 핍박이 있을 수 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로 인한 값지불이 있다. 그 고난이 상급이 있다는 것이다. (26) 모세는 에굽에 있는 모든 보화보다 주님을 위해 고난과 수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더 큰 보화로 갚아주실 것을 믿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길 바래요. 내가 그리스도인을 위해 받는 것을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적극적으로 고난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을 위한 고난이 나의 상급이라고 믿는데 누가 이 사람을 막을 수 있을까요?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롬8:18) 모세는 기꺼이 지금 고난을 선택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할 때 고난을 이기길 바래요. 우리에게 큰 갚지불이 있을수록 더 큰 상급도 있는 것이다. 이걸 믿지 못할 때 고난이 오면 넘어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때 사람의 기준으로 전하면 고난이 없지만, 하나님이 전하는대로 전할 때 고난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씀에 순종할 때 고난을 받는다면 내가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세상편인지 예수님편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나이 삶 속에서 나의 캠퍼스, 직장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길 바래요. 그렇게 할 때 상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칭찬과 항급을 기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상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는 상이 있고, 악한 종은 버이 있다. 나의 유익만을 위해 산 사람은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믿음ㄹ 가졌는지 볼 때 개인마다 다른 상급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고난을 감당함으로 놀라운 상급을 예비하고 있는 것을 믿길 바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댓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할 때 사단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길 바래요. 내 인생에 대한 놀라운 사명과 비전이 있는데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돌파하길 바래요. 하나님이 주실 더 좋은 것을 위해 우리에게 오는 세상의 유혹을 거젏해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감당하는 모든 순종에 상급을 주실 것이다. 믿음과 순종을 붙잡고 앞으로 나가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Sunday, September 9, 2018

2018-09-09 (주일예배, 김용식전도사)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 (마25:14~30)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다. 처음은 거창하게 시작했는데, 끝이 비루하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도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결과가 어떠했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인생의 클라이막스도 중요하지만, 엔딩도 중요한 것이다. 한때 길아성같은 삶을 산 사람들이 끝없이 추락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정치, 경영, 연예인 등등을 보게 된다. (히13:7)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살라는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승리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우리의 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우리 신앙을 보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라 정도의 말씀이라면 이렇게 비유나 말씀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25:1) 25장의 전체는 마지막 때의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하며 천국은 어떠한 곳인가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성도의 삶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두번에 걸쳐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성도의 삶이 어떠한 삶이 될지 깨닫고 살아가는 우리가 될 줄 믿습니다.

1. 타국으로 떠난 주인 Master went on a journey


다시 오실 예수님을 뜻하는 것이다.

1) 종들을 부름 Called servants


단순히 종들을 불러서 모은게 아니고, 원어적인 의미로는 종들의 이름을 부르고 사명을 부르고 했다는 의미이다. 먼 타국으로 떠나면서 많은 일들을 해야겠지만, 가장 먼저 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종은 주인이 불러야 올 수 있는 자들이지,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부름받은 자이지, 교회, 친구, 친척, 셀리더가 우리를 부른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자리에 온 것이다.

