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18, 2017

2017-06-18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하나님 나라의 계산 방식 (마20:1~16)

지난 말씀에서는 마지막에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땅에서는 먼저된 자는 계속 먼저되고, 나중된 자는 항상 나중 되는 일이 많다. 이 세상의 기준은 이성적인 기준으로 순서를 정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이것을 뛰어넘는 한가지가 있는데 은혜라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원리가 추가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천국의 핵심 키워드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의 계산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일꾼에게 나중에 결국 계산해서 삯을 주는데, 그 삯이 나중에 받을 상급을 말하는 것이다. 상급은 우리식으로 계산해서 받는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받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뒤바뀌는 일이 없다. 나중에 뒤바뀌지 않으려면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해야한다.

1. 일꾼을 찾으시는 하나님 (1~7)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하고, 포도원은 하나님나라를 비유한다.  장터는 그당시에 인력시장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에서 일할 사람을 찾으려고 간 것이다.

1) 첫번째 사람들 (2)


일 잘할 사람을 찾아서 계약을 한다. 당시 노동자 한사람의 평균 일당이 1데나리온이다. 첫번째로 뽑힌 사람들은 으쓱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두번째 사람들 (3~5)


그때도 안뽑혀가고 놀고있는 사람이 있었다. 불러가는 사람이 그때도 불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르기 전까지는 낭비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일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불러주지 않으면 영적 실업자로 낭비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러서 일하라고 했고, 일한만큼 알아서 해준다고 했다. 이 늦은 시간에도 불러준 것이 너무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나왔다고 했다. 육시(오후 12시), 구시(오후3시)에도 나왔는데 그때까지도 남아서 빈둥대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 모두 가서 일하라고 했다. 주인 입장에서는 손해지만, 그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 사람들을 뽑아준 것이다. 이게 주인의 마음이다.

3) 세번째 사람들 (6~7)


제11시(오후5시)에 또 나갔는데 그때도 사람이 있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는 사람의 심정이나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오늘 하루 걸렀다고 있을것입니다. 근데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이런면, 저런면에서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루종일 헛탕치는 것이고,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주인이 이렇게 묻는다 (6) 이 사람이 이렇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7) 일하고 싶어도 나같은 사람은 쓰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서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을 이때까지 불러주지 않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을 잘 못할 것 같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안다. 체구도 작고 힘도 없고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늘 힘있고 일 잘하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우선순위에서 제외되고 열등감을 가지고 피해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시간에는 아무 소망도 없을 것이다. 일할시간 1시간밖에 안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도 그걸 다 보았고 알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면서도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말씀 하셨다. 주인은 그들이 자격없음을 알았지만, 불쌍해서 들여보냈다. 내 농장에 덕볼려고, 일을 시키려고 들여보낸게 아니다. 그 상황에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자격없을을 너무 잘 안다. 그런 자신에게 일꾼으로 대우해주고 들여보낸 주인의 긍휼과 사랑에 눈물이 났을 것이다. 첫번째로 불려간 사람은 고마움이 있을까요? 당연시, 자랑스레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들어간 사람은 달랐을 것이다. 주인에 대한 대우와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격있는 자를 부르기가 껄끄러우신 것이다. 1시간 남았는데 주인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세상은 횡재라고 하지만,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

2. 품삯을 계산하시는 하나님 (8~16)


이스라엘은 해가 지면 일을 그만한다. 품삯을 계산하는데 먼저온 자를 나중에 주라고 한다. 계산법이 여기부터 다른 것이다. 세상방법은 빨리온 사람이 빨리 받아서 일을 많이 했으니 집에가서 쉬라고 했을 것이다.

1) 나중 온 사람들의 품삯


먼저온 사람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것을 봤을 것이다. 1시간 일했으니 12분의 1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데나리온을 온전히 준 것을 보고 나중온 사람은 "잘못 준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지만, 먼저온 사람은 "나는 12데나리온 받겠네?" 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자격없는 자기에게 일한것을 똑같이 주는 주인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주인이 없는데. 건강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해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할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공통분모는 맞느냐 틀리냐, 옳고 그름을 따진다. 사랑을 모르니 그러는 것이다.