2) 소유를 맡김 Entrusted his prosperty to them


달란트는 당시 화폐단위이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이 1일의 품삯이다. 16년을 아무것도 안써야 모을 수 있는 돈이 1달란트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종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냥 10만원짜리 돈을 주며 잘 간직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사업 잘하는 사람에게 맡긴게 아니고,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부리던 종에게 자신의 소유를 맡긴 것이다. 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은 것이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맡기신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는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주인이 맡기신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이다. 주인의 엄청난 특권을 거저 받은 예수님의 은혜인 것이다. 주인은 종들을 사랑하고 소유를 주고싶고 맡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다. 가진 것은 없지만, 받은 것은 많은 자들이다. 뭘 부탁하거나 해달라고 하면 "저는 못해요!!"라고 입에 습관처럼 붙은 사람이 있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우리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습관적으로 그것이 겸손한줄 알고 말했다는 것을 보게 됐다. 종의 입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종으로 부른 많은 사람들에게 달란트를 맡겨준 것이다. 빈손으로 간 사람이 없고, 난 소유가 없다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소유가 이동한 것이지, 본질이 변한게 아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을 때는 귀한 것이 나에게 오면서 쓸모없게 된게 아니다. 이것이 은혜이다. (딤전1:14) 누구의 은혜입니까? 주님의 은혜이다. 주님 속에 있었던 놀라운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게 흘렀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3) 재능대로 나눠줌 Gave talents to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주인이 자기의 소유대로 나눠준 원칙이 모든 종들에게 나눠줬다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종들의 재능대로 나눠준 것이다. 주인은 종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강점인지, 약점인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눠줬을지라도 재능이 있어서 준게 아니다. 재능이 있지만 재능에 적합하게 받은게 아니고 재능의 분에 넘치도록 받았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누구는 5달란트, 누구는 3달란트, 누구는 1달란트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나라에 쓰임받는 것은 모든게 완벽해서 쓰임받는게 아니라, 1가지 때문에 쓰임받는 것이다. 쓰임받는 사람은 그거 1가지를 잘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모든게 완벽한게 아니다. 리더들도 마찬가지이다. but 하나님은 그리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부족한게 너무 많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한가지를 쓰신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잘하는것 기준으로 대하지 않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우리 자신도 99가지를 잘해도 1가지 못하면 그 1가지가 계속 기억에 남고 남과 비교하게 된다. but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도 선악과 1그루만 먹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대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인색해서 어떤 사람은 5달란트, 어떤 사람은 1달란트를 준게 아니다. 모든 종에게 아낌없이 주고싶은 것이다. 성도는 부름받았고 분에 넘치게 받은 사람들이다.

2. 착하고 충성된 종 Good and faithful servant


1) 바로 가서 장사함 Went at once and put his money to work


착하고 충성된 종의 특징이다. 주인이 어떻게 하라고 한게 아닌데 종들은 바로 나가서 장사를 했다. 나에게 80억 정도의 돈을 누가 맡기면 어떻게 할까요? 물질이 생기면 그 사람의 마음에 중심이 보이게 된다. 이 종은 물질을 받자마자 장사를 했다. 장사를 했다는 것은 상거래를 한게 아니고 일을 한 것이다. 자기를 위해 쓴게 아니고, 주인을 위해 이 물질을 사용한 것이다. 물질을 받을 때 주인에 대한 종의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주인의 소유를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소유를 받지마자 장사하는 사람과 자신을 위해 쓰는 사람으로 나눠져 있다. 자신의 신앙유익을 위해 신앙하는 사람으로 나뉜 것이다. 여름수련회 때 놀라운 은헤를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싶고, 셀원들 보고싶고 한 것이다. "내가 나가줄께, 예배 나가줄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를 위해 쓰고싶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은헤는 바로 나가서 장사하는 자들의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자들을 기뻐하는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고 했다.

2) 달란트를 남김 (20, 22) Gained talents


종은 80년치 연봉은 받았는데 80년치 연봉을 또 남긴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그것에 건 것이다. 장사했는데 소유가 늘어나면 얼마나 기쁠까요? 장사하는데 계속 적자라면 그 사람이 기뻐할 수 있을까요? 남기는 자가 하나님의 기쁨을 받게 되어있다. 마지막 때에 남기는 것이 있는 자가 주님의 칭찬을 받는 자이다. 주님 앞에 드릴 것이 있는 것이 종의 의무인 것이다. 반드시 증가되고 남길 수 있게 되어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이다. 장사할 마음으로 주님 앞에 도전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그냥 있는게 아니고, 반드시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다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장사하는 차원으로 바껴야 한다. 주님의 소유는 반드시 증가하게 되어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 은혜가 너무 많다. 이것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주님 앞에 책망받게 되어있다. 주님은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으라고 하시는게 아니고 계속 장사하라고 하신다. (딤후1:6) 하나님의 은사를 유지하고 관리하라고 하신게 아니고, 정체된 채로 있지 말고 불과 같이 일으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인 것이다.

3) 주인의 칭찬 


잘하였도다 충성된 자라고 칭찬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많이 받은 자가 많이 남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내가 받은 다른 사람처럼, 다른 사람이 인정받은 만큼 남기면 안된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만큼 남겨야 한다. 종으로써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자"인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최고의 목표인 줄 믿습니다. 한때 놀라운 열매를 맺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가서 주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되길 바래요. 중요한 것은 다시 오실 때 칭찬하시는 것이다. 다시 와서 칭찬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다시 나가서 열심히 장사하고 남겨야 하는 것이다. 착하다는 뜻은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는 마음이 착한 마음이다. 주님은 장사하고 남기는 것을 기뻐하는데 이것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충성된 것이지, 단순히 일만 잘한다고 충성된 마음이 아니다. 주님은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선하시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충성된 것이다. (계2:10b) 주님은 대충 하라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정도까지 해야해?"라는 이론과 생각의 마음을 죽이고 충성하라는 것이다. 충성은 내 자아, 마음을 죽이는 것이다. 이럴때 주님은 내게 생명의 관을 주시는 것이다. 내가 받은대로만 남기면 되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쓰레기를 줍더라도 주님이 하라는 것에 충성할 때 그것이 상급이 되는 것이다. 동일하게 칭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이지만, 누군가는 그것으로 상급쌓는 것이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게 주신 일을 감당할 때 동일한 은혜와 칭찬이 있는 줄 믿습니다. 내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그 일을 착하고 충성된 종의 마음으로 할 때 그것이 주님의 칭찬이 되고 나의 상급이 될 줄 믿습니다. (21) 그냥 잘했다, 수고했다고 칭찬하신게 아니고, 더 많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4) 많은 것을 받음


주인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전에 내가 받았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던 것처럼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전에 받은 은사, 하나님의 일보다 이전에는 사소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더 엄청난 일로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이다. 주인의 마음은 더 많이 주고자 하는 것이다.

3. 악하고 게으른 종 Wicked and lazy servant


1) 땅에 감춤 (24)


주인이 오랜 후에 왔다고 했다. 오랫만에 온 주인에게 한 첫마디가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주인을 알았다. 이 지식이 이 종을 망하게 한 것이다. 주인에 대한 불의한 지식,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굳은 사람인데 이 지식이 이 종을 망하게 한 것이다. 호의를 베푼 주인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일을 한 것이다. 은혜를 악으로 갚은 것이다 왜곡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져도 자신에게 섭섭한 한가지가 자신의 마음에 쓴뿌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참 무서운 마음인 것이다. (히12:15) 쓴뿌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고 한 것이다. 많은 은혜를 받아놓고도 은혜가 은혜로 받지 못하고 상급으로 갚지 못하게 하는 것이 쓴뿌리 때문이다. 이 쓴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이런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하시고 심판을 한 것이다. 사실 이 종이 도독질하고 살인하고 하면서 도덕적으로 악한 일을 한건 아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악평한 것을 악하다고 한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땅에 묻어버리면 그것이 악하고 게으른 것이다. 자기 일에는 최우선권을 두면서 주인이 하라는 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살면 안된다. 자기를 위해서는 너무 바쁘면서 하나님나라에서는 아무거도 할게 없는 삶을 살면 안된다.