2) 먼저 온 사람들의 품삯


1시간 일한 사람보다 12배는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기대하며 나왔는데 1데나리온을 받은 것이다.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10~12) 주인은 1데나리온 준다고 계약을 했기 때문에 1데나리온을 준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부터 온 사람은 알아서 주겠다고 하신 것이고 알아서 주신 것이다. 계약대로 약속을 지킨 주인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한 것이다. (13) 이 말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14) 불평하지 말고 네것이나 가져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것가지고 내 맘대로 못하겠느냐고 말하시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가 계산방식인 것이다. 주인이 사랑과 자비를 베푼 선행을 오히려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다.  (15) 내 돈가지고 나쁜 짓을 하는것도 아니고, 내 돈가지고 선을 행했는데 왜 그러냐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것을 악하게 보고, 악한 것을 선하게 보는 것이다. (겔18:25) 내게 손해가 있으면 불공평하게 여긴다. 수련회 가기 전에 술마시고 간 사람에게 은혜주는 것을 불공평하게 여기는 것이다. 셀에서도 자기보다 늦게 교회 온 사람을 셀장으로 세워주고, 그 밑에 나를 세우는걸 불공평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니가 불공평하게 생각하는 것이다."고 하나님은 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평가기준이 다르다. 많이 준 자에게는 높은 기준으로 계산하고, 적게 준 사람에게는 적게 준 기준으로 계산하시는 것이다. (눅12:48)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계산방법이다. 이게 공평하지 않나요? 많이 준 자에게 적게 요구하고 적게 준 자에게 많이 요구하는게 불공평한 것이다. 처음 온 자는 체력이 좋고 일을 잘하는 것을 주셨기 때문에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시력도 나쁘고 체력도 나쁜 사람에게는 적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공평한거 아닌가요? but 세상은 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너는 12시간 일할 체력을 주었기 때문에 12시간을 일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꼭 능력이 많고 은사가 많은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조건 좋은건 아니라는걸 알아야 한다.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은 12시간 일을 해야 아닌 사람과 같은 것을 받는다. 계산을 해보세요. 어느 쪽을 택할래요?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성경도 많이 알고 은사도 많이 개발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다. 새신자보다 더 많은 봉사를 하지 않으면 많이 받고도 많이 받지 않은 사람과 동일하게 하면 오히려 마이너스 상급인 것이다. 받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so 많은 능력을 가지고 많은 하나님 일을 하고 명성이 자자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꼭 그 사람이 상급이 많은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목회자보다 능력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그 유명한 사람보다 상급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연약하고 하더라도 열등감 느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약하게 만든 사람도 하나님이고, 강하게 만든 사람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나라의 계산은 세상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게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는 사람은 논리에 안맞는다고 불평이지만, 이건 자기 논리에만 안맞는 것이지 하나님의 논리에는 맞는 것이다. so 하나님의 계산방식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항상 불평, 불만, 원망이 많다. 그래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면 충격적인 일이 많다고 했다. 이는 세상 살 때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고 사람의 기준으로 살았기 때문에 많은 것이다. 세상은 학력, 학위, 능력, 가문, 문벌 타령을 한다. 하지만 이건 세상의 방식이다. 신앙 안에서도 이런 잣대로 집사냐 장로냐 어떤 은사를 다녔냐, 얼마나 큰 교회를 하느냐가 큰 기준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중에 충격적인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계산은 다 쓸데없다. 무효화된다. 지금부터 계산을 바로 해야한다. 지금부터 하나님나라의 계산법으로 살면 나중에 충격받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하셨다. 남이 가진거 시기질투하지 말고 내게 주신 분량대로 해야하는 것이다.

Sunday, June 11, 2017

2017-06-11 (주일예배, 손인규목사님) 아둘람공동체 (삼상22:1~2)

오늘 말씀은 아둘람공동체이다. 인생을 살 때 누구를 만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부모님을 만나냐, 어떤 스승, 친구를 만나느냐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경험을 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지만, 하나님을 통해 놀라운 만남의 축복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래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뜻과 원리를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오늘 배경은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과 왕국에 대한 말씀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자날수록 사람의 왕의 모습으로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통치를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삶은 다윗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래서 아둘람굴에서 살게 된다. 아둘람공동체는 하나님나라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믿음의 길을 축복하길 바래요.