우리는 주님의 부름받은 자들이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엄청난 소유를 주신다. 남기는 삶이 성도의 삶이다. 이런 삶이 열리길 바래요. 24기 컴 가운데 또 하나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나가서 장사하는 기회도 주시고 특권도 주신 것이다. 나에게 주신 기회를 통해 장사할 때 더 많은 역사를 주실거라는 마음으로 나갈 때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Sunday, September 2, 2018

2018-09-02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사람 앞에 높아지려는 신앙 (마23:6~12)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좋은 직분, 지위를 통해서 이름과 명예를 내는 사람이 많이 있다. 2사람만 모여도 한사람은 회장, 한사람은 부회장이라고 직함을 단다. 자기가 한 것을 감추는 것보다 인정받으려는 것을 통해 존재감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심, 시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로 인한 시기, 질투, 분노가 따른다. 이것은 누가 고통을 주는게 아니고, 높아지려는 것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의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의 결과이다. but 결국은 하나님과 같이 가려고 하는 것이 목표이고, 욕심이 높아지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심판 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면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시면 높아지고, 낮아지게 하면 낮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따라가고, 저렇게 살면 저렇게 따라 산다. 이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이 요동치 않고 살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에 평강, 기쁨,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때에 따라 잘 사는 것에 대한 열매인 것이다.  종교적인 문제를 통해서 이런 문제로 인해 시달리거나 신앙이 걸림이 되거나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거나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들을 해결하고 넘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래요.

1. 종교인들이 좋아하는 것 What religious people like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 가는 곳이 어딘지 보니, 잔치집, 시장, 회당에 가는 것을 보고, 사람에게 높임 받길 좋아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사람이 많고 사람에게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장소를 좋아한다. 사람에게 목말라 사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사는 신앙을 하길 바래요.

1) 잔치의 윗자리 Place of honor at banquets


잔치의 윗자리는 우리가 알듯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임받는 자리로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인정해주고 높여주기 때문에 이런 곳에 앉길 원하는 것이다. but 하나님 앞에 보면 이런 자리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섬김 받는 자리고, 낮아지는 자리가 아니고 높아지는 자리다. 종교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고, 세상의 조폭과 탤런트 등이 앉아야 하는 자리이다. 사람을 지도해야하고 본이되는 위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본을 보이는 것은 높아지려는 것이다. (눅14:10) 높은 자리는 자신이 스스로 앉으려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니꼐서 앉게 하시는 사람이 앉아야 할 시기에 앉는 것이 그 자리가 영광스러운 자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높여줄 때 앉는 것은 하나님이 높임받는 자리고,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상급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인 자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정하는 곳이 아니고, 거주의 때를 정하고 자리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편에서 할 일은 끝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낮은 자리를 자처해서 앉아야 한다. (눅22:27) 이런 본을 예수님이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자리의 의미를 아신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낮은 자리에 앉은 것이다. 높은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은 낮아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자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리더가 되려고 하고,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직분과 지위에 연연하는지 생각해보세요. 그 동기가 자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리더는 자기 혼자 있으면 될 수 없다. 그래서 리더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리더가 있는 것이다. so 자기를 위해 있는 직분이 아니다. 자기를 높이는 리더는 더이상 리더가 아니고 폭군이요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직분을 주신 하나님이 끼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면 그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되는 것이다. 그 직분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바라보고 상급이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래요.

2) 회당의 높은 자리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예수님은 보는 것이 아주 정확하고 깊고 통찰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같으면 잔치집에 가면 주는 떡만 먹고 올텐데 예수님은 딴걸 보고 오신다. 회당 앞 높은 자리에 특별석이 있는데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그 자리에서 영광받고 있는 모습을 보셨다. 이 자리는 명예의 상징이다. 이 회당에 있는 이 자리는 무릎으로 예배를 더 잘 드리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영광받으려는 자리로 변질된 자리인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신다. 특별석에 앉아있으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 때문에 예배를 드리기 너무 어려울 것 같다.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 없이 공허한 마음으로 죄 짓는 예배가 될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더 좋다. 이들은 하나님의 큰 영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영광을 더 갈망한다. 하나님의 직분이 내 권세로 생각하면 그때부터 재앙이 되는 것이다. 직분을 개인의 권세로 생각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으로 채움받지 못한 사람들은 사람에게 채움받으려고 하게 되어 있다. 결국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은 괴로운 것이다. 사람의 인정과 눈치에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면 충분하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존귀하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믿으면 사람의 칭찬과 인정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3)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To be greated in the marketplaces