1. 영적 전투의 공동체


이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표를 한가지로 말한다면 성공으로 생각된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사람들은 달려간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면 이 세상의 목표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영적인 승리이다.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지키시고 세상을 정복하는 삶을 살길 바래요.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인정 받으려면 세상의 원리, 문화를 따라서 세상에 굴복하고 타협할 때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한다. 믿음을 포기하거나 타협을 요구한다. 남들은 다 이렇게 살아가는데 너만 특벽하게 별나게 살아가냐고 말한다. 일시적인 문화와 유행을 따라 살라고 강요하고 우리를 비난한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사윗의 왕국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충만함으로 전쟁터에서 승리했고,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기 위해 아둘람에 숨었고, 사울의 왕국에서 빚지고 억울함으로 슬픔과 괴로움 당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다윗도 힘들고 쫒기고 있는데, 다윗에게 도움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뛰어나야만 되는건 아니다. 너무 좋은 일이 생겨서 안다니던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나요? 아니다. 반대다. 아둘람에 모인 사람들처럼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400명의 용사가 된 것이다. 다윗과 함께 살게 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용사가 된 것이다. 다윗이 원수인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게 전쟁인데, 다윗은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오지만 죽이지 않는다. 이게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세상처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영적인 전쟁은 아니다. (롬12:21) 날마다 이세상을 나갈 때에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과 선의 무기로 세상 악을 이기는 영적인 축복이 임하길 바래요. 이 세상의 기준과 방법을 이기는 것이 영적인 승리인 것이다. 전쟁을 혼자 싸우는 용사가 있나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성령 안에서 연합되어질 때 이 세상을 이기는 영적인 용사가 되고 영적인 군사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하면 고난과 핍박이 있다. 세상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말한다면 그게 좋은 일일까요? (딤후3:12) 우리가 박해를 원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원하지 않더라도 영적인 싸움을 싸우게 되어있다. 그게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있다는 증거이다. 영적인 공격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있다는 싸인이다. 하나님과 함께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승리하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2. 비전의 공동체


우리가 인생을 살지만 먹고사는게 중요한 사람은 사울의 왕국에 살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말씀으로 살기보다 내 인생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윗과 아둘람에 살기 힘들다. 인생 폼나고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사람은 다윗과 함께 살기 힘들다. 아둘람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고, 황량한 광야에 있는 굴이다. 하나님이 나를 있으라고 하는 곳이 다윗과 아둘람 공동체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아둘람은 아주 볼품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볼품없는 질그릇 안에 가둬두신다. (고후4:7) 이 말씀을 믿으시길 바래요. 그냥 알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길 바래요. 우리 안에 있는 보배를 발견하길 바래요. 우리가 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속할수 밖에 없다. 세상 속에서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를 깨달으시길 바래요. 이 세상을 사랑하고 높아지길 원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감추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다. 세상의 지혜를 가지면 가질수록, 물질을 채우면 채울수록 그들의 영혼은 곤고하다. 이들이 온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니라, 다윗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비전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고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는 큰 포부를 가진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꼐 하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는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왜 매주 모여서 예배를 하는지 생각해보길 바래요. 이렇게 환란을 당하고 가진거 없고 힘없고 원통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비전 때문에 우리가 모여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크고 놀라운 비전을 다윗이 받게 됐다. 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사울의 왕국에서 다윗의 비전이 이뤄진다는 것은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분명히 붙잡고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수 밖에 없다.  (마7:13~14) 우리 가운데 생명의 길을 가길 바래요. (눅18:8)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원한당하고 고통과 아픔이 있는것을 아신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기다리고 비전을 향해 끝까지 나가길 바래요. (잠29:18)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생의 비전과 소망을 끝까지 지키고 붙잡길 바래요.

3. 훈련의 공동체


다윗과 함꼐 한 400명의 사람들 중에는 의지할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소망없는 사람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쓰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으셨으면 빨리 왕으로 세우고 주변을 정복해서 큰 나라로 세울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더 큰 시련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윗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비전만 이루는 사람은 필요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그릇으로 우리를 준비시킨다. but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훈련의 과정을 다윗은 도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황금과 같은 중요한 날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았다. 내가 죽든지 말든지 자기의 생명까지 하나님 앞에 내어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인생이 정말 초라했나요? 그 기간에 다윗은 시편의 대부분을 쓰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삶을 살았던 시기인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이다. 이들도 이런 어려운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다윗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훈련 가욷데 있는 사람은 가장 안전한 사람이다. 다윗도 항상 바람의 등불과 같이 목숨이 위태위태했지만, 영적으로 충만해서 시편도 쓰고 놀라운 인생을 살았다. 오히려 왕궁에서 편한 삶을 살 때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는 것이다. (삼상25:29)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인생에 고난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내 인생을 보호하고 계신 것을 선포하길 바래요.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싸개로 보호하고 계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래요. 사람들은 다윗이 빨리 왕이 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역시 세리요 어부인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님 안에서 훈련 받을 때, 그 후에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 인생을 산 것이다. 훈련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훈련하는 공동체는 바꿔 말하면 끊임없이 성장이 나타나는 곳인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뀌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날마다 주님의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전에 주신 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날마다 나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함하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은혜보다 앞으로 받을 은혜가 더 많을 것을 기대하고 믿는 삶을 살길 바래요. 하지만 과거에 머문다는 것은 지금의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가치없는 인생을 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인생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날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선한 싸움을 싸워서 이기길 바래요. 우리가 함께 할 때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믿음의 길에서 승리하는 삶 살길 바래요. 끝까지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훈련 안에서 새로운 삶 살길 바래요.

Sunday, June 4, 2017

2017-06-04 (주일예배, 정의호목사님) 지혜의 성령 (고전2:6:16)

성령강림주일이다. 2천년 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성령은 한분이지만, 교단별로, 교회별로, 개인의 신앙이 따라서 성령을 다르게 말하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성령은 보이지 않는 영이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가 어려워서이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같은 성령의 말씀을 들어도 각 사람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성령의 말씀이 영적이기 때문이다. 눈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코끼리 전체를 만졌다고 해서 똑같이 표현하지 않는다. 보지 못하고 만졌기때문이다. 꿀이 달다고는 하지만 먹어본 사람은 어떻게 단지 알지만, 먹지 못한 사람은 꿀이 달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 꿀을 먹지는 못해도 꿀을 연구해서 논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꿀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구성성분 모르고 하더라도 먹어본 사람만이 꿀의 맛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이론과 교리만으로는 성령을 알수 없다. 성령은 거룩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론으로 설명하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이론으로는 잘 알지 못해도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성령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게 성령에 대해서 잘 아는 방법이다. 사도바울은 성경을 많이 쓴 사람이자, 최고의 율법학자였다. 바울은 성령을 만나고 자신이 연구했던 율법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다. (4) 성령을 받기 전에는 높은 신학지식과 달변인 설득력있는 말로써 사역을 했었지만, 지금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한다고 했다. 성령이 나타난 사람은 더이상 율법, 지식, 종교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더이상 그렇게 살지 못하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한다는 것이다. (5) 내가 설교를 내 말과 지혜와 설득력 있는 말로 눈물을 뺄수는 있지만, 그건 내 말로 한 것이다. 내 지혜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 논리, 교리들로 하면 사람의 지혜에 근간한 종교가 되는 것이다. 나에 의해 신앙하는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따라 신앙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사람의 지혜로도 사역해보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해본 후 비교가 되어서 이번 말씀을 하는 것이다. 말씀에서는 성령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를 계속 비교한다.

1. 하나님의 지혜


(6) 이 세상의 지혜도 있고 통치자의 지혜도 있다. 하지만 성령의 지혜는 이런 지혜와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로 살면 세상을 잘 살수 있고, 통치자의 지혜로 살명 종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지혜는 없어질 지혜이다. 세사의 지혜와 통치자의 지혜를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수 있다. (7)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중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신앙 한다고 가능한게 아니고 성경을 파고든다고 가능한게 아니다. 사도바울도 물랐던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따르는 스데반이 먼저 알았다. (9)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놀라운 것을 감춰놓았는데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이다. 그 지혜를 통해서만이 천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 권세있는 자도 예수님을 모른다. 신앙은 영적인 세계에 속한 것이다. 이세상에 보이는 차원에서 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어렵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영적인 것은 이세상의 지혜로는 알수 없기때문이다. 육신의 일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영적인 지혜를 알기 힘들다.