물건 쇼핑은 안하면서 설렁설렁 시장에 오는 것을 보셨다. 1)과 2)로도 채워지지 않아서 주중에 예배나 잔치가 없는 날은 시장에 간다.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어귀에 나타난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목마르면 이렇게까지 해야할까요? 이렇게 해야하는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처참한 인생일까요. 일종의 사람 인정 중독증세를 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깊은 곳에는 인본주의가 뿌리박혀 있다. & 이것이 일하고 존재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과시하고 이런 사람이 얼마나 공허하면 자기과시하는 말만 할까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 빈 공간을 늘 사람에게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데 마음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일을 하더라도 사람의 댓가와 칭찬, 격려가 있어야 한다.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겠어요?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인간관계가 없고 외로운 인생이 된다. (딤전6:5) 하나님의 인정을 버리는 마음을 부패한 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칭찬이 아닌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몇시간 후에 또 공허해진다. 다른 것으로 치유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체험할 때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근원적인 치유함을 받을 수 있다.

4) 랍비라 칭함 받는 것 To have en call them 'Rabbi'


예쩐예는 썬썡이라는 말은 굉장히 높이는 존경받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내면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면 탈출구(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허세인 것이다. 허세(외식)은 남들도 다 보인다. 내면의 초라한 것을 감추는 방법이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실제와 다르게 오버하고 한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이 많이 있다. 목사, 팀리더, 셀리더, 집사 등 여러 직분이 있는데 이런 직분으로 칭함받는 것이 굉장한 명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나라의 가장 귀한 명칭 중 하나가 "성도"라는 말이다.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but 사람들은 00성도님이라고 하면 부끄럽고 천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 성경에는 "형제요 자매"라고 말했다. 귀한 명칭이지만,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권위의식과 직분의식이 몸에 베어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를 확인받는 것에 정체성을 받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드러나는 직분에 무게가 없다. 목사님이 가장 좋아하는 명칭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이다. 목자는 영혼을 먹이는 인격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예수님도 "너는 랍비라 칭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게 아니고, 왜곡된 목적으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약3:1) 선생이 되면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자기가 말한만큼 행해야 하는데, 선생은 가르치기만 하지 그것을 따라 살기는 너무 힘들다. 자신의 지위 때문에 자기가 영광받는 직분이 되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so 뭔가 자신이 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격려한다. 자기가 높아지고 존경받고 영광 받으려는 사람은 자기고 피곤하지만, 남들의 눈쌀도 찌푸리게 한다. 말은 안하지만 가까이 하기 싫어한다. & 그 사람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오늘 4가지 신앙으로 걸림이 되는 사람이 없길 바래요. 그래야 걸림없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 Those who are exalted by God


자기 스스로 높아진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화를 키우는 어리석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원리를 모르면,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 쌇는 것 바께 되지 못하다. (11, 12) 정 반대로 제자들에게 말한다.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높아질 능력이 없어서 큰 자가 되는게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믿길 바래요. 이런 삶이 신앙생활이다. 내 신앙 가치관과 목표가 이 말씀과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사람에게 속한게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주권이다.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 일을 감당하다 보니 높여져 있는 것이다. (벧전5:6) 우리를 높이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해서 높아지는게 아니다. 그것은 헛수고이다. 때가 되면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때이다. 자기 때를 따라 살면 안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안됐는데 내 능력을 판단하면 안된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집착하면 끊임없는 인정과 칭찬에 목마른다.

예수님을 만나면 끝없는 인정과 칭찬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높아지면 높아지는 실속있는 신앙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