2.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방법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 안에 엄청난 보물을 넣어두셨는데 정작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걸 알수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의 지혜인 성령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게 핵심 키다.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살아야 하는가이다. (10) 하나님의 깊은 뜻을 누가 알겠어요? 우린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근데 (10)에 놀라운 말씀을 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할 수 있는 것이다. (11) 하나님의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13) 영적인 일은 영으로만 분별하는데 하나님의 일인지 사단의 일인지는 성령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12)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을 받게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엄청난 것을 주셨는지 알게 하려함이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엄청난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엄청난 유업으로 만드신 것이다. 일단 이런것을 믿어보세요. 사단이 준 사람의 영이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작은자, 형편없는자라고 하면서 속인다. (고후4:3~4)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심을 알지 못한다. 세상의 영이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막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위해 이런 기도를 한다. (엡1:17~19)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길 바래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해야 하는지 이 구절에서 말한다. 첫째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한다. 그래야 더 깊은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이다. 둘째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나를 부른것 같아요? 비전(소망)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소망을 모르니까 이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열려야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궁극적은 목표가 뭔지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 목적, 영원한 소망이 무엇인가 찾으시길 바래요. 셋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이미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계시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그것이 보이지 않고, 풍성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풍성하지 않은 신앙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시의 영이 닫혀져 있어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의 영이 임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고 얼마나 큰 유업을 받았는지 상상해보세요. 그게 실제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서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찾길 바래요. 마지막 네번째는 (19)이다.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크심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지혜의 영이 있으면 이 네가지를 받고 능력있는 삶과 신앙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않는 사람보다 더 초라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 눈을 뜨는 것이 성령이다. 초라한 거지가 먹을게 없어서 초라하게 사는데, 이미 오래전에 그의 통장에 1천억이 남아있다는 것을 모르면 그 돈이 있어도 거지로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가지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알만한 능력이 없어서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없어서이다. 내 앞에 거지의 모습만 보이니까 그러는 것이다. 사람의 영으로는 알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거 자체가 어떤 의미인가를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은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so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어렵지 않게 사는 능력이 있다.

3.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요한 말씀이다.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성령에 열린 사람이 있는 반면, 성령에 닫힌 사람이 있다. 사람의 영을 가진 사람, 세상의 영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 성령의 영을 가진 사람들 각각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한다. 더군다나 교회는 영적인 곳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빌미로 영적인 교회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 오해가 일어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끼리 말이 통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은 그사람들끼리 말이 통한다. so 같은 말씀, 같은 일,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셩격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다.

1) 성령의 일을 어리석게 봄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이상하게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이다. 성령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차이 때문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방언이 너무 좋아보이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본 경건한 유대인들이 술취한 것으로 보고 유치하게 보고 조롱했다. 성령충만해서 웃음이 터지고 자유함이 터진 것을 기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저질로 보는 사람도 있다. 왜냐면 자신은 한번도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걸 누가 하느냐이다. 개그맨이나 웃음치료사가 하는게 아니다. 가장 거룩하고 완벽하신 분이 성령님이다. 그런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절대 완전하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좋지않은 눈으로 보는게 얼마나 좋지 않은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미쳤다, 술취했다고 하는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다윗이 법궤가 와서 너무 좋은 나머지 춤을 췄는데 바지춤이 벗겨질 정도로 췄는데, 그걸 아내인 미갈이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했던 미갈에게 하나님은 평생 자녀를 낳지 못하게 했다. 성령이 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성령이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고, 세상의 통치자인 사단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고전3:18~19) 내 지혜가 누구로부터 나온 지혜인지 봐야 한다. 세상의 지혜와 성령의 지혜가 어디서 나오는지 봐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지혜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자는 자신을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선비의 총명을 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부끄럽게 보이고 유치하게 보이고 조롱거리로 보인다면 내가 무슨 지혜를 가진가를 생각해보길 바래요. 성령의 지혜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2) 성령의 일을 이해하지 못함


이게 정확한 말이다. (14) 종교인들은 성령이 하는 일들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하는 일을 귀신이 하는 일로 여겼다. 그래서 성령이 하는 일을 마귀가 하는 일로 말한다. 그들이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귀신을 쫒아내면 같은 편을 쫒아내기 때문에 비난하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일은 영으로써만 분별된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일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단의 일과 영적인 일을 분별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의 영을 가진 종교인들은 성령의 일을 비난한다. 가만히 있어도 죄를 안짓는데, 그러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린 그런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롬8:7~8)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영에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할수도 없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종교생활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근심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교회를 다녀도 성령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고 근심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영혼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성령충만한 사람을 보면 내 자신이 먼저 기쁨과 사랑과 평안이 나 먼저 생기는 것이다. & 주위사람이 느낀다.

성령강림주일이다. 성령은 한번 충만했다고 평생 가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항상 성령충만하라고 하는 것이다.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정결한 삶을 통해 성령충만하길 바래요.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지만 회개함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부유한 기업이 무엇인지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의 영이 열리길 바래요